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제 늙었다.”

아비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이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 세월이 흘렀으니 늙는 것은 당연한 것. 늙을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아버지의 고향인 J읍을 떠났다. 아니, 탈출했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다시 J읍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이제 늙었다.’는 전화를 받은 한 달 뒤 아버지는 자신이 일하던 공장에서 나무에 엎드려진 채 숨졌다.

조경란의 <성냥의 시대>는 아비와 아들의 이야기이다.

“엄마가 그렇게 옥천에 가고 싶어 했는데 왜 못 갔을까.”

딸 두 명은 차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 그들은 옥천으로 가고 있다. 차들로 꽉 들어찬 강변북로에 접어들었고 길은 현충일 연휴를 맞아 숨 쉴 틈조차 없이 막힌다. 아흔 살이 넘은 어머니는 그러나 조용히 차 안에 누워 있다.

“그렇게 가고 싶어 했는데 이제야 가네. 엄마! 좋아요?”

딸들은 그렇게 엄마에게 묻지만 어머니는 대답이 없다. 조용히 눈을 감고 삼베옷을 입고 있을 뿐. 어머니는 죽어서 마침내 옥천에 가게 된 것이다. 그녀들이 타고 있는 차는 구급차이다. 서울 병원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구급차에 싣고 그들은 지금 어머니의 고향, 옥천으로 가고 있다.

김숨의 <옥천 가는 날>의 풍경이다.

금붕어는 새끼를 왜 잡아먹을까

<옥천 가는 날>은 즐거운 나들이가 아니다. 강변북로부터 막히는 고속도로는 경부선에 들어서고서도 천안까지 뚫리지 않는다. 지금 어머니는 수의를 입고 구급차 뒤에 조용히 누워 있다. 둘째와 셋째 딸인 정숙과 애숙이 구급차에 같이 타고 있다.

애숙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전 옷을 다 벗기고 병원에서 삼베옷으로 갈아입혔다. 40kg도 나가지 않는 어머니는 그러나 축 늘어진 몸을 가누지 못해 힘겨웠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혔을 때쯤 정숙이 나타났고 이들은 구급차를 타고 지금 예약된 장례식장이 있는 옥천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가보고 싶던 옥천을 이제야 가네.”

두 딸은 눈을 감고 누워있는 어머니를 곁에 두고 이런 말을 한다. 잠시 쉬어가기 위해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주변의 승용차 중 충북이라는 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를 두고 ‘저거 옥천 가는 차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옥천은 그들에게 고향으로의 회귀이자 어머니의 안식처인 셈. 지나가는 승용차 모두가 마치 옥천으로 가는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즐거운 나들이도 아니고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내 주는 의식을 그들은 지금 치르고 있는 중이다.

애숙은 어머니를 챙기느라 정작 자신은 양말도 신지 않은 채 구급차에 올랐다. 정숙이 그것을 확인하고 휴게소에서 양말을 사서 애숙에게 건넨다. 연두색 양말이다. 흰색도 아니고 검은색도 아닌 연두색. 소설 속에는 애숙과 정숙의 정확한 형편이 묘사되지는 않는다. 구급차 안에서 이뤄지는 두 자매의 이야기를 가만가만 들어보면 사는 형편이 짐작될 뿐.

애숙의 지갑 속에는 온갖 영수증과 신분증이 어지럽게 섞여 있고,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오셨을 때는 어머니를 ‘치매환자’로 속여 요양급료를 탄다. 살아가기 힘들 때는 큰 언니에게서 돈을 빌린다. 어떤 삶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0년을 서울에서 딸들과 함께 생활해 온 어머니는 서울생활이 즐거웠을까. 20년 동안 줄곧 당신이 살아온 그곳, 옥천만 생각하지 않았을까. 죽어서 회귀하는 그녀의 삶.

“옥천은 왜 옥천일까.”

두 딸은 구급차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눠 본다. 싱거운 이야기이다. ‘옥천은 왜 옥천일까.’라는 물음에 누워있는 어머니는 어떤 말을 해 줄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만 만약 이 물음에 어머니가 답을 한다면 이런 답이 나오지 않았을까.

“내가 살아온 곳이고, 너희들을 낳았으며, 남편을 떠나보냈고, 긴긴 밤 홀로 밤을 새웠으며, 내 인생의 모든 흔적이 묻혀 있는 곳. 이제 그곳에 내 몸뚱이도 묻히기 위해 간다.”

어머니는 당신이 죽으면 꼭 옥천에서 장례식을 치르도록 원했을 것이다. 죽음이 마침내 당신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리라. 소설 속 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금붕어가 새끼를 오십 마리 낳았는데 어느 날 자꾸 새끼가 줄어드는 거야. 어미가 새끼를 잡아먹는다고 하더라. 새끼를 격리시켜 줘야 하는데, 그렇게 못했더니 삼십 마리밖에 남지 않았어.”

성냥의 시대는 갔지만

조경란의 <성냥의 시대>는 아비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비는 젊었을 때부터 성냥공장에서 일을 한다. 인정받는 기술자이자 사장의 신임이 두터웠다. 성냥이 지극한 사랑을 받았을 때는 큰 트럭 10대 분량의 나무가 공장에 쌓여 있었다.

일꾼이 100명이 넘어도 일손이 모자랄 지경. 그러나 그것은 한 때였다. 성냥이 사랑받을 때 아비는 마찰면의 다른 면에 시구를 써넣어 특별한 성냥갑을 만들기도 했다. 아비가 만든 성냥은 특히 불어오는 바람에 강해 뱃사람들이 사랑했다고 한다. 아비는 황 비율을 섞는 핵심 파트에서, 사장 밖에 모르는 비밀도 아는 특별한 성냥공장 직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몇 명만이 남아 겨우 일을 하고 있어, 요즈음 시대에 성냥은 갈 곳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비는 쌓아 놓은 나무더미에 엎어져, 한 손에는 성냥을 쥔 채 조용히 숨이 멎어 있다.

아비의 죽음으로 다시 찾아온 J읍. 그러나 반갑고 그립고, 아름다운 기억은 거의 없다. 고작 생각나는 것은 자신이 아주 어렸을 때에 번잡한 공장의 한 공터에서 열심히 놀았던 기억밖에는.

J읍을 탈출한 나는 도시로 가 택배 일을 한다. 다시 돌아왔지만 아비의 진한 흔적만 찾을 뿐 달라진 것은 없다. 성냥의 시대는 갔지만 여전히 나에게 얹혀있는 삶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래서 아비의 죽음을 맞아 J읍에 발을 들였지만 나는 다시 탈출하고 싶다.

김숨의 <옥천 가는 길>과 조경란의 <성냥의 시대>는 어미와 아비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끝내 이어지고 있는 무거운 대물림도 느껴진다. 두 소설은 창작과 비평 가을 호에 실린 단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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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 좀비가 된다면?”

김중혁의 첫 장편소설 <좀비들>는 이렇게 묻고 있다. 글쎄? 이 물음에 우리는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소중한 사람인데 좀빈들 어떤가? 안아주고 싶다!”

“좀빈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도 좋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도대체 좀비가 존재나 한단 말인가?”

“말도 못하고 감정도 없고, 그런 존재를 우리가 받아들여?”

소설은 가끔씩 우리에게 현실적이지 않는 질문들을 던진다. 하지만 그것 또한 현실에 두 발을 버티고 있기 때문에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실적 질문’일 수밖에 없다. <좀비들>는 책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좀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좀비들>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 플러스적(+)인 삶과 마이너스적(-)인 죽음의 경계에서 수많은 죽음이 현실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또 하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한 물음도 던진다.

어릴 적, 어머니의 죽음(부엌에서 왼쪽으로 쓰러져 60초의 시간 동안 천천히 눈을 감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이후 소설속 화자 나(채지훈)는 형과 단 둘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형도 40대의 나이에 병원 침대위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채지훈은 홀로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어머니와 형의 상태가 1이나 2라면 좀비들은 -1이나 -2에 가까웠다. 둘은 비슷해 보였다.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차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살아 있다는 것과 죽어 있다는 것은 0을 기준으로 대칭될 뿐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닐까. 산 것은 플러스의 세계, 죽은 것은 마이너스의 세계이며 두 세계는 균형을 맞추며 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본문 187페이지)



지훈은 한 이동통신회사의 안테나 감식반에서 일을 하고 있다. 형의 죽음 이후 형이 남긴 유품을 정리한다. 형이 남긴 것은 1만2천여 장에 이르는 LP판이 전부이다. 그것도 1960년대 LP판. 그중 형이 가장 아꼈던 것으로 보이는 50장만 챙기고 나머지는 음악박물관에 기증해 버린다.


자신이 운전하는 회사의 밴이 잠자리이자 사무실이자 업무공간이다. 그러다 우연히 신호가 전혀 잡히지 않는 무통신지역인 ‘고리오마을’을 만나게 되고 여기서부터 채지훈은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경계의 마을’에 뛰어든다.

형이 남긴 음반 중 스톤플라워 음반에 대한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도서관에서 일하는 유쾌한 직원 ‘뚱보130’을 만난다. 이어 스폰플라워 자서전을 번역한 ‘고리오마을’의 홍혜정, 그의 딸 홍이안...그리고 ‘고리오마을’의 주민 케켈과 제로 등 소설 속 사람들이 서서히 등장한다.

케겔은 사체를 군부대에 파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 도박 빚에 허덕이다 죽은 사람...그렇고 그런 사람들의 사체를 군부대에 넘긴다. 돈을 받는다. 케겔은 “그런 사람들의 죽음이야 죽어서도 소용되는 데가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간단히 치부해 버린다. 군부대에서는 이 사체를 연구해 ‘좀비’로 만들고 이 ‘좀비’들은 군부대가 실험적으로 만들고 있는 ‘스마트 블릿(목표 타깃을 정확히 추적해 명중시키는 탄환)’을 만드는 ‘마루타’로 이용된다.

죽은 이들이 다시 ‘좀비’로 태어나 다시 죽어가는 비극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고리오마을’에 우연찮게 정착하게 된 채지훈은 이후 그런 ‘좀비’를 만나게 되고 군부대의 비밀스런 연구소, 그리고 ‘고리오마을’을 둘러싼 이상한 징후 등을 접한다.

<좀비들>는 분명 ‘좀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좀비들>는 누구에게나, 혹은 우리에게도 찾아올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던져준다. 내 주변 사람의 ‘죽음’은 마침내 하나하나씩 우리에게 마이너스(-) 기억을 던져주고 내가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는 ‘0’의 상태로 돌아가는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잊힐 뿐이라는 것.

김중혁은 작가의 말을 통해 “잊고 있던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고 밝혔다.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그 죽음을 쉽게 잊고 또 다른 죽음을 접한다. 죽음과 죽음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어찌 보면 ‘죽음을 잊고 사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나와 관계있든 없든 수많은 사람들이 지구촌에서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 잊고 있는 기억의 이야기를 작가는 말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그렇기에 <좀비들>에 등장하는 ‘좀비’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무서운 존재도 아니며, 드라큘라처럼 묻어 뜯고 살아 있는 자를 사냥하는 존재도 아니다.

다만 그들은 스톤플라워의 시끄러운 음악을 따라 움직일 뿐이며 ‘0’의 경계에서 마이너스(-) 세계로 빠져든 존재일 뿐이다. ‘좀비’에게 일격을 당해 ‘좀비’가 돼 버린 뚱보130을 구출하는 장면에서 김중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군부대는 좀비 연구소의 존재를 없애기 위해 불을 지르고 ‘좀비’들은 두 팔을 뻗고 불에 서서히 타들어가면서 영원히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 속에 ‘좀비’가 된 뚱보130도 포함돼 있다. 채지훈은 차를 몰고 스톤플라워의 음악을 튼다. ‘좀비’들은 음악에 반응하며 음악을 쫓아온다.

뚱보130은 유쾌한 인물로 묘사돼 있다. 잔뜩 살이 쪘지만 기억력은 비상하며 유머가 철철 넘치는 인물이다. ‘좀비’가 된 뚱보 130이 채지훈에게 “형, 좀비가 되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 팔을 들고 있는 게 좀 힘들긴 하지만.”이라고 외치는 듯한 생각에 빠져든다.

지훈은 차를 몰고 음악을 크게 틀면서 뚱보130을 불구덩이에서 구해낸다. 두 팔을 들고 ‘우웨엑엑’ 소리치며 따라오는 뚱보130에게 말한다.

“야 130. 잘 따라오고 있는 거지?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채지훈에게 삶과 죽음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다만 그것은 ‘0’을 사이에 두고 플러스 1과 마이너스1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소설의 끝머리에 이르면 다시 한 번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 좀비가 된다면?”

제목을 <좀비>가 아니라 <좀비들>이라고 한 것도 아마 ‘잊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밝힌 작가의 의중이 반영된 이유때문일 것이다.

소설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성석제의 말을 빌리자면 ‘선원형’과 ‘농부형’이 그것이다. 선원형은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경험,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 등을 그려내는 소설가를 말한다.

‘농부형’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고 기억 속 차곡차곡 쟁여 놓았던 것을 끄집어내는 소설가들이다.

김중혁의 <좀비들>는 어떤 류의 소설일까.

처음과 끝은 술술 읽는 재미가 있지만 소설 중간은 다소 막막해 보였다. 홍혜정과 홍이안, 엄마와 딸의 관계 설정에서는 뭔가 튀고, 케겔과 제로의 등장 그리고 이들의 인물 묘사 또한 다소 막연했다. ‘고리오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군부대와 고리오마을 주민들의 관계 설정도 설득력이 떨어졌다.

개인적 취향이 ‘선원형’보다는 ‘농부형’ 소설을 좋아하는 내 성격 탓일 것이다.

[김중혁]

▲1971년 경북 김천 출생

▲계명대 국문학과 졸업

▲2000년 《문학과 사회》에 단편소설〈펭귄뉴스〉로 등단

▲2008년 제2회「김유정문학상」을 수상

http://vonnegut.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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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