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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08 왜 글을 읽고 쓰는가⋯조정래의 <황홀한 글감옥>

우리는 왜 글을 읽고 쓰는 것일까. 소리와 문자는 태고 적부터 있었던 일이라 너무 당연한 질문이자 우문일 수도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소리를 지르고 글을 읽고 쓰게 마련인데. 그런데도 우리는 좋은 글을 읽으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감동을 얻고 행복을 느낀다. 짜릿한 쾌감을 갖는다. 아마도 인간이 만들어낸 글 속에서 또 다른 ‘나’를 찾는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조정래 선생님의 <황홀한 글감옥>은 우리에게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 글을 읽고 쓰는데 있어 어떤 점들이 고려돼야 하는가 등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던져주고 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으로 이어지는 대하소설을 완간한 선생인 만큼 그의 경험에서 샘솟는 외침이 감동적이고 직접적이다.

<황홀한 글감옥>은 독자들이 질문한 내용에 조정래 선생이 일일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꾸며졌다. 아주 쉽게 읽힌다. 어떤 사실을 이야기할 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설득력 있는 방법도 없다. 손수 경험해 봤기 때문에 눈으로 보이듯 독자들은 ‘글쓰기의 매력’과 ‘글 읽기의 감동’으로 빠져들게 한다.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며, 그 시대의 산소다

조정래 선생이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작가에 대한 정의이다. 작가는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 문자를 통해 시대를 읽고, 그리고, 표현하는 ‘인류의 스승’이라는 지적이다. 그 기록은 수천 년, 수 만년이 지나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위대한 유산’으로 남는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모든 ‘문자 기록’들이 그러할까. 그렇지 않다. 작가가 인류의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 인식과 그 시대의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로 기록해 내는 기본적 바탕이 깔려 있어야 한다. 조정래 선생이 강조하는 글쓰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작가를 정의함에 있어 조정래 선생이 지적한 ‘작가는 그 시대의 산소다.’라는 부분이 가슴 속으로 잔잔하게 다가온다. 산소란 무엇인가. 우리가 숨 쉬는데,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이, 소중하다는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가지만 ‘산소’가 없다면 곧바로 죽을 수밖에 없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작가는 이 시대의 사회상과 잘못된 부분 등을 정확히 짚어주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독자들에게 ‘산소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는 강조점이기도 하다. ‘인류의 스승’이라는 정의보다 ‘산소 같은 존재’라는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조정래 선생은 미국 작가 스티븐 킹이 말한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정말 뭐든지 써도 좋다. 단,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라는 부분을 인용한다. 스티븐 킹의 재인용에서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에 방점이 놓여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정래 선생은 이같이 말하면서 “작가는 진실 지킴이로서 산소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 길이 작가의 길이며, 따라서 작가가 된다는 것은 이 시대 그 무엇보다 영광스러운 일이며, 그 영광을 위해 부단히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하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수천 명의 인물 창조, ‘뚫어지게’ 쳐다본 자연의 모방에 있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읽어 본 독자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숫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조정래 선생은 약 1천200여명의 인물을 창조해 냈다. 이 인물들은 모두 이름이 다르다. 작가가 직접 이름까지 지어낸 독창적 캐릭터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조정래 선생은 프랑스 3대 작가로 꼽히는 플로베르의 말을 인용한다. 플로베르는 “나는 파리의 등적부에 적힌 숫자만큼 내 인물을 창조해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조정래 선생은 플로베르의 인간 관찰에 대한 유심함을 설명했다.

“나는 파리 시내의 모든 사람이 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뚫어지게 관찰한다.”

이 말은 플로베르와 조정래 선생 둘 다에 들어맞는 말이다. 조정래 선생은 항시 주변 인물 에 대한 깊은 생각과 관찰을 통해, 한 인물에 대해 뚫어지게 쳐다보고 사고하는 습관을 통해 인물을 받아들이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조정래 선생은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기 때문에 자연을 뚫어지게 관찰하고 유심하게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자연 속에 살아가는 여러 인물들을 ‘뚫어지게, 유심하게’ 쳐다보면 자연스럽게 독특한 인물들이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수많은 인물들이 실존하지는 않지만 마치 내 곁의 이웃, 내 곁은 친구, 내 곁의 부모같이 다가오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태백산맥> 소년 전사 조원제 탄생의 비밀도 감동적

<태백산맥>을 쓰고 있을 때 가장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가 빨치산 경험이 있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노라고 조정래 선생은 고백했다. 서슬 퍼렇던 1980년대의 일이니, 누가 당당히 나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겠는가. 빨치산의 가담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가뜩이나 정기적으로 경찰의 방문을 받고 있을 시기에.

그때 만난 사람이 정치경제학자인 박현채 선생님이었다고 회고했다.

박현채 선생은 빨치산부대에서 문화부장까지 지낸 산증인이었다. 무엇보다 박현채 선생은 조정래 작가와 지리산을 직접 찾아가면서 일일이 당시의 경험과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면서 <태백산맥>에 살아 숨 쉬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조정래 선생이 박현채 선생에게 이렇게 묻는다.

조정래 선생: “선생님, 선생님이 겪으신 일을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에 등장시키면 어떨까요?”

박현채 선생: “그려? 그것도 괜찮허겄제.”

조정래 선생: “그런데, 선생님 이름을 그대로 써도 괜찮을까요?”

박현채 선생: “내 이름을......? 나야 영광이제만. 그거 긁어 부시럼 될지도 몰르는디? 글안해도 주목허고 있다는 소문잉께 니 조심혀야 써.”

조정래 선생: “예. 그러면 새 이름을 짓지요.”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 조원제이다. 조원제는 이름만 다를 뿐 빨치산 박현채 선생의 부활이었다. 조정래 선생은 <황홀한 글감옥>에서 박현채 선생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접 지리산을 동행하는데 언제나 앞장섰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조정래 선생은 <태백산맥>의 한 가운데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황홀한 글감옥>의 부제는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로 돼 있다.

감옥에서 황홀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무한히 할 수 있는 공간에 갇혀 있다는 의미. 갇혀 있을 뿐, 갇혀 있는 자신은 오히려 행복한 상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곳은 감옥일 리 없다. 오히려 모든 귀찮은 존재와 괴롭히는 것으로부터의 도피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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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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