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시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교재(가장 모범적이면서도 가장 풍부하면서도 가장 자유로우면서도 가장 애절하면서 가장 감동을 많이 주는)를 갖고자 한다. 우리나라 시단에서는 교재로 활용되고 있는 시인들이 김소월, 정지용, 한용운 등이다.

그런데 잊혀져 있었던 한국시사에서 1980년대 ‘백석’이란 시인이 등장한다. 이 시인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신경림 시인은 <시인을 찾아서>에서 백석 시인을 자신의 교재였다고 고백했다.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시인이기도 했던 백석 시인이 현재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고형진 씨가 묶은 <정본 백석 시집>은 백석의 시를 1935년에서 48년까지 묶은 책이다. 백석의 다양한 시를 정본과 원본으로 엮어 쉽고,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책이다. 백석의 참모습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중 1부는 <사슴>이다. <사슴>은 백석 시인이 1936년 1월 펴낸 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총 33편의 시가 실려 있다. 백석 시인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에서 태어났다.

하얀, 흰 밤을 이토록 선명하고 아련하게 담을 수 있을까

<사슴>에 실린 시중 <흰밤>이란 시를 읽어 본다. 짧은 시이지만 시구 속에 한반도, 한민족의 모든 한(恨)과 하얀 색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녯성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흰밤> 전문>

질목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옛날의 성(城). 그 성문의 돌담에 하얀 달이 떠오른다. 고즈넉한 돌담도 그렇고 하얀 달이 떠오르는 모습이 슬프면서도 낭만적이고 향수를 자극한다. 돌담에 하얀 달이 떠오를 때쯤 성 곁에 있는 오래된 초가지붕 위에는 하얀 박이 매달려 있다. 초가지붕에 외롭게 달빛을 받으며 하얀 빛을 발하는 박⋯

무엇보다 백미는 마지막 연에 있지 않을까. 하얀(흰) 밤이 온통 밝히고 있는 그곳에서 수절과부(아마도 수절과부였던 만큼 흰 소복을 입고 있지 않았을까)가 목을 매 죽은 밤도 ‘흰밤’이었다고 시인을 기록한다.

백석 시인의 <사슴>에 실려 있는 시 중 너무나 선명한, 그리고 짧은 4연으로 돼 있는 시구 속에 한민족의 역사와 한(恨)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시이지 않을까 싶다.

봄이 찾아온다. 봄비가 내리는 모습을 후각적으로 표현한 너무나 짧은 시도 <사슴> 편에서 눈길을 끈다.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비>의 전문)

아카시아 꽃이 만발할 때 봄비가 내린다. 비는 아카시아 잎을 떨구어 길가를 온통 하얗게 물들인다. 마치 흰 방석을 깔아 놓은 것처럼...그런 시각적 모습은 ‘물쿤 개비린내’로 대치되면서 후각적 이미지로 전환된다. 아카시아 꽃이 봄비를 맞아 떨어지고 떨어진 아카시아 꽃들이 흙과 만나면서 전해져 오는 야릇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듯 하다.

<초동일>이란 시는 시각적 이미지가 극대화된 시이다.

흙담벽에 볕이 따사하니

아이들은 물코를 흘리며 무감자를 먹었다

돌덜구에 천상수가 차게

복숭아나무에 시라리타래가 말러갔다(<초동일> 전문)

‘초동(初冬)’이니 겨울이 시작되는 시점인 것이다. 백석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정주는 아무래도 추위가 일찍 올 것이다. 그런 어느 겨울이 시작되는 날, 때마침 따뜻한 햇살이 내리 비친다. 아이들은 물코를 흘리며 ‘후!후!’ 숨을 불어가며 뜨거운 무감자(고구마)를 먹고 있다.

그 모습 한 켠으로는 돌덜구(돌절구)에 천상수(天上水 비)가 내려 가득차 있고 복숭아나무에는 늦가을에 추려 놓은 시래기가 잘 말라가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겨울이 시작되는 한 모습을 이처럼 잘 그려낸 시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밤과 바람을 통해 고즈넉한 정경을 표현한 시도 눈에 띈다. 시각적 요소는 물론 백석 시인의 특징 중 하나이다.

별 많은 밤

하누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즞는다(<청시>의 전문)

별이 많은 밤이다. 지금은 도시에서 별을 보는 것은 특별한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보지도 못한다. 온갖 네온사인등과 먼지에 가려져 별이 떴지만 별은 보이지 않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 백석 시인의 시절에는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그런 별이 수없이 떠오른 밤, 하늬바람(늦여름과 가을에 부는 서풍)이 불어 아직 익지 않은 푸른 감이 ‘툭’하고 하나 떨어진다. 조용한 잠을 청하고 있던 개가 화들짝 그 소리에 놀라 짖어댄다. 별 많은 밤과 푸른 감이 던져주는 시각적 효과에 개가 짖는 청각까지 합해져 자연의 풍경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백석 시인이 ‘교재’로써 활용되고 있는 이유는 그의 시에는 시각, 후각, 청각 등 모든 오감각이 곳곳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시는 그런 것에 해당된다. 그 자유로운 오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시인이 백석 시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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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