며칠 전이었다. 깊은 어둠으로 떨어지듯 닿은 국회의사당역은 환한 밝음으로 많은 사람을 맞았다. 9호선은 유독 다른 지하철과 달리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지하철은 긴 터널을 유유히 달렸다. 몇몇 역을 지나고 안내방송에서 '다음 역은 샛강역입니다.'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샛강?'

매번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오늘따라 '샛강'이란 목소리와 단어가 귀를 자극한다.

'그래, 예전 내가 살던 곳에도 샛강이 흘렀지. 여름이면 멱을 감고, 겨울이면 썰매를 타고, 봄이면 온갖 이름 모를 꽃들이 피었지. 여름방학이면 조무래기들이 소를 끌고 나와 꼴을 먹이곤 했지.'

정지용의 <향수>가 떠오른 것도 내 유년 시절 기억 한 귀퉁이에서부터 나왔다. 정지용 시인은 노래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 대는/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의 시는 모두 '과거 시재'를 쓰고 있다. '지즐 대는' '그리워' '줍던 곳' 등등. 우리에게 낯익은 풍경이 스쳐 떠오르지만 이제 그런 곳은 없다는, 진한 향수가 코 끝으로 밀려든다.

생산↔소비의 피폭시대

꽃이 피고, 옛 이야기 지즐대는 '그곳'은 과거의 추억이 돼 버렸다. 많은 도시인들은  주말이면 도시를 빠져나간다. 하루 정도 도시를 벗어난 사람들은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신을 버리기에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생산과 소비가 삶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생산하지 않고, 소비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도시화 시대에 우리는 서 있다.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은 도시를 벗어나고 싶지만 끝내 되돌아오는, 도시에서 삶을 마감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담았다.

소설은 쓰레기 처리장인 '꽃섬'이 주무대이다. 그렇고 그런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꽃섬' 오두막 동네는 버려진 각목과 판자, 깔판으로 집을 뚜딱뚜딱 만든다. 구역별로 나눠 쓰레기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재활용품을 모아, 이를 되판다. 그 돈으로 '꽃섬'의 식구들은 하루를 일하고 하루를 먹고 산다.

열넷(하지만 자신은 열여섯이라 말한다)살 '딱부리'도 시장 통에서 행상을 하던 어머니를 따라 이곳에 왔다. 딱부리의 아버지는 새 사람이 되기 위해 군인에 의해 어딘가로 끌려갔다. 이런 내용을 유추해 보면 <낯익은 세상>은 198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딱부리의 삶은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흘러간다. 그곳에서 아수라 반장(특정 구역을 책임지고 있는 반장)과 어머니가 살림을 합치지만, 딱부리에게 떨어진 것은 '땜통'이라는 ,약간은 부족한 아수라반장의 아들, 동생 한 명 뿐이다.

<낯익은 세상>은 딱부리와 땜통의 성장 소설이자, 생산과 소비의 피폭시대를 담고 있다. 

같은 공간이지만 전혀 다른, 현실↔김서방네  

딱부리와 땜통이 자주 찾아가는 '빼빼 엄마'의 집은 성장하는 소년들의 두 가지 세상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상처 받은, 혹은 세상에서 버려진 개들을 키우는 '빼빼 엄마'는 빙의(영혼이 옮겨 붙는 현상)를 받은 사람이다.

그녀는 언제나 현실과 김 서방네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온갖 쓰레기와 그곳에서 버려진 것을 찾아 재활용하는 현실의 '꽃섬' 사람들과 '꽃섬'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곳에서 살다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김 서방네'의 예전 '꽃섬'은 같은 위치에 있지만 완전히 다른 공간을 보여준다.

딱부리와 땜통은 빼빼엄마의 빙의로 예전의 꽃섬을 본다.

현실의 꽃섬은 파리떼가 우글거리고 덤프트럭이 온갖 허접 쓰레기를 버리면 작업반원들이 구역별로 우르르 떼거지로 몰려 깡통과 옷가지와 종이를 집어 올린다. 그게 현실이고 딱부리의 인생이다.

그러나 쓰레기 장이 들어서기 전의 꽃섬은 그렇지 않았다. <낯익은 세상>의 낯익으면서도 낯선 꽃섬과 만나는 것은 그래서 더욱 가슴을 울린다. 

딱부리와 땜통이 찾아간 예전의 꽃섬, 김 서방네의 꽃섬은 어땠을까. 소설은 이렇게 묘사한다.

"한가운데 숲이 우거지고 나직한 산도 있는 이웃 섬이 보였고 돛을 단 조각배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강변 풀밭에는 송아지를 거느린 어미 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풀꽃이 가득 피어난 강가에는 오리가 날아 앉거나 물장난을 치는 게 보였다."

내가 살던 그 예전의 '샛강'이 있는 마을과 정지용이 노래한 '향수'의 옥천이나, 딱부리와 땜통이 경험한 예전의 '꽃섬'. 과거의 모습이 됐고, 돌이킬 수 없는 현실 앞에 그리움의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다.

낯익음↔낯섦

<낯익은 세상>은 열 넷의 딱부리 눈으로, 딱부리 인생으로 바라본 현실을 그린 소설이다. 황석영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자본주의는 세계의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자본주의를 인정한 셈이다.

<낯익은 세상>은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쉽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그 배경으로는 누구나 경험했을, 혹은 누구나 생각했을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석영 작가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내가 도시 외곽의 쓰레기장에 주목한 것은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의 삶이 끝없이 만들어서 쓰고 버리는 욕망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는 삶의 목적이 되었고 온 세계가 그것을 위하여 모든 역량과 꿈까지도 탕진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풍경은 세계의 여느 도시 외곽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매우 낯익은 세상이다."

작가의 말처럼 <낯익은 세상>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지속적으로 '낯익은 세상'과 만난다.   난지도와 같은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가 없어졌지만 지금도 우리는 쓰고 버리고, 재생하고...쓰고 버리고....또 재생하고. 자본주의의 생산과 소비는 끝없이 이어진다.

황석영 작가의 말처럼 '자본주의는 세계의 운명'이 된 걸까.

최근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 간단한 두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는 세계의 운명'이 아닐 수도 있다. 자본주의를 버리고 떠나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이라 함은 자기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자발적'이란 말에는 자본주의 현실과 싸우겠다는, 혹은 자본주의 현실을 버리겠다는 적극적 의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자본주의가 과연 세계의 운명'이 돼 버렸는지는 좀 더 생각해 볼 일이다.

'가난'이란 말을 보면 더욱 자본주의에 대항한다는 의미가 크다. 생산과 소비에서 풍족한 소비를 꿈꾸는 현대인들과 달리 이들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생산과 소비의 쳇바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기본이기 때문에 '가난'이라는 말 자체는 정반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것은 자본주의와 투쟁한다는 의미로 읽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라는 소설의 박범신 작가의 말이 언뜻 떠오른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이 문명에서 그나마 오래 살려면 인간다운 정서를 가급적 버리는 게 좋다."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해 보면 어떨까. "자본주의에서 그나마 오래 살려면 자본주의 습성을 가급적 버리는 게 좋다"라고.

우리에게 '낯익은 세상'은 과연 무엇일까.

끝없이 생산과 소비라는 쳇바퀴에서 숨 쉴 틈 없이 살아가는 현실인가. 아니면 이제는 잃어버린, 가족과 이웃이 있었고 들꽃과 돛단배가 유유히 거닐던 조금은 가난했지만 소박했던 그런 모습인가.   

두 가지 모두 우리에게 '낯익은 세상'이자 혹은 '낯선 모습'이 될 수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서울 강남. 이곳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 물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강남은 자신을 버리는 곳이다. 실제의 ‘나’는 사라지고 나를 자처하는 ‘아바타’만 살아 움직인다. 그 ‘아바타’를 ‘허수아비’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강남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기업이 수십 층의 높이의 건물로 우뚝 서 있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사라진다. 다만 그 회사가 추구하는, 그 회사가 원하는 ‘아바타’가 돼 움직일 뿐이다. 이메일도 자유롭게 보내고 받지 못하며 특정 인터넷 사이트에 대해서는 차단된다. 회사의 주인이 아니라 회사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회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부품 또한 최고의 부품들이다. 판사를 지낸, 검사를 지낸, 교수를 지낸, 기자를 지낸 우리 사회에서 ‘국민을 생각하고 국민 편에 서서 일하겠다고 스스로 선서한’ 나름대로 인기 있고 촉망받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불려 들어간다. 불려 들어가는 것을 영광으로 안다. 모두 기꺼이 ‘자신’을 버릴 자세가 돼 있다.

‘자신’을 버리고 ‘아바타’로 살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려는 이유, 그리고 그 이끌림의 배경은 무엇일까.

강남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유기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알고 있는 한 사람도 강남에서 ‘자신 그 자체’는 없다. 그가 강남에 사는 이유는 단 하나. ‘아이들’ 때문.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고학력자인 그는 ‘아이의 아바타’가 돼 움직인다. 하루에 몇 군데 학원에 아이들을 직접 실어 나르는 운전하는 ‘아바타’가 되고 수시로 달라지는 교육정책을 대신 공부해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정보의 아바타’로 변신한다. 그곳에서 그는 사라지고 ‘아이들을 위한 아바타’만 존재할 뿐이다.

이 강남이 있기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어떤 변화를 겪어 왔을까.

황석영의 <강남몽>은 해방이후부터 지금까지 강남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그 역사를 토대로 한 편의 이야기를 엮었다. 이야기의 중심 테마는 부동산이다. 서울의 땅이 몇 만원에서 몇 천만원까지 왜 변해 왔으며 그중에서도 강남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살피고 있다.


10대의 젊은 나이에 화류계에 뛰어들어 성공의 성공을 거듭하는 박선녀. 화류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조직폭력배. <강남몽>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강남이 부동산 측면에서 거친 역사적 수레바퀴를 탄다.

상품백화점이 붕괴되고 그 붕괴의 현장에 박선녀 자신이 파묻히게 된다는 소설속 설정은 의미하는 바가 작지 않다. 한평생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일궈온 부동산이 단 한 번에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설정은 ‘강남’의 현재성을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몽>은 이런 박선녀의 성장을 통해 강남 부동산의 이면과 그 실체를 파헤치고 있다. 소설 중간쯤부터 <강남몽>은 조직 폭력배의 역사에 주목한다. 전국 조직폭력배가 어떻게 서울에 입성했으며 그 계보는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들춘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역사적 접근과 긴 나열로 소설의 주목도가 떨어진다.

월간시사잡지 <신동아>가 <강남몽>의 조직폭력배 묘사 부분이 자신들의 기사를 표절했다고 일침을 가하면서 이 문제는 또 다른 논란으로 이어졌다. 황석영 작가가 “인용 부분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부분은 유감”이라고 밝혀 해당 기사를 참조했음을 시인했다.

<강남몽>이 강남의 역사를 부동산과 조직 폭력배 차원에서 접근했다면 조정래 작가의 <허수아비춤>은 자본에 주목한다. <허수아비춤>의 주제는 명확하다. 책 본문에 나와 있는 한 부분이 이 책의 주제이다. 2천 년 전 사마천이 돈에 대해 언급한 말을 조정래 작가는 그대로 인용한다.

자기보다 열 배 부자면 그를 헐뜯는다.

자기보다 백 배 부자면 그를 두려워한다.

자기보다 천 배 부자면 그에게 고용 당한다.

자기보다 만 배 부자면 그의 노예가 된다.

'일광그룹'의 '문화개척센터'라는 명함을 들고 다니는 윤성훈과 박재우, 강기준이 <허수아비춤>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일광그룹의 ‘개’가 돼 모든 더럽고,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없애는 비밀특공대 역할이다. 자본주의가 만든 ‘아바타’였다.

그들의 임무는 제품의 생산과 품질 개발이라는 자본주의 본연의 임무에 있지 않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돈 놓고 돈 먹기’. 각종 로비는 물론 비자금을 조성하고 정계, 학계, 언론계를 장악하는 것이 업무이다.

‘일광그룹’이 지금 우리나라 현실에서 어느 기업을 지칭하는지는 읽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간다. 이들 3인방은 일광그룹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회장의 ‘아바타’로 활약하며 일광그룹의 가장 핵심 부품으로 자리 잡는다.

국세청 직원을 만나고, 검사를 접대하고...그렇게 그들은 판사든, 검사든, 교사든, 기자든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스카우트한다. 이들 ‘3인방’에 의해 스카우트 당하는 사람들은 ‘마이 플레저(My Pleasure)'를 외치며 두 손들어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세상을 다 가진 듯 받아들인다.

‘국민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선서하던 판사와 검사.

‘학문을 통해 이 세상 사람들이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를 외쳤던 교사.

‘펜은 칼보다 강합니다. 이 펜으로 정론직필하겠습니다.’던 기자.

‘자본’과 ‘돈’ 앞에서 이들의 초심(初心)은 찢어진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천문학적인 액수를 안겨주면 판사와 검사·기자 출신 ‘아바타’들은 윤성훈과 박재우·강기준보다 더 추악하게 변한다. 일광그룹의 ‘개’가 돼 걸림돌이 되는 모든 요소를 물어뜯고 제거하는 역할에 사력을 다 바친다.

황석영의 <강남몽>과 조정래의 <허수아비춤>은 201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당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부동산, 조폭, 자본을 통해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괴상하고 비뚤어진 얼굴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자 하는 목적은 또렷해 보인다.

그러나 읽는 내내 조정래 작가에게서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에서 느꼈던 생생한 인물 이미지, 당대의 모습이 눈으로 그려지는 세심한 묘사 등을 느낄 수 없었다. 지나친 말과 말들이 뒤섞여 조정래 작가 특유의 맛을 안타깝게도 볼 수 없었다.

<강남몽>도 마찬가지. 앞서 언급했듯이 지나친 조직폭력배의 역사적 계보 등이 군더더기로 다가왔다. 소설인지, 신문기사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개밥바라기별>에서 시원스럽게 뻗어가던 황석영 문체는 <강남몽>에서 멈춘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소설은 자본주의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조정래 작가를 비롯한 문인들이 2010년 12월20일 삼성전자에서 발생한 백혈병 문제를 두고 시국선언을 한 적이 있다. 삼성전자 공장에서 근무한 직원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백혈병에 걸려 죽거나 지금도 투병중인 상황이다.

그 자리에서 박노해 시인은 ‘삼성블루’라는 시를 발표했다. 이 시가 의미하는 것, 그리고 <허수아비춤>과 <강남몽>의 주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자본주의의 많은 문제는 진행중이다.

삼성 블루-박노해

오늘은 역사적인 날

글로벌 삼성 회장님이

대한민국 사법부를 접수한 날

법과 정의와 민주주의를 돈으로 사버린 날

자본권력의 힘을 온 세계에 보여준 날

이제 대한민국은 삼성 공화국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회장님으로부터 나온다

이제 삼성 로고 앞에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바라보라

국기에 대한 의례처럼

글로벌 삼성에 대해 경례하라

차갑고 푸르게 일그러진 원

그 안에 하얗게 들어박힌

삼성 앞에서는

하얘져

새하얘져

검은 뇌물도

검은 범죄도

법도 언론도 국가도

하얘져

쌔하얘져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글로벌 삼성 앞에서는

휴대폰도 컴퓨터도 TV도

얇아져 더 얇아져

진실도 정의도 인간성도

그들은 유령처럼 드나들어

법원도 검찰도 청와대도

언론사도 정당도 대학도

마음대로 들어가 바꿔버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버려

삼성전자의 처녀들은 하얀 우주복을 입고

독한 납용액과 1급 발암물질 벤젠과

날카로운 전자파와 방사선을

복숭아빛 발그란 몸으로 빨아들여

모든 것이 하얘져

핏속까지 하얘져

붉은 피톨도 푸른 눈물도

우리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황유미처럼 박지연처럼

하얘져

새하얘져

저 차가운 삼성 블루

일그러진 돈의 원 안에 들어가면

생명도 양심도 영혼도

우리들 살아 있는 미래도

하얘져쌔

하얘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