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Mail.
‘카프카의 여인’이 ‘그’에게 보내는 메일.

“...늦은 밤 인터넷을 통해 내일 아침 신문에 나올 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같은 일을 놓고도 세상 주류들의 생각은 이렇구나. 무엇이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은 우리에게 너희들도 이렇게 생각해야지 주류로 들어올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있구나. 그 앞에 우리들의 생각이나 존재는 참으로 작은 벌레 같구나. 저절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카프카의 여인 도라 디아만트, 혹은 그레테’라고 이름을 붙인 낯선 이로부터 ‘그’는 한 통의 메일을 받는다.

낯선 여인이 보낸 메일 내용을 유추하다보면 우리는 ‘카프카의 여인’과 ‘그’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정도는 가늠하지 어렵지 않다. ‘카프카의 여인’은 다름 아닌 독자이고 ‘그’는 신문사에 다니는 사람쯤으로 보인다. <카프카의 여인>이란 단편 속에서 ‘그’는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위의 메일은 독자가 논설위원의 칼럼을 보고 보낸 일종의 ‘독자의견’ 정도이다. ‘독자의견’ 치고는 아주 문학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어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의견 정도가 아주 의미심장하다. ‘카프카의 여인’이 보낸 메일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인터넷 시대에 살다보니 내일 아침자 신문에 실린 ‘그’의 칼럼을 미리 볼 수 있었다는 것

두 번째, 같은 현상을 두고도 주류들의 생각은 이런 것이구나 라고 ‘카프카의 여인’은 느꼈다는 것. 즉 ‘카프카의 여인’과 ‘그’의 세계관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카프카의 여인’은 ‘그’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세 번째, ‘카프카의 여인’은 그러면서 주류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의(혹은 그런 사람들의) 생각과 존재는 ‘벌레’에 불과할 수 있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

이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카프카의 여인>이란 짧은 단편은 금방 읽힌다. 짧고 간단하게 읽히지만 내용은 가볍지 않다. 신문사 논설위원과 독자의 짧은 의견나누기에서 시작된 소설은 현재 한국사회의 키포인트를 건드리고 있다.

‘카프카의 여인 도라 디아만트와 그레테’라고 적은 독자는 왜 ’도라 디아만트와 그레테‘를 언급했을까. 신문사 논설위원인 ‘그’도 그레테는 알겠는데, 도라 디아만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을 언급할 때인 것 같다. <변신>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벌레’로 변신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가 ‘그레테’이다. ‘그레테’는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의 여동생으로 소설속 등장 인물이다.

도라 디아만트는 소설 속 인물이 아니다. 실제 인물이다. 그녀는 그렇다면 누구인가. 논설위원인 ‘그’는 ‘카프카의 여인’에게 메일을 보낸다.

Second Mail.
‘그’가 ‘카프카의 여인’에게 보내는 답신 메일.

“...그레테가 소설 속에 나오는 그레고르 잠자의 동생인 것은 알겠는데, ‘카프카의 여인 도라 디아만트’는 누구이며, 당신은 언제 어떤 계기로 처음 카프카를 읽었는지 궁금하다...”

논설위원인 ‘그’는 궁금증으로 메일을 보낸다. 그러면서 ‘그’는 “서로 세상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할지라도 어쩌면 우리는 카프카에 대해 저마다 특이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라고 덧붙인다.

‘그’는 중학교 시절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다. 계기는 국어선생이 추천했기 때문. 도서관에서 빌리려 했지만 이미 대출중이어서 몇날 며칠을 빌릴 수 없을 만큼 그 책은 인기가 갑자기 많아졌다. 마침내 <변신>이란 책을 손에 넣었을 때 도서카드에 적힌 이름을 보고 ‘그’는 ‘벌레들의 명단’처럼 보이는 이름들을 발견한다.

도서카드에는 <변신>이란 책을 읽은 학생들의 이름이 순서대로 적혀 있었는데 하나같이 성적 순이었다. 국어 선생이 추천했고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이 경쟁하듯이 <변신>이란 책을 빌려 읽었던 것이다.

<변신>이란 소설집에는 <선고> <화부>같은 다른 소설도 함께 게재돼 있었다. ‘그’는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면서 ‘벌레 같은 이름’들이 적혀 있는 도서카드에 이렇게 적는다.

“여기 벌레들 가운데 몇 명이나 이 책을 제대로 읽었을까.”

Third Mail.
‘카프카의 여인’이 다시 ‘그’에게 보내는 메일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특별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그’에게 메일이 다시 도착한다. ‘카프카의 여인’이 보낸 메일이다.

“...카프카는 죽기 전, 결핵요양원에 실려 가 어느 한 여인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임종 직전 아주 잠깐 동안의 행복이었습니다. ‘도라 다이만트’가 바로 그 여인이랍니다...

참, 내일 저녁, 그곳으로 나갈 것 같습니다. 제 손에 작은 촛불 하나 들고. 님의 메일까지 받았으니 그곳에서 전과는 조금 다른 기분으로 님이 일하는 신문사를 바라보게 되겠지요. 그곳을 밝히는 많은 촛불 가운데 제 촛불 하나가 있을 겁니다.“

이쯤 되면 소설의 내용은 더욱 명확해 진다. ‘카프카의 여인’이라고 밝힌 독자는 촛불집회에 참석할 만큼 사회 운동에 적극적인 인물로 해석된다. 그리고 그녀가 내일 갈 곳은 다름 아닌 광화문이고, ‘그’가 일하는 신문사는 광화문에 우뚝 서 있는 어느 신문사를 말하는지 머리에 떠올리기에 어렵지 않다.

Forth Mail.
‘그’가 ‘카프카의 여인’에게 보내는 메일.

‘그’는 그녀에게 답신을 보낸다.

“...저도 지금의 삶과는 다른, 서로 짐작 못한 특별한 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춥지 않게 옷 단단히 입고 나오시길 바랍니다. 밖에 나가 보니 날씨가 여간 춥지 않습니다.”

Ending.
광화문에 선 ‘카프카의 여인’과 ‘벌레’의 진액

서로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나누는 이야기는 이 정도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

5.

저녁이 되자 신문사 앞 광장은 온통 일회용 컵으로 양초를 감싼 촛불들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지난해 미군 탱크에 목숨을 읽은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시민 시위대의 모임이었다. 몇만 명이 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게 촛불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시간 그는 시위대의 촛불물결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사무실 안에 있었다. 시민 시위대들은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구호를 외치고 물결처럼 촛불을 흔들었다. 발생한 지 일 년이 되어가는 그 사건에 대해 사건 발생 초기부터 대부분의 신문들이 지면에 인색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중에서도 이쪽 신문이 제일 인색했다. 대통령 선거와 맞물려 이삼 일이 멀다 하고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서자 뒤늦게야 거기에 대해 이런 식으로 문제 제기를 해서도 안 되며 문제 해결의 옳은 방법도 아니라는 식의 말만 해왔던 것이다.

“저런 벌레 같은 것들. 저것들이 다 저쪽 표라고. 추모시위 좋아하네. 저게 다 불법 선거 운동이지. 반미를 해서 즈들이 어쩌겠다는 거야? 빨갱이 같은 놈들.”

거리가 가장 잘 내다보이는 그의 방으로 온 한 선배 논설위원이 창밖의 촛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엄청난데요. 숫자가.”

“일주기라잖아, 며칠 후면. 벌레 같은 놈들.”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벌레 같고, 그러면 저쪽에서 볼 때 이쪽은 어떨까요?”

“어떻긴 뭘 어때? 불법 시위하고 불법 선거운동 하는 놈들인데.”

그러다 밤은 깊어 해산 직전 신문사 건물을 향해 계란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선배 논설위원의 말대로 창밖 쪽의 벌레들이 이쪽을 향해 뿜어대는 배 속의 진액이거나 똥처럼 창문까지 날아온 달걀들이 유리창에 터져 달라붙고, 또 미끄러지듯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몇 개인지 개수도 셀 수 없는 달걀이 그렇게 신문사 건물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들이 보면 이 건물이 바로 벌레들의 성채처럼 보일 것이다. 또 그래서 저렇게 이쪽을 향해 돌을 던지듯 달걀을 던질 것이다.

그는 문득 저 많은 촛불 가운데 자신에게 메일을 보냈던 카프카의 여인이 들고 있는 촛불은 어느 것일까 생각했다. 왠지 아득한 느낌 속에서도 그는 그녀의 촛불이 그녀의 언 몸 전체를 다 녹일 만큼 밝고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밤, 그렇게 유리창 안과 밖에서 한 벌레가 다른 한 벌레를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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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랑은 있었다. 우주가 탄생하기 전에 이미 사랑은 있었다. 사랑이 사람을 만들었고 우주를 탄생시켰다. 전 역사를 통틀어 인류를 지탱해 온 것은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남녀가 사랑하면서 자식이 태어나고 어버이와 자식의 사랑을 통해 가정이 꾸려지고, 형제의 사랑을 통해 힘을 얻고, 친구와 친구의 사랑으로 사회가 만들어지고, 국가에 대한 사랑을 통해 지구촌이 만들어진다.

사랑해!

Ich liebe dich!

나라의 언어를 모르는 초등학생도, 영어를 전혀 모르는 나이 많으신 분들도 ‘아이 러브 유.’ ‘쥬 떼므.’가 ‘사랑해.’라는 표현이라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다. 이미 태어나기 전에 우리 머릿속에 저장돼 있는 유전적 형질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은 그 어느 감정과 단어보다 위대한 단어이자 느낌이다.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사랑은 존재했을 만큼 역사에 있어 가장 강력한 발전적 촉매제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된다.

사랑으로 인해 욕망이 꿈틀거리고, 비뚤어진 욕구가 샘솟고, 인류의 역사에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사랑으로 세상이 바뀌고, 사랑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까지 몰고 가는 비참함도 경험한다.

창비세계문학 중 <어느 사랑의 실험>은 사랑에 대한 시대의 기록을 담았다. 그것도 독일 소설가들의 단편소설을 통해 19세기 초에서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작가들의 ‘사랑에 대한 철학’ ‘사랑에 대한 기록’을 담았다. ‘Ich liebe dich!’라고 외치는 작가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정직한 법관’은 사랑과 욕망에 대한 긴장관계를 그린 단편이다.

젊은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늙은 부자 상인과 결혼한다. 부자 상인은 글로벌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다. 그녀는 남편이 집을 비우더라도 남편에 대한 사랑만큼 자신한다. 절대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은밀하게 움직이는 욕망은 젊은 그녀조차 어쩔 수 없는 욕구.

젊고 유능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이 젊은이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 젊은이(정직한 법관)는 그녀에게 자제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사랑으로 인해 욕망이 비뚤어지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다. 그것으로 인해 이 세상은 얼마나 고독해졌던가. 욕망의 자제를 통한 사랑의 진정성에 접근한다.


요한 루트비히 티크의 ‘기발한 페르머’는 사랑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보여준다. 페르머는 루이제를 사랑하고, 루이제의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루이제가 페르머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약혼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페르머는 어처구니없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자신도 동시에 두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으면서.....자신의 두 사랑은 용납될 수 있는 사랑이지만 루이제의 두 사랑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독일 소설은 가끔씩 우리 정서와 동떨어진 부분을 발견하곤 한다. 아마도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클 터인데 가끔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페르머가 루이제의 약혼 소식을 듣고 불같이 루이제 집으로 달려간다.

페르머: “이 사기꾼! 아, 분해서 미치겠다!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

페르머는 분을 삭이지 못해 화장분갑을 집어 들더니 우지직 부러뜨려서 창밖으로 내던져버렸다.

루이제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루이제: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러시면 어떡해요! 이제 뭘로 화장하라는 말이에요?"

이 부분에서 나는 웃고 말았다. 사랑의 극한 대립 속에서 그 까짓 화장분갑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루이제는 ‘이제 뭘로 화장하라는 말이에요?’라고 말하는 광경이 그려지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물론 루이제의 속물근성을 작가는 내비치고 싶었겠지만.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은 형제애를 다루고 있다. 어릴 적 형(까를로)의 잘못으로 장님이 되고 만 제로니모! 형은 동생 제로니모를 평생 책임지겠다고 다짐한다. 제로니모가 여행객들을 상대로 기타를 연주하면 형은 동냥을 한다. 그렇게 둘은 먹고 산다. 형은 동생의 그림자이며 동생의 눈이다.

그런데 한 여행객의 등장으로 두 형제는 갈등으로 빠져든다. 한 여행객이 형에게 1센트를 주면서 동생 제로니모에게는 “조심해! 내가 20프랑 금화를 줬거든. 속지 말라고.”라고 말한다. 여행객이 장난을 친 것인데......

보이지 않는 제로니모는 이 여행객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다. 장님에게 장난을 치는 여행객은 없었으니까. 급기야 형에게 금화를 내놓으라 다그친다. 형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동생의 채근은 이어지고 형에 대한 배신감으로 굳어진다. 형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사랑하는 동생 제로니모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20프랑 금화를 훔치기는 상황까지 이르는데......

둘은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그때서야 제로니모는 전후 사정을 깨닫는다. 경찰에 체포됐지만 두 사람은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까를로는)제로니모가 부드럽고 행복한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걸 보았던 것이다. 눈을 잃기 전 어린 시절 이후로 이런 표정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까를로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이제는 절대로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중략)”

헤르만 헤쎄의 ‘짝짓기’는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속담을 연상시킨다. 키가 매우 작은 온겔트는 포목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많은 아가씨들을 접한다. 울렁울렁 봄바람 불어오는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여자에 대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키가 작은 온겔트에게 누구 하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포일레라는 여자(그렇게 잘 생기진 않았지만 따뜻한 정을 가지고 있는 여인)가 온겔트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관심을 표현하지만 온겔트는 아는지 모르는지 무시한다.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찾고 그리워하고 내심 기대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그러나 포일레가 가지고 있는 배려심과 다정다감함, 상대방을 챙겨주는 심성 등은 ‘얼굴이 예쁘고 잘 생긴 미모’와 비교할 수 없는 값어치가 있다. 온겔트는 눈에 보이는 ‘미모’에서 점점 눈에 보이지 않는 ‘값어치’를 깨닫게 된다.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역발상적인 단편이다. 인간에게 잡힌 원숭이가 화자로 등장한다. 원숭이는 총을 맞고 인간에 생포됐는데 우리에서 탈출하기 위해 ‘인간이 되는 것’을 자처한다. 원숭이는 자신이 인간이 되기 위해 벌였던 여러 가지 일들을 직접 인간에게 이야기하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물근성을 가감 없이 들춘다.

특히 화자(원숭이)가 인간이 되기 위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술 마시는 것’이었다는 부분에서는 언뜻 입가에 미소까지 만들어진다. 원숭이가 인간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직접 읽어보면 여러 가지 느낌으로 다가온다.

헤르만 브로흐의 ‘바르바라’는 그 어느 단편보다 깊은 맛을 던져주었다. 브로흐는 늦은 나이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늦깎이 작가였다고 한다. 소설을 쓰기 전에 장사도 하고 학업도 늦게 시작한 그의 소설은 그래서인지 그 읽는 맛이 깊고 고요하다. 인생을 깊게 접한 글쓰기의 재치, 여유 있는 표현, 깊은 성찰 등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바르바라는 기형적인 십대를 보낸 여자 의사이다. 의붓아버지에게서 고통 받고 집을 뛰쳐나와 방황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자신을 재워주는 그 어떤 남자와도 같이 잠을 잘 만큼)...끝내 그녀를 구원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뒤늦게 공부를 해 의사가 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낀다.

그녀는 공산당원이기도 하다. 한 개인보다는 집단을 중요시하며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바르바라를 사랑하는 42세의 수석 남자 의사. 그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르바라’의 글 중에서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해 오는 의사에게 바르바라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비극적이었던 십대시절)그런 부당한 일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이 세상에서 불의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끌리게 된 거예요. 물론 그렇게 추구하는 정의라는 것이 한낱 허상에 불과하다는 건 진작 부터 알고 있었고, 지금은 더 확실히 깨닫고 있긴 해요....하지만 그처럼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없다면 우린 살아갈 수 없어요. 인류의 막연한 미래를 위해, 언제 도래할 지 알 수 없는 정의를 위해 사는 거죠....”

이 구절을 보고 조금은 ‘멍’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바르바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허상을 좇고 있다? 왜?

‘막연한 미래’를 위해 ‘언제 도래할 지 알 수 없는 정의’를 위해 그녀는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마치 이 구절은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던지는 말이지 않을까.

이 구절을 보면서 우리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온갖 비리와 온갖 부정, 온갖 비정상이 판치고 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정의는 찾아볼 수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따져 보기 전에 ‘정의는 (이미) 실종됐다.’는 말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수많은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기업은 분명 있는데......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개발독재에 의해 자연은 무참히 무너지고 있는데......누구 하나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빈부격차는 심각하게 벌어지고 먹고 살기 빠듯한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는데......책상에 버티고 앉아 이 나라는 충분히 부자의 나라이며 좋은 나라라고 외치고 있다.

공장에서 백혈병에 걸려 꽃다운 소년, 소녀들이 죽어가고 있는데......그 기업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버티고 있다.

과연 ‘정의’는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정의’는 만들어지는 것인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바르바라의 말처럼 “막연한 미래와 언제 도래할 지 알 수 없는 정의”는 인류가 끝나는 날,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일까. 우리가 생존해 있는 날, 정의는 도대체 오지 않는 것일까.

독일 작가들의 단편을 담은 <어느 사랑의 실험>은 다양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모습을 되뇌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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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