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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0.31 정약전과 천주교 박해 사건…김훈 <흑산>

경기도 마재(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의 정 씨 가문에는 네 형제가 있었다.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가까운 곳이었다. 첫째 정약현의 딸, 명련은 황사영을 남편으로 맞는다.

네 명의 정 씨와 한 명의 황 씨는 조선 후기, 소용돌이 역사의 주인공들이었다. 이들은 천주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약종과 황사영은 죽음으로 맞서면서 끝까지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순교하고자 스스로 결심한 셋째 정약종으로 인해 목숨을 건졌다.

김훈의 <흑산>은 정 씨 가문과 황 씨의 이야기이다.

마재 정 씨 가문의 네 형제를 역사적으로 이야기할 때 가장 앞서는 사람은 언제나 막내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은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책으로 엮어낸 대학자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들 네 명의 정 씨 가문에 대한 책을 낼 때는 언제나 '정약용과 누구누구'를 사용했다. 역사적 비중이 정약용에게 집중돼 있기 때문이었다. 이덕일 교수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김훈의 <흑산>은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과 황사영에 포커스를 맞췄다. <흑산>은 정약전이 유배 간 '검은 섬'이다. 그곳에서 물고기의 생태를 관찰한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탄생한다.

아우구스티노에서 알렉시오에 이르는 죽음

김훈의 <흑산>은 아우구스티노의 죽음에서 시작해서 알렉시오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소설이다. 소설의 시작점은 이렇다.

"정약종, 너의 사호는 무엇이냐."

"아우구스티노다. 사호가 아니라 세례명이다."

정씨 가문의 셋째 정약종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둘째 정약전과 막내 정약용과 달리 정약종은 '골수' 천주교인이었다. 역사학자 이덕일 교수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서 장약종의 체포과정을 보면 스스로 천주교인임을 인정하고 자랑스러워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종은 2월11일 체포되었다. 자신을 잡으러 가던 금부도사를 길에서 지나쳤으나 자신을 잡으러 가는 길이냐고 묻고는 스스로 체포된 것이다."

정약종은 천주교로 인한 죽음을 받아들였고 순교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정약종의 죽음으로 시작된 <흑산>의 마지막은 황사영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제천 베론 토굴에 숨어있던 황사영은 조여 오는 체포 망에 걸려든다. 포졸과 군관들이 토굴을 덮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야! 알렉시오. 너 황사영이지?"

알렉시오는 황사영의 세례명. 황사영은 체포됐고 능지처참을 당한다. 정약종과 황사영의 죽음이 <흑산>의 시작과 끝이라면 그 중간의 이야기는 살아남은 정약전과 당시 천주교를 비밀스럽게 믿고 따르던 민초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끝없이 등장하는 민초들, 이미지에 묶여 입체적 서사는 실패

소설 <흑산>은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를 둘러싼 사건들을 그리고 있다. 정약전과 황사영이 중심에 놓여 있지만 당시 민초들이 많이 등장한다.

정주에서 말을 끌고 있는 마부 마노리, 궁궐에서 쫓겨난 늙은 궁녀 길가녀, 마포나루에서 들고나는 배꾼들에게 술을 파는 강사녀, 정 씨 가문의 노비로 있다가 면천된 김개동과 육손이…이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민초들이 당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가슴 속에 아로새겼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김훈은 소설 속에서 "주여, 주여 하고 부를 때 노비들은 부를 수 있는 제 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웠다."라고 묘사했다.

정조 서거이후 조선후기 사회는 정순왕후의 시대였으며 외척의 시대였다. 사도세자와 정조에 적극 반대했던 노론 벽파가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남인들은 처절하게 숙청당했다. 남인들을 숙청하기 위해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끌어들인 것이다.

김훈의 <흑산>에 등장하는 민초들과 정약전, 그리고 황사영의 이야기 구조는 아쉽게도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내면의 이야기에 주목하다 보니 인물 개별적인 묘사는 뛰어나지만 장편을 이끄는 입체적 이야기 구조는 부족하다.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로 발전하지 못했다.

장편과 단편의 차이는 무엇일까. 단편은 등장인물이 적는 반면 장편은 등장인물이 많다. 단편은 한 인물의 내면에 주목하는 반면, 장편은 다양한 사건 속에서 여러 인물들의 역할과 입체적 서사구조를 가진다.

김훈의 <흑산>은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단편 소설적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다. 각 인물들이 서로 엮이고 설키면서 갈등과 화해, 거대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다보니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동떨어져 여러 이미지로만 남아 버렸다. 소설을 읽어 나가는데 이어지는 느낌 보다는 서로 단절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 , 이제 여기에 사는 사람들

소설은 정약전이 '흑산(黑山)'을 '자산(玆山)'으로 바꾸어 부르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유일하게 흑산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창대에게 정약전은 이렇게 말한다.

"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黑은 너무 캄캄하다. 玆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정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되면서 절대 다시는 육지로 나가지 못할 것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살아있는 몸과 무한히 많은 시간 뿐. 흑산에서 정약전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닷가를 거닐고, 물고기와 날아다니는 새를 쳐다보는 일. 그곳에서 <자산어보>가 시작됐다. 한 인간의 숙명이었다.

김훈의 <흑산>은 조선후기 천주교를 둘러싼 민중들의 믿음과 갖은 고초를 겪으며 배교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소설에 등장하는 민초들이 입체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이미지에 머물러 버렸다. 그런 요소들이 장편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한계점으로 노출된다.

<흑산>에 나오는 정약전의 말 처럼 '또 지금, 이제, 여기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다 구체적이고 서로 연결되는 점을 찾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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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