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 사람을 만난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세상이 복잡하다. 서로의 생각이 소통되기에 한계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

이른바 '토크 콘서트'가 인기를 끌고 있다. 예전과 비교해 정보는 넘친다. 서로 교류하는 사례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소통에 어려움을 느낀다. 이 시대, 동시대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소통하고 있을까.

김제동의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다"

한국사에서 가장 극복하기 힘든 게 있다면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일 것이다. 이것은 책이나 이념으로 경험한 게 아니다. 직접 행동으로 체득했기에 한 쪽 편에 선 사람들은 다른 쪽 편을 이해하는 것을 강하게 거부한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에 이르기까지 장편 역사 소설을 쓴 조정래 선생의 말은 그래서 울림이 크다.

"내가 문학을 통해 가장 강력하게 하고 싶었던 말은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 그걸 인정하고 시작하자는 것이지요."

그랬다. 반공이 남한이념의 기조였을 때 이른바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뿔이 달렸고 엉덩이는 빨갛고, 사람의 형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조정래 선생은 자신의 역사 소설을 통해 딱 한 가지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용택 시인도 한반도의 이념 대립에 진저리를 쳤다.

김 시인은 인터뷰를 통해 "낡아빠진 틀을 가지고 싸움질 하고 이념이니, 좌우니 이러고 있는 모습이 넌더리가 난다."며 "아직도 획일화된 이분법적 가치판단을 요구하고 우리 편 아니면 완전히 말살하겠다는 것,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고 지적했다.

아마도 남한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던 날, 한반도의 많은 사람들이 '북한 사람도 사람이구나'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그런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반도에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고 있다. 6·25를 경험한 세대들에게는 아직도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갈등의 골이 깊은 것이 사실이다.

"용이 아니라 송사리 같은 존재도 필요하다"

프랑스 사회학자들이 교육을 통해 계층 간 이동이 가능할 것인지를 두고 연구를 한 적이 있다. 결론은 교육을 통해 계층 간 이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즉 변호사의 아들은 변호사가 되고, 노동자의 아들은 노동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개천에서 용나다'는 말은 전설이 돼 버렸다. 이런 사회를 두고 동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젠 서울시장이 됐지만 희망제작소를 운영해 왔던 박원순 변호사는 김제동과 인터뷰를 통해 "개천에서 용 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송사리로 남아 개천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라고 되묻는다.

용도 필요할 것이다. 어차피 민주주의에서는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을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용의 존재도 필요하다. 그러나 모두 용이 되려고 한다면? 세상은 뜻하지 않는 불협화음에 처하지 않을까.

아름다운재단과 희망제작소를 통해 박원순 변호사는 '공동체 시스템'을 강조했다. 송사리로 남아 곁에 있는 다른 송사리와 함께 자신의 지역에서, 혹은 소공동체를 통해 아름다운 자신의 터전을 가꾸는 일! 그것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과학자 정재승 교수도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정 교수는 "(과학은)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것에 대해 기여하는 학문"이라며 "과학이 권력과 돈에 종속돼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질주하는 과학을 멈출 수는 없으니까 질주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뒤 "권력과 돈에 종속되지 않고 과학이 인간적 가치를 높이는 학문으로 발전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내가 있는 이곳이 아름답다"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는 정치인과 작가는 물론, 연예인과 일반인까지 그 인터뷰 대상이 넓다.

그 중 눈길을 끄는 인터뷰 대상자 중에 연예인 고현정과 제주 해녀 고미자, 그리고 산악인 엄홍길 씨 등이다.

고현정은 보이는 것과 달리 소탈하고 푼수기에, 직설적인 말투의 인물로 그려져 관심을 모았다.

고현정은 인터뷰를 통해 "연예인은 무대에 선 광대고 객석에 앉은 대중은 귀족이지. 우린 돈과 시간을 투자한 관객들을 어루만지고 즐거움을 줘서 보내야 하는 거야."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산악인 엄홍길은 최근 안나푸르나를 등반하다 사고를 당한 박영석 대장을 생각나게 한다. 엄 대장도 첫 등반에서 자신의 동료를 잃은 경험이 있다. 엄 대장은 "절벽을 한참 내려오는데 바위틈에 신발도 벗겨져 있고… 흔적은 많은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비참하고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엄 산악인은 "거대한 산 앞에 서고야 대자연 앞에 인간은 정말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제주해녀 고미자 씨의 인터뷰는 솔직담백하다. 수십 년 동안 '물질'을 해 온 그녀에게는 생활에서 느껴지는 진솔함이 묻어있다.

고미자 씨는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과 관련해 "평생 일해 왔는데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일도 못할 테고 바다도 오염될 테고 저 바다 좀 봐요. 얼마나 예뻐요. 제발 어머니 같은 바다를 그대로 둘 순 없나요?"라고 말한다.

그녀가 가리키는 그곳에는 '어머니 같은' 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었다.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들을 통해 시대정신을 느끼게 해 준다.

장르: 시/에세이/기행
저자: 김제동
출판사: 위즈덤경향
가격: 9천100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우리는 왜 글을 읽고 쓰는 것일까. 소리와 문자는 태고 적부터 있었던 일이라 너무 당연한 질문이자 우문일 수도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소리를 지르고 글을 읽고 쓰게 마련인데. 그런데도 우리는 좋은 글을 읽으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감동을 얻고 행복을 느낀다. 짜릿한 쾌감을 갖는다. 아마도 인간이 만들어낸 글 속에서 또 다른 ‘나’를 찾는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조정래 선생님의 <황홀한 글감옥>은 우리에게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 글을 읽고 쓰는데 있어 어떤 점들이 고려돼야 하는가 등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던져주고 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으로 이어지는 대하소설을 완간한 선생인 만큼 그의 경험에서 샘솟는 외침이 감동적이고 직접적이다.

<황홀한 글감옥>은 독자들이 질문한 내용에 조정래 선생이 일일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꾸며졌다. 아주 쉽게 읽힌다. 어떤 사실을 이야기할 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설득력 있는 방법도 없다. 손수 경험해 봤기 때문에 눈으로 보이듯 독자들은 ‘글쓰기의 매력’과 ‘글 읽기의 감동’으로 빠져들게 한다.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며, 그 시대의 산소다

조정래 선생이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작가에 대한 정의이다. 작가는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 문자를 통해 시대를 읽고, 그리고, 표현하는 ‘인류의 스승’이라는 지적이다. 그 기록은 수천 년, 수 만년이 지나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위대한 유산’으로 남는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모든 ‘문자 기록’들이 그러할까. 그렇지 않다. 작가가 인류의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 인식과 그 시대의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로 기록해 내는 기본적 바탕이 깔려 있어야 한다. 조정래 선생이 강조하는 글쓰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작가를 정의함에 있어 조정래 선생이 지적한 ‘작가는 그 시대의 산소다.’라는 부분이 가슴 속으로 잔잔하게 다가온다. 산소란 무엇인가. 우리가 숨 쉬는데,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이, 소중하다는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가지만 ‘산소’가 없다면 곧바로 죽을 수밖에 없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작가는 이 시대의 사회상과 잘못된 부분 등을 정확히 짚어주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독자들에게 ‘산소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는 강조점이기도 하다. ‘인류의 스승’이라는 정의보다 ‘산소 같은 존재’라는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조정래 선생은 미국 작가 스티븐 킹이 말한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정말 뭐든지 써도 좋다. 단,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라는 부분을 인용한다. 스티븐 킹의 재인용에서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에 방점이 놓여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정래 선생은 이같이 말하면서 “작가는 진실 지킴이로서 산소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 길이 작가의 길이며, 따라서 작가가 된다는 것은 이 시대 그 무엇보다 영광스러운 일이며, 그 영광을 위해 부단히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하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수천 명의 인물 창조, ‘뚫어지게’ 쳐다본 자연의 모방에 있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읽어 본 독자들이라면 자연스럽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숫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조정래 선생은 약 1천200여명의 인물을 창조해 냈다. 이 인물들은 모두 이름이 다르다. 작가가 직접 이름까지 지어낸 독창적 캐릭터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조정래 선생은 프랑스 3대 작가로 꼽히는 플로베르의 말을 인용한다. 플로베르는 “나는 파리의 등적부에 적힌 숫자만큼 내 인물을 창조해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조정래 선생은 플로베르의 인간 관찰에 대한 유심함을 설명했다.

“나는 파리 시내의 모든 사람이 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뚫어지게 관찰한다.”

이 말은 플로베르와 조정래 선생 둘 다에 들어맞는 말이다. 조정래 선생은 항시 주변 인물 에 대한 깊은 생각과 관찰을 통해, 한 인물에 대해 뚫어지게 쳐다보고 사고하는 습관을 통해 인물을 받아들이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조정래 선생은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기 때문에 자연을 뚫어지게 관찰하고 유심하게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자연 속에 살아가는 여러 인물들을 ‘뚫어지게, 유심하게’ 쳐다보면 자연스럽게 독특한 인물들이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수많은 인물들이 실존하지는 않지만 마치 내 곁의 이웃, 내 곁은 친구, 내 곁의 부모같이 다가오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태백산맥> 소년 전사 조원제 탄생의 비밀도 감동적

<태백산맥>을 쓰고 있을 때 가장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가 빨치산 경험이 있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노라고 조정래 선생은 고백했다. 서슬 퍼렇던 1980년대의 일이니, 누가 당당히 나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겠는가. 빨치산의 가담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가뜩이나 정기적으로 경찰의 방문을 받고 있을 시기에.

그때 만난 사람이 정치경제학자인 박현채 선생님이었다고 회고했다.

박현채 선생은 빨치산부대에서 문화부장까지 지낸 산증인이었다. 무엇보다 박현채 선생은 조정래 작가와 지리산을 직접 찾아가면서 일일이 당시의 경험과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면서 <태백산맥>에 살아 숨 쉬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조정래 선생이 박현채 선생에게 이렇게 묻는다.

조정래 선생: “선생님, 선생님이 겪으신 일을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에 등장시키면 어떨까요?”

박현채 선생: “그려? 그것도 괜찮허겄제.”

조정래 선생: “그런데, 선생님 이름을 그대로 써도 괜찮을까요?”

박현채 선생: “내 이름을......? 나야 영광이제만. 그거 긁어 부시럼 될지도 몰르는디? 글안해도 주목허고 있다는 소문잉께 니 조심혀야 써.”

조정래 선생: “예. 그러면 새 이름을 짓지요.”

그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 조원제이다. 조원제는 이름만 다를 뿐 빨치산 박현채 선생의 부활이었다. 조정래 선생은 <황홀한 글감옥>에서 박현채 선생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직접 지리산을 동행하는데 언제나 앞장섰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조정래 선생은 <태백산맥>의 한 가운데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황홀한 글감옥>의 부제는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로 돼 있다.

감옥에서 황홀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무한히 할 수 있는 공간에 갇혀 있다는 의미. 갇혀 있을 뿐, 갇혀 있는 자신은 오히려 행복한 상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곳은 감옥일 리 없다. 오히려 모든 귀찮은 존재와 괴롭히는 것으로부터의 도피처일지도 모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일요일은 산북작은도서관을 찾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어제는 늦은 시간, 문을 닫기 30분 전인 오후 6시30분에 도착했다. 지난주 빌린 책을 반납하고, 각 장르별로 나눠져 있는 책장을 훑으며 이번주의 일독할 양식을 찾았다.

특별히 선택하는 방법은 없다.

책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그 다음 작가의 이름이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그렇게 책 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살피고 손이 가는 책은 책장을 넘겨 '작가의 말'과 '목차'를 살핀다. 그리고 마음 속에 차곡차곡 말들이 쌓일 때 살짝 첫 장을 열어 내용을 읽어 본다.

그렇게 이번 주에 나에게 일독할 양식이 된 책은 세권이었다.

소설로는 정미경 작가의 <아프리카의 별>, 시로는 이승하 시인의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혜초의 길>, 그리고 누구나 존경해 마지 않는 조정래 선생이 그동안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솔직 담백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황홀한 글감옥>이었다.

정미경 작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지난 2006년 이상문학상을 받은 <밤이여, 나뉘어라>가 기억 속으로 치고 들어왔다.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이라 내용이 가물가물했다. 집에 돌아와 책을 보니 천재에 대한 이야기였다. 북반구, 밤과 낮이 구분되지 않는, 그곳에서 우연히 나와 경쟁을 했던 천재, P를 만나고...사랑과 욕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던 소설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승하 시인은 나에게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제목에서 '혜초의 길'이란 말이 다가왔다. 오래 전 그의 길을 시인은 따라가면서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이라고 해석했다. 그의 시에서 혜초의 길을 따라가는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정래 선생님은 말해 무엇하랴.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이란 책은 한국 현대소설사에서 연작물로서는 빼어난 작품이지 않은가. 최근 조정래 선생의 <인간연습> <오, 하느님> <허수아비춤>을 읽었다. <허수아비춤>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서평을 쓴 적도 있다. 

조정래 선생이 어떤 느낌으로, 그의 글쓰기를 '황홀한 글감옥'이라고 표현했는지 가슴이 뛰었다. 조정래 선생의 목소리를 글을 통해 직접 듣는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감이 밀려왔다. 

이번주도 '일독할 양식'으로 월요일은 시작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서울 강남. 이곳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 물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강남은 자신을 버리는 곳이다. 실제의 ‘나’는 사라지고 나를 자처하는 ‘아바타’만 살아 움직인다. 그 ‘아바타’를 ‘허수아비’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강남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기업이 수십 층의 높이의 건물로 우뚝 서 있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사라진다. 다만 그 회사가 추구하는, 그 회사가 원하는 ‘아바타’가 돼 움직일 뿐이다. 이메일도 자유롭게 보내고 받지 못하며 특정 인터넷 사이트에 대해서는 차단된다. 회사의 주인이 아니라 회사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회사의 중심축을 이루는 부품 또한 최고의 부품들이다. 판사를 지낸, 검사를 지낸, 교수를 지낸, 기자를 지낸 우리 사회에서 ‘국민을 생각하고 국민 편에 서서 일하겠다고 스스로 선서한’ 나름대로 인기 있고 촉망받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불려 들어간다. 불려 들어가는 것을 영광으로 안다. 모두 기꺼이 ‘자신’을 버릴 자세가 돼 있다.

‘자신’을 버리고 ‘아바타’로 살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려는 이유, 그리고 그 이끌림의 배경은 무엇일까.

강남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유기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알고 있는 한 사람도 강남에서 ‘자신 그 자체’는 없다. 그가 강남에 사는 이유는 단 하나. ‘아이들’ 때문.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고학력자인 그는 ‘아이의 아바타’가 돼 움직인다. 하루에 몇 군데 학원에 아이들을 직접 실어 나르는 운전하는 ‘아바타’가 되고 수시로 달라지는 교육정책을 대신 공부해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정보의 아바타’로 변신한다. 그곳에서 그는 사라지고 ‘아이들을 위한 아바타’만 존재할 뿐이다.

이 강남이 있기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어떤 변화를 겪어 왔을까.

황석영의 <강남몽>은 해방이후부터 지금까지 강남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그 역사를 토대로 한 편의 이야기를 엮었다. 이야기의 중심 테마는 부동산이다. 서울의 땅이 몇 만원에서 몇 천만원까지 왜 변해 왔으며 그중에서도 강남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살피고 있다.


10대의 젊은 나이에 화류계에 뛰어들어 성공의 성공을 거듭하는 박선녀. 화류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조직폭력배. <강남몽>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강남이 부동산 측면에서 거친 역사적 수레바퀴를 탄다.

상품백화점이 붕괴되고 그 붕괴의 현장에 박선녀 자신이 파묻히게 된다는 소설속 설정은 의미하는 바가 작지 않다. 한평생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일궈온 부동산이 단 한 번에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설정은 ‘강남’의 현재성을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몽>은 이런 박선녀의 성장을 통해 강남 부동산의 이면과 그 실체를 파헤치고 있다. 소설 중간쯤부터 <강남몽>은 조직 폭력배의 역사에 주목한다. 전국 조직폭력배가 어떻게 서울에 입성했으며 그 계보는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를 들춘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역사적 접근과 긴 나열로 소설의 주목도가 떨어진다.

월간시사잡지 <신동아>가 <강남몽>의 조직폭력배 묘사 부분이 자신들의 기사를 표절했다고 일침을 가하면서 이 문제는 또 다른 논란으로 이어졌다. 황석영 작가가 “인용 부분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부분은 유감”이라고 밝혀 해당 기사를 참조했음을 시인했다.

<강남몽>이 강남의 역사를 부동산과 조직 폭력배 차원에서 접근했다면 조정래 작가의 <허수아비춤>은 자본에 주목한다. <허수아비춤>의 주제는 명확하다. 책 본문에 나와 있는 한 부분이 이 책의 주제이다. 2천 년 전 사마천이 돈에 대해 언급한 말을 조정래 작가는 그대로 인용한다.

자기보다 열 배 부자면 그를 헐뜯는다.

자기보다 백 배 부자면 그를 두려워한다.

자기보다 천 배 부자면 그에게 고용 당한다.

자기보다 만 배 부자면 그의 노예가 된다.

'일광그룹'의 '문화개척센터'라는 명함을 들고 다니는 윤성훈과 박재우, 강기준이 <허수아비춤>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일광그룹의 ‘개’가 돼 모든 더럽고,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없애는 비밀특공대 역할이다. 자본주의가 만든 ‘아바타’였다.

그들의 임무는 제품의 생산과 품질 개발이라는 자본주의 본연의 임무에 있지 않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돈 놓고 돈 먹기’. 각종 로비는 물론 비자금을 조성하고 정계, 학계, 언론계를 장악하는 것이 업무이다.

‘일광그룹’이 지금 우리나라 현실에서 어느 기업을 지칭하는지는 읽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간다. 이들 3인방은 일광그룹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회장의 ‘아바타’로 활약하며 일광그룹의 가장 핵심 부품으로 자리 잡는다.

국세청 직원을 만나고, 검사를 접대하고...그렇게 그들은 판사든, 검사든, 교사든, 기자든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스카우트한다. 이들 ‘3인방’에 의해 스카우트 당하는 사람들은 ‘마이 플레저(My Pleasure)'를 외치며 두 손들어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세상을 다 가진 듯 받아들인다.

‘국민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선서하던 판사와 검사.

‘학문을 통해 이 세상 사람들이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를 외쳤던 교사.

‘펜은 칼보다 강합니다. 이 펜으로 정론직필하겠습니다.’던 기자.

‘자본’과 ‘돈’ 앞에서 이들의 초심(初心)은 찢어진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천문학적인 액수를 안겨주면 판사와 검사·기자 출신 ‘아바타’들은 윤성훈과 박재우·강기준보다 더 추악하게 변한다. 일광그룹의 ‘개’가 돼 걸림돌이 되는 모든 요소를 물어뜯고 제거하는 역할에 사력을 다 바친다.

황석영의 <강남몽>과 조정래의 <허수아비춤>은 201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당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부동산, 조폭, 자본을 통해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괴상하고 비뚤어진 얼굴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자 하는 목적은 또렷해 보인다.

그러나 읽는 내내 조정래 작가에게서는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에서 느꼈던 생생한 인물 이미지, 당대의 모습이 눈으로 그려지는 세심한 묘사 등을 느낄 수 없었다. 지나친 말과 말들이 뒤섞여 조정래 작가 특유의 맛을 안타깝게도 볼 수 없었다.

<강남몽>도 마찬가지. 앞서 언급했듯이 지나친 조직폭력배의 역사적 계보 등이 군더더기로 다가왔다. 소설인지, 신문기사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개밥바라기별>에서 시원스럽게 뻗어가던 황석영 문체는 <강남몽>에서 멈춘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소설은 자본주의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조정래 작가를 비롯한 문인들이 2010년 12월20일 삼성전자에서 발생한 백혈병 문제를 두고 시국선언을 한 적이 있다. 삼성전자 공장에서 근무한 직원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백혈병에 걸려 죽거나 지금도 투병중인 상황이다.

그 자리에서 박노해 시인은 ‘삼성블루’라는 시를 발표했다. 이 시가 의미하는 것, 그리고 <허수아비춤>과 <강남몽>의 주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자본주의의 많은 문제는 진행중이다.

삼성 블루-박노해

오늘은 역사적인 날

글로벌 삼성 회장님이

대한민국 사법부를 접수한 날

법과 정의와 민주주의를 돈으로 사버린 날

자본권력의 힘을 온 세계에 보여준 날

이제 대한민국은 삼성 공화국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회장님으로부터 나온다

이제 삼성 로고 앞에서는

가슴에 손을 얹고 바라보라

국기에 대한 의례처럼

글로벌 삼성에 대해 경례하라

차갑고 푸르게 일그러진 원

그 안에 하얗게 들어박힌

삼성 앞에서는

하얘져

새하얘져

검은 뇌물도

검은 범죄도

법도 언론도 국가도

하얘져

쌔하얘져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글로벌 삼성 앞에서는

휴대폰도 컴퓨터도 TV도

얇아져 더 얇아져

진실도 정의도 인간성도

그들은 유령처럼 드나들어

법원도 검찰도 청와대도

언론사도 정당도 대학도

마음대로 들어가 바꿔버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버려

삼성전자의 처녀들은 하얀 우주복을 입고

독한 납용액과 1급 발암물질 벤젠과

날카로운 전자파와 방사선을

복숭아빛 발그란 몸으로 빨아들여

모든 것이 하얘져

핏속까지 하얘져

붉은 피톨도 푸른 눈물도

우리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황유미처럼 박지연처럼

하얘져

새하얘져

저 차가운 삼성 블루

일그러진 돈의 원 안에 들어가면

생명도 양심도 영혼도

우리들 살아 있는 미래도

하얘져쌔

하얘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