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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04 '현대사의 산 증인' 고은…그는 누구인가

고은 시인이 올해도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습니다. 지난해 10월7일이 기억나는군요. 기자들이 모두 그렇겠지만 지난해 저희 매체에서도 고은 시인이 수상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미리 기사를 준비했었습니다. 물론 1년동안 이 기사는 '보류' 상태로 머물고 말았습니다만.

정확히 1년이 지난 2011년 10월6일(현지시간)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문학상을 발표한다고 하죠? 이미 수상 작가에게는 9월말 통보가 됐다고 하는데...고은 시인이 늘 후보로 머물고 있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의 작품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불교 승려에서 만인보의 시인이 되기까지
고은 시인이 자신의 약력을 소개해 놓은 그의 홈페이지에 가면 전생연보가 먼저 나온다. 그는 자신을 먼 옛날의 세습 방랑시인부터 시작해 카스피 해안의 암말, 내몽고의 목동, 추풍령의 일자무식 나무꾼의 전생이력을 가진 이로 자신을 소개한다.

시인 고은은 1933년 8월 1일 군산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3살 어느 날 저녁,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집 '한하운시초(韓何雲詩抄)'를 습득해 "그 시집을 밤새도록 읽고 가슴이 찢어 질 것 같은 문학적 충격을 받은" 것이 문학과 첫 만남이었다.

그 후 그의 인생사에는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긴다. 1950년에는 6·25전쟁으로 4학년을 휴학하고, 3개월 동안 인공 치하에서 강제 노역이 시작된다. 밤에는 인민군의 명령으로 파손된 활주로 복구 작업을 하고, 낮에는 집에서 일하며, 습작시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1·4후퇴로 서해 선유도에서 시작된 피난살이에서 하루에도 몇 십편의 습작 시를 지었다. 당시 군산항에서 자살을 시도,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1952년에 시인은 불교 승려가 됐다. 법명 일초(一超). 효봉(曉峰)스님의 상좌로 들어갔다.

승려 생활 10년만에 고은은 환속을 선언한다. 60년대는 방황의 시대였다. 만취상태에서 제주도 앞바다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만 3일을 자지 않고 마시기도 했다.

1970년에 다시 한번 정교하게 추진한 음독자살이 예비군 특훈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 만 30시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같은 해 아버지의 부음과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는다.

1973년에 그는 화곡동으로로 이사 후, 박정희 정권 3선 개헌반대 운동의 첫 단계인 개헌청원 운동에 백낙청 등과 함께 문인대표로 참가한다. 문인 간첩단사건 구명운동을 주도하고 민청학련사건의 김지하 석방운동을 시작하며 허무주의자의 딱지를 떼어낸다.

그는 작가의 사회적·역사적 책무를 절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각각 초대간사와 문인대표로 활약하며 경찰서, 정보부의 단골고객이 된다.

이 시기는 그의 작품이 쏟아져나오는 시기이기도 하다. 시집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장편소설 '일식', '이상평전', '어린 나그네', '고사편력'과 편역서 '당시선', '두시언해' 등이 모두 한 해에 쏟아져 나온다.

제1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강연·선언문 낭독 등으로 연행·구금은 물론 전담형사 및 정보부 기관원의 24시간 감시·동침·동행이 계속된다.

1975년에는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선포로 칩거해, 한동안 절필을 하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1년 동안 소주 1천 병을 통음했다고 한다. 민주구국헌장사건 주모자로 약 1개월 동안 정보부의 지하실에 구속된 뒤, 송광사에 유폐당하고,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서울 구치소에 수감·석방되는 등 70년대는 고난의 시대였다.



그래도 그는 꿋꿋이 유신체제에 대한 항의삭발을 하고, 평화시장·남영나일론·해태제과 등의 노사문제, 동일·상고·원풍 등의 사태에 대한 대책문제로 노동 현장에 다가가게 된다. '똥'· '쪼까니 딸들에게'· '열다섯 살의 노동자 바우에게'· '전태일'· '장준하' 등 근로자 격려시를 각 집회에서 발표한다. 그래도 집은 늘 찾아오는 젊은이들로 메워졌다.

80년대, 다시 암흑기가 시작된다. 계엄하에 작품발표가 금지됐지만, '무단(舞丹)'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집 '산 너머 산 너머 벅찬 아픔이거라' 를 출간한다. 5월 이후 내란음모죄, 계엄법, 계엄교사 죄목으로 조사 받고, 재판 받는다. 문익환·이문영· 예춘호 등과 육군교도소에 구속되어 죽음 직전의 극한 상황을 체험하고, 군법회의에서 20년을 선고 받는다.

1983년에는 풍운의 독거생활을 끝내고, 이상화와 결혼한다. 주례 함석헌, 축도 문재린, 축시 문익환, 축사 이문영. 백낙청, 집전 리영희 교수 등으로 극히 제한된 친지 100여 명만을 초청한다. 1985년에는 서사시 '백두산'을 계간지 '실천문학'에 연재하다가 강제 폐간당한다. 딸 차령 씨가 태어난다.

고은 시인의 대표작 '만인보(萬人譜)'는 1986년부터 연재가 시작된다.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된다. 동대문·세운상가 그리고 서울역 광장의 시위에 참가한다. 박종철·이한열 군의 추도회를 주관하고 추도시를 낭독한다. 6·29선언 이후 치뤄진 대통령선거에서 재야가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것을 보고 저술에 몰두한다.

1989년에는 '남북작가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남북작가회담을 제안하고, 회담장소로 갔다가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됐다.

1993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리영희 교수 등과 함께 사면 복권되고, 처음으로 복수여권을 발급받았다. 제1회 대산문학상 시부문을 수상했다. 이후 고은 시인은 자유롭게 해외활동을 하게 된다. 1990년대, 유럽·미국·남미·북한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문인들과의 교류가 결실을 맺어, 프랑스 정부로부터 은관 문화훈장을 받는다. 같은 해 전 38권의 '고은전집'이 출간된다.

2010년 올해 4월 고은 시인이 30년동안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총 4천1편의 시로 나타내 '시로 쓴 인물 백과사전'이란 별명이 붙은 만인보가 완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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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