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글을 읽고 쓰는 것일까. 소리와 문자는 태고 적부터 있었던 일이라 너무 당연한 질문이자 우문일 수도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소리를 지르고 글을 읽고 쓰게 마련인데. 그런데도 우리는 좋은 글을 읽으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감동을 얻고 행복을 느낀다. 짜릿한 쾌감을 갖는다. 아마도 인간이 만들어낸 글 속에서 또 다른 ‘나’를 찾는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조정래 선생님의 <황홀한 글감옥>은 우리에게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 글을 읽고 쓰는데 있어 어떤 점들이 고려돼야 하는가 등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던져주고 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으로 이어지는 대하소설을 완간한 선생인 만큼 그의 경험에서 샘솟는 외침이 감동적이고 직접적이다.

<황홀한 글감옥>은 독자들이 질문한 내용에 조정래 선생이 일일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꾸며졌다. 아주 쉽게 읽힌다. 어떤 사실을 이야기할 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설득력 있는 방법도 없다. 손수 경험해 봤기 때문에 눈으로 보이듯 독자들은 ‘글쓰기의 매력’과 ‘글 읽기의 감동’으로 빠져들게 한다.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며, 그 시대의 산소다

조정래 선생이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작가에 대한 정의이다. 작가는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 문자를 통해 시대를 읽고, 그리고, 표현하는 ‘인류의 스승’이라는 지적이다. 그 기록은 수천 년, 수 만년이 지나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위대한 유산’으로 남는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모든 ‘문자 기록’들이 그러할까. 그렇지 않다. 작가가 인류의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 인식과 그 시대의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로 기록해 내는 기본적 바탕이 깔려 있어야 한다. 조정래 선생이 강조하는 글쓰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작가를 정의함에 있어 조정래 선생이 지적한 ‘작가는 그 시대의 산소다.’라는 부분이 가슴 속으로 잔잔하게 다가온다. 산소란 무엇인가. 우리가 숨 쉬는데,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이, 소중하다는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가지만 ‘산소’가 없다면 곧바로 죽을 수밖에 없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작가는 이 시대의 사회상과 잘못된 부분 등을 정확히 짚어주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독자들에게 ‘산소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는 강조점이기도 하다. ‘인류의 스승’이라는 정의보다 ‘산소 같은 존재’라는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조정래 선생은 미국 작가 스티븐 킹이 말한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정말 뭐든지 써도 좋다. 단,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라는 부분을 인용한다. 스티븐 킹의 재인용에서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에 방점이 놓여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정래 선생은 이같이 말하면서 “작가는 진실 지킴이로서 산소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 길이 작가의 길이며, 따라서 작가가 된다는 것은 이 시대 그 무엇보다 영광스러운 일이며, 그 영광을 위해 부단히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하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수천 명의 인물 창조, ‘뚫어지게’ 쳐다본 자연의 모방에 있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읽어 본 독자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숫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조정래 선생은 약 1천200여명의 인물을 창조해 냈다. 이 인물들은 모두 이름이 다르다. 작가가 직접 이름까지 지어낸 독창적 캐릭터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조정래 선생은 프랑스 3대 작가로 꼽히는 플로베르의 말을 인용한다. 플로베르는 “나는 파리의 등적부에 적힌 숫자만큼 내 인물을 창조해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조정래 선생은 플로베르의 인간 관찰에 대한 유심함을 설명했다.

“나는 파리 시내의 모든 사람이 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뚫어지게 관찰한다.”

이 말은 플로베르와 조정래 선생 둘 다에 들어맞는 말이다. 조정래 선생은 항시 주변 인물 에 대한 깊은 생각과 관찰을 통해, 한 인물에 대해 뚫어지게 쳐다보고 사고하는 습관을 통해 인물을 받아들이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조정래 선생은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기 때문에 자연을 뚫어지게 관찰하고 유심하게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자연 속에 살아가는 여러 인물들을 ‘뚫어지게, 유심하게’ 쳐다보면 자연스럽게 독특한 인물들이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수많은 인물들이 실존하지는 않지만 마치 내 곁의 이웃, 내 곁은 친구, 내 곁의 부모같이 다가오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태백산맥> 소년 전사 조원제 탄생의 비밀도 감동적

<태백산맥>을 쓰고 있을 때 가장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가 빨치산 경험이 있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노라고 조정래 선생은 고백했다. 서슬 퍼렇던 1980년대의 일이니, 누가 당당히 나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겠는가. 빨치산의 가담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가뜩이나 정기적으로 경찰의 방문을 받고 있을 시기에.

그때 만난 사람이 정치경제학자인 박현채 선생님이었다고 회고했다.

박현채 선생은 빨치산부대에서 문화부장까지 지낸 산증인이었다. 무엇보다 박현채 선생은 조정래 작가와 지리산을 직접 찾아가면서 일일이 당시의 경험과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면서 <태백산맥>에 살아 숨 쉬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조정래 선생이 박현채 선생에게 이렇게 묻는다.

조정래 선생: “선생님, 선생님이 겪으신 일을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에 등장시키면 어떨까요?”

박현채 선생: “그려? 그것도 괜찮허겄제.”

조정래 선생: “그런데, 선생님 이름을 그대로 써도 괜찮을까요?”

박현채 선생: “내 이름을......? 나야 영광이제만. 그거 긁어 부시럼 될지도 몰르는디? 글안해도 주목허고 있다는 소문잉께 니 조심혀야 써.”

조정래 선생: “예. 그러면 새 이름을 짓지요.”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 조원제이다. 조원제는 이름만 다를 뿐 빨치산 박현채 선생의 부활이었다. 조정래 선생은 <황홀한 글감옥>에서 박현채 선생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접 지리산을 동행하는데 언제나 앞장섰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조정래 선생은 <태백산맥>의 한 가운데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황홀한 글감옥>의 부제는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로 돼 있다.

감옥에서 황홀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무한히 할 수 있는 공간에 갇혀 있다는 의미. 갇혀 있을 뿐, 갇혀 있는 자신은 오히려 행복한 상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곳은 감옥일 리 없다. 오히려 모든 귀찮은 존재와 괴롭히는 것으로부터의 도피처일지도 모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아침 출근길, 버스를 타면서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말에 주목해 본다.

태어난 것 자체가 상처일 지도 모른다. 세상의 온갖 악(惡)과 만나는 시간이자 '상처투성이 세상'으로 선택의 순간도 없이 던져지는 것이기에. '상처 입은 자가 사는 도시'에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선택할 수 없는 필연과 우연으로 내쳐진다.

한강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상처투성이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누가 더 큰 상처가 있는지 어디 한번 재보자는 독기가 서려있는 듯 한 느낌이다. 한강의 소설에는 늘 상처 입은 이들이 등장한다. 한강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영혼과 존재들이 '상처'로 태어나고 '상처'로 성장하고 '상처'로 죽어가는 하나의 상징인지도 모를 일이다.

'상처 입은 영혼'들이 <바람이 분다, 가라>에는 가득하다.

서인주(화가)와 이정희(작가).

둘은 친구이다. 늘 붙어 다닌다. 여고생들이 학교가 끝나면 서로 팔짱을 끼고 환한 웃음을 머금고 걸어가는 다정한 친구이자, 서로 삐지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 둘은 수유리 같은 골목에서 살았다. 집이 이백 미터 떨어져 있었다.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

비극적 삶이 대물림되는, 유전되는 인자를 가지고 있을까. 이 물음 또한 이 소설에서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서인주의 어머니는 배속에 인주를 잉태하고 있을 때 결혼식도 올려보지 못하고 약혼자를 잃게 된다. 그것도 끔찍한 교통사고로.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눈 내리던 미시령 고개를 다녀온 뒤의 일이었다. 이후 어머니는 술에 의지하게 되고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서인주도 마찬가지. '자살은 대물림된다.'는 명제는 이 소설에서 필연조건이다. 그렇고 그런 사람과 결혼을 한 서인주는 아이(민서)를 낳자마자 10층 아파트에서 같이 동반 자살하는 소동을 벌인다. 이 일로 이혼을 하게 되고, 그림에 빠져 산다. 그가 주목하는 그림은 '달의 뒷면'이다. 달은 늘 지구를 돌고 있지만 한 쪽 면만을 보여준다. 서인주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달의 뒷면'에 집착한다. 그곳에서는 우주로부터 위협받는 온갖 상처가 존재하는 곳이기에. 그리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상처이기에. 서인주 역시 젊은 나이에 미시령 고개에서 추락하면서 생을 마감한다.

어머니의 '미시령'과 딸 서인주의 '미시령'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정희는 그런 서인주의 성장 과정을 고스란히 곁에서 지켜본다. 이정희는 서인주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주는 자살한 사람이 아니다."는 판단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정희. 그리고 우연히 <미술정신>이란 잡지에 실린 서인주에 대한 기사를 접한다. 글을 쓴 사람은 강석원. 강석원은 <미술정신> 글에서 서인주 화가에 대한 평론과 요절한, 위대한 서인주에 대해 장황한 글을 보여준다. 죽은 이를 다시 살려보겠다는 의지가 한 번에 느껴지는 글이다.

서인주의 외삼촌(이동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가장 순수하면서도 영혼의 상처가 없는 인물이 이동주이다. 그림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먹으로. 물리학을 전공한 이동주는 우주 탄생이전의 진공 같은 '없음(無)'을 강조한다. 인주와 정희에게 고구마를 삶아주고, 찐 계란을 건네주는 사람이다. 깨끗한 한지에 먹을 묻히고 먹이 한지의 길을 찾아 갈 때까지 언제나 천천히 천천히 기다리는 사람이 이동주이다. 그에게는 급할 것이 하나 없다. 그러나 이동주는 선천적 질병을 갖고 태어났고 37세의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상처뿐인 이 세상'을 떠난다.

강석원과 류인섭, 그리고 진수.

이제 남자들의 '상처'를 들추어 보자. 남자들은 여자를 지배하는 존재들인가.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세 명의 남자를 통해 '누가 누가 더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지 어디 한번 재보자.'는 질문을 던진다.

강석원은 서인주의 남자였다고 스스로를 마취시킨다. 그는 서인주를 위해 가정을 버리고, 서인주에게로 다가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강석원 스스로 만든 자기 최면이었다. 서인주가 자살한 뒤 그는 '서인주 되살리기'에 모든 것을 바친다. 강석원은 서인주를 만난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으며, 개인전을 주선하고 이후 서인주 화가의 모든 사회적 명성을 위해 자신이 노력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인주는 자살하지 않았다."는 정희의 말에 강석원은 내뱉는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서인주가 죽었다는 겁니다. 서인주 전집을 만들 겁니다. 방송에서도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겁니다. PD와 연락하고 있습니다. 서인주 미술관도 건립할 겁니다. 죽은 서인주를 살리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칠 겁니다."

류인섭과 진수의 등장은 한참 뒤에 나온다. 서인주와 직접적 관계는 없지만 서인주 어머니의 상처에 깊이 관련돼 있는 인물이다. 진수는 정보부 간부의 아들로 고등학생이다. 진수에게 류인섭은 영어를, 서인주의 어머니는 수학을 과외 선생이었다. 그렇게 셋은 '상처투성이 현실'에서 맺어진다.

한창 에너지가 넘칠 진수, 서인주 어머니의 매력에 빠져든다. 류인섭도 우연히 마주친 서인주 어머니의 깊은 눈에 매료돼 사랑이 빠진다. 셋은 우연찮게 미시령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이라기보다는 오기와 자만, 남자들의 지배욕이 불러온 하나의 '독한 이벤트'라고 하는 것이 맞을 듯.

한 겨울, 수온주가 영하 20도를 가리키고 있을 때, 미시령에 그들은 도착한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운석처럼 떨어졌다. 진수의 넘치는 에너지는 급기야 서인주 어머니에 대한 저돌적 발산(이게 추행일까)으로 표출되고 류인섭과 서인주 어머니 그리고 진수는 선생과 학생이 아니라 '삼각관계'로 빠져든다. 그러나 이미 그때 서인주 어머니는 한 레지던트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배속에는 서인주가 자라고 있었다.

미시령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날, 서인주는 자신의 약혼자가 있는 병원 앞에 차를 세워달라고 주문한다. 서인주 어머니가 차에서 내려 약혼자와 병원 앞에서 만난다. 그때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진수가 차를 무자비한 속도로 돌진해 서인주 어머니의 약혼자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그 모습을 류인섭은 고스란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건 결말은 뻔하다. 정보부 간부의 아들인 진수는 목격자로, 졸지에 류인섭은 피의자가 돼 버린다. 류인섭은 4년을 복역한 뒤 출소한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처 입은 영혼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서로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면서 끝없이 추락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달의 뒷면'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달의 뒷면'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그것은 '달의 뒷면'에 더 큰, 자신의 상처보다 더 큰 흠집과 상처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만들면서 위로로 삼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상처도 대물림되는 유전적 인자를 가지고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거부하지도, 부인하지도, 소리치지도 말고 받아들일 수밖에.

우리는 '상처'로 태어나고 '상처'로 성장하고 '상처'로 죽는다고.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