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된 역사는 승자의 역사일 수 있다. 수많은 민중을 죽인 사람이 아직도 버젓이 공권력의 보호아래 한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기록된 역사’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아니, 기록된 문자의 역사가 어쩌면 허구일 수도 있다는 곳까지 생각이 미친다.

 

김별아의 <채홍>은 왜곡됐을 수도 있는 ‘기록된 역사’에서 벗어나 ‘기억되는 사랑’의 편에 서서 소설을 썼다. <채홍>의 소재는 세종의 아들 향(이후 문종이 되는)의 비(아내)인 ‘봉빈’이다. ‘난’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그녀가 두 번째 향의 아내가 돼 궁궐로 들어가면서 빚어지는 ‘기억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아닌 왕과 여자의 기억

 

 

순빈 봉 씨(봉빈)는 쾌활한 여자였다. 인자한 아버지와 동생을 아끼는 오빠 들 속에서 자란 귀염을 독차지한 막내딸이었다. 그런 그녀가 전국에 금혼령을 내린 상황에서 세자(문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낙점된다.

 

세자의 첫 번째 부인 김 씨는 세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주술(신발을 잘라 보관하거나 교미하는 뱀의 정액을 구하는 등)을 하는 것이 발각돼 폐비돼 사가로 쫓겨나고 만다. 김 씨는 얼굴도 시쳇말로 못생겼다. 그래서일까 이번 두 번째 부인을 간택하는데 있어 세자의 아버지인 세종은 “아름다움도 선택의 주요가치로 두라.”는 하명을 한다.

 

그렇게 뽑힌 봉빈은 아름다웠다. 붉은 봉숭아 빛 얼굴과 금방이라도 녹아들듯 부드러운 입술 등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었고 궁궐의 수많은 궁녀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 모양새와 몸매가 궁녀들 보다 한참이나 나았다.

 

가례를 올린 첫날 밤, 남자와 여자의 상식적인 첫날밤을 기대했던 봉빈에게 세자는 남자가 아니었다. 세자는 신방에 들어가기 전 “아름답고 미색을 갖춘 여인이로다. 심하게 아름다운 사람은 반드시 심한 악을 갖고 있다지 않던가!”는 고사를 먼저 떠올린다.

 

마침내 신방으로 들어선 세자. <채홍>에는 이렇게 묘사돼 있다.

 

“첫날밤은 끔찍했다. 봉빈은 난생처음 인간으로서, 한 여자로서 지독한 수치심을 맛보았다. 보름으로부터 사흘이 지나 하늘에는 얼마간 이지러졌으나마 달이 휘영청 밝은데, 오늘 혼례를 치른 신혼부부의 방은 일찍부터 어둡고 괴괴했다. 신랑인 세자가 동뢰연에서 마신 몇 잔, 아니 몇 모금의 술을 핑계 삼아 드러눕더니 이내 쌕쌕 콧소리를 내며 잠들어버린 것이었다.”

 

남자와 여자를 기대했던 봉빈과 달리, 세자는 왕과 여자로 봉빈을 대했던 것. 세자는 ‘기록될 역사’를 생각했기에 왕으로서 조심과 절도, 자제와 후덕을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세자와 첫날밤을 보낸 봉빈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보이는 공간과 보이지 않는 공간의 기억

 

세자와 봉빈은 남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심각한 갈등에 휩싸인다. 손끝 하나 뻗어오지 않는 세자, 세자를 향해 끝없이 뻗어가고자 하는 봉빈.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이들의 관계는 첫날밤부터 삐걱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보이는 곳에서 이들은 ‘아름다운 부부’의 전형이었다. 첫날밤을 치르고 양전(세종과 중전)에 문안인사를 갈 때, 세자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격식과 예법에 따라 문안인사를 한다. 세종은 그런 세자 부부에게 이런 말까지 한다.

 

“양궁이 이리 함께 하니 의좋은 원앙오리를 보는 듯 흡족하구나. 간밤에 좋은 꿈은 꾸었느냐?”

 

보이는 곳에서 세자는 훌륭한 왕재요, 격식과 예법의 달인이요, 준수한 생김새의 소유자요, 학식과 인품의 절정이요...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단 둘만이 있는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들어서면 세자는 봉빈에게 있어 ‘한 가지도 이해되지 않는 졸렬한 남자’로 다가온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기억을 <채홍>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첫날밤에 이어 봉빈은 다시 당황했다. 기가 막혔고 이내 화가 치밀었다. 왜 혼인해 맞아들인 아내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는지, 의례를 행할 때는 정중하고 극진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가 어찌하여 단둘의 자리에서는 돌변하는지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었기에 당황스럽고 기막히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외롭고 쓸쓸한 한 여자의 기억

 

세자의 비인 순빈 이기 이전에 외롭고 쓸쓸한 한 여자는 이제 비가 오면 쓸쓸하고, 눈이 와도 쓸쓸하고, 날이 맑아도 쓸쓸하고, 술을 마셔도 쓸쓸하다. <채홍>의 한 장면을 인용해 보자.

“너무 외로워서였을 것이다. 너무 춥고 쓸쓸해서였을 것이다. 아니, 그만큼 뜨겁고 진실한 관계를 갈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실 그 아이가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되었다.”

 

마침내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고 봉빈의 최후를 맞게 하는 한 여인이 등장한다. 동궁의 나인이었던 ‘소쌍’이다. 소쌍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다. 찾아오는 남자 막지 않고, 떠나는 남자 잡지 않는 자유로운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무엇보다 소쌍은 어릴 적 계집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말수가 적었던 소쌍은 이러쿵저러쿵 재잘재잘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계집애들의 말을 모두 받아주었고, 허투루 내뱉지 않았다. 그래서 가슴에 비밀이나 누군가에게 위로를 찾고자 하는 계집애들은 모두 손에 떡을 들고, 혹은 먹을 것을 잔뜩 훔켜쥐고 소쌍을 찾았다.

 

외롭고 쓸쓸했던 봉빈에게 소쌍의 그런 이미지가 가슴에 꽂힌 것이다. 그저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면 스펀지처럼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이. 봉빈에게는 그런 존재가 필요했다.

엄격한 유교의 나라 조선에 태어난 봉빈에게 소쌍을 알게 된 것부터가 비극은 시작되고 있었다. 봉빈을 알기 전 소쌍은 ‘단지’라는 이름의 나인과 동성애 관계였다. 소쌍과 봉빈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단지는 충격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세자의 후궁 권승휘에게 봉빈과 소쌍의 관계를 고변하게 된다.

 

사태는 커져갔다. 이른바 ‘대식(對食, 여자와 여자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처럼 행하는 것) 사건’은 마침내 공론화되고 봉빈은 ‘순빈’에서 다시 ‘난’이라는 이름의 한 여자로 폐서인 돼 궁궐에서 퇴출된다.

 

김별아는 작가의 말에서 “소설의 제목이 채홍인 까닭은 무지개가 태양의 반대편에 뜨는 이치에서 비롯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다양한 색을 가진 무지개는 성적 소수자의 국제적 상징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봉빈, 아니 ‘난’이라는 이름의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역사는 사랑을 기록하지 않지요. 아니, 애초에 못하지요. 그래서 사랑은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는 것입니다.”

 

기록된 역사가 아닌 기억된 사랑의 공간으로, 이제까지 배우고 알았던 ‘조선조 세종 때의 봉빈 사건’이 아닌 ‘난’이라는 이름의 한 여자의 기억된 사랑을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채홍>은 색다른 기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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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비가 억수로 왔다. 서울은 곳곳이 진흙탕으로 변해 버렸고 소중한 생명이 졸지에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누구하나 책임을 지려는 정치인과 관리들은 볼 수가 없다. 서울시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100년 만에 온 큰 비”라는 곳으로 책임을 돌려버린다. 하늘 탓이라는 게다.

매년 되풀이되는 이 쳇바퀴를 두고 어찌해야 되겠는가. 대비책은 고사하고, 사고와 문제 앞에 책임만 떠넘기는 정치인과 관리들을 보면 분노가 치민다. 그들에게 백성, 시민은 단지 그들이 존재하기 위해 있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셈이다. 표를 찍는 존재로 보고 있다. 그러니 큰 사고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사죄하기 보다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하늘이 구멍 났는데, 난들 어떻게 하라고.”라며 오히려 역정이다.

과연 이 시대, 아니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백성을 뼈에 새기는 정치인들이 몇이나 될까.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 백성이 있기에 내가 있고, 백성이 있기에 내 존재가 빛나고, 백성이 있기에 내가 먹고 살고, 백성이 있기에 내가 머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이나 관리들, 존재할까.

오세영의 역사소설 <북벌>을 읽으면서 내내 든 생각이 이것이었다. 백성을 각골하는 정치인이 있기나 할까. <북벌>은 조선 효종 때의 일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효종은 봉림대군시절,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는 수모를 당한 주인공이다.

물론 그 아비인 인조는 지금의 석촌호수에서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의 치욕을 겪었다. 이런 아픔을 가지고 있는 효종이었으니 청이라는 나라 이름만 들어도 복수의 칼날이 춤을 췄을 것이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개인이기 이전에 국왕이었다. 국제 정세와 여러 가지 변수를 살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복수의 시대에 옛 영토를 회복하고 청나라에 되갚음 하자는 것이 <북벌>의 주요 내용이다.

군병을 직접 지휘하는 북벌의 선두주자, 효종

모든 역사소설이 그렇듯이, 혹은 텔레비전의 사극도 마찬가지 이지만 그 첫 번째 시작점은 조선왕조실록이다. 실록은 날짜별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오세영의 <북벌>도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의 기사에서부터 소설이 출발한다.

소설로 들어가지 전에 효종실록에 주목할 만한 몇 가지 기록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효종은 복수의 칼을 겨누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는 데 주목했다. 당연한 일. 그래서 직접 자신이 군병을 지휘하는 등 손수 나섰다. 그러나 청나라의 감시가 집요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군사훈력을 하지 못하고 비공식적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행사를 핑계삼아 군사훈련을 했다.

가령 다음과 같은 효종실록의 내용을 보자.

효종 6년(1655년) 9월29일

장릉으로부터 환궁하면서 군사 훈련의 모습을 보다

상(주:효종)이 장릉(章陵 주: 효종의 할아버지인 원종의 묘)으로부터 환궁(還宮)하면서 노량의 나루 어귀에 어가를 멈추고는 내려서 언덕 위에 앉아,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이 위아래의 강산을 보라. 우리나라의 수도로는 한양(漢陽)만한 곳이 없다. 중외의 조운(漕運)이 이곳으로 폭주한다. 어찌 다시 이와 같은 형세를 지닌 곳이 있겠는가.”

하고, 또 세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일찍이 이와 같은 강산을 보았느냐?”

하였다. 상이 강을 건널 때, 어영 도제조 이시백, 총융사 구인기가 양주의 군병과 어영군을 인솔하여 이미 도성으로부터 와서 모래사장에 진을 쳐놓고 있다가 어가를 따르는 군병이 먼저 건너자 합하여 한 진으로 만드니, 모두 1만 3천여 명이었다. 먼저 장단(將壇)을 진 안의 동쪽에 설치하고 또 동서로 군문(軍門)을 설치하였다.

상이 서문을 따라 말을 타고 달려 들어가면서 시종하던 신하들에게는 곧바로 남문을 따라 들어갈 것을 명하였는데, 동부승지 이상진(李尙眞)이 ‘홀로 편한 길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하며 극력 사양하고, 이에 서문으로부터 걸어서 수행했다. 상이 들어가 단상에 앉을 때 여러 신하들은 다 미처 이르지 못했는데 이상진만은 먼저 당도하여 단 아래에 엎드려 있으니,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그대의 다리 힘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걸어서 따르겠다고 극력 주장한 것이구나.”

하였다. 이시백 및 훈련대장 이완 등을 명소하여, 군병을 지휘하면서 한참이 지날 때까지 훈련을 하니, 서울의 남녀들이 와서 구경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공식적인 훈련이 아니라 할아버지 묘에 성묘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군사들이 임금을 맞이하는 형식으로 노량진에서 훈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효종은 흐뭇한 웃음을 머금는다. 아들(세자)에게 “우리나라의 수도로는 한양만한 곳이 없다”고 하고, 신하에게는 “그대의 다리가 튼튼하다.”는 등 덕담을 허물없이 나눈다. 군사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던 것이다.

1만3천 명의 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훈련을 하는 모습에 효종은 감개무량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이완 훈련도감 대장(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8a0098b)에 주목해 보자. 이완은 오세영의 <북벌>에서 중심인물이다.

이완 대장은 효종의 북벌을 직접 손과 발이 돼 전두지휘하는 인물이다. 실제로 효종실록에는 이완이 여러 차례 사간원과 사헌부로부터 공격을 받지만 효종은 그때마다 “그만하라. 이완은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적극 옹호하는 기사가 많다. 효종에게 있어 이완 대장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인물이었다.

다음에 실린 효종실록의 한 기사를 보더라도 효종이 얼마만큼 이완을 중요시했는지 알고도 남는다.

효종 9년(1658년) 4월18일

훈련 대장 이완에게 내려준 말이 야위고 안 좋자 담당 관리를 문책하다

상(주:효종)이 춘당대에 나아가 관무제(觀武才)를 하고 이어서 문신 당상 이하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였는데, 이지백(李知白)이 장원을 하여 즉시 첨지를 제수하고 이 이하의 관원들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무예(武藝) 입격자에게는 가자(加資)하거나 또는 직부(直赴)시키고 그 이하에게는 호피(虎皮)·궁시(弓矢)·면포(綿布) 등을 차등을 두어 내려주었다.

상이 훈련대장 이완(李浣)과 어영대장 유혁연(柳赫然)을 특별히 불러서 내구마(內廐馬) 한 필씩을 내려주었는데, 이완이 받은 말이 야위고 안 좋자 상이 크게 노하여 태복시 첨정 이문주(李文柱)를 앞으로 끌어내어 당장 금부로 내려 보내고, 또 두 제조에게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책하였는데, 좌의정 원두표가 허겁지겁 뛰어나가 직접 말고삐를 잡으니,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완 대장에게 말을 주라고 했는데 그 말이 야위고 상태가 안 좋은 것을 보고 관련되는 관리들을 직접 효종이 문책하고 나선 것이다. 이 정도이니 이완 대장이 효종에게 어떤 사람인지는 파악하고도 남겠다.

그리고 위 기사에 나오는 또 한 사람의 인물. 유혁연도 주목해야 한다. 유혁연은 어영대장으로 효종의 최측근 친위부대인 어영대장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이완과 같은 레벨의 무장으로서 효종의 최측근이다. 역시 북벌의 한 축이다. 그러나 오세영의 <북벌>에서는 유혁연은 비중있게 나오지 않는다.

이렇듯 효종은 훈련도감과 어영대, 두 친위부대를 직접 통솔하면서 이완과 유혁연 두 무장을 심복으로 삼고 북벌을 준비한다.

조선시대 비극적 인물, 소현세자

소현세자(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73063)는 조선시대 역사상 가장 비운의 인물 중 한명이다. 조선시대의 비극적인 세자를 지목하라면 당연 소현세자와 사도세자가 꼽힌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이 있은 뒤 청나라로 볼모로 끌려갔다.

소현세자는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청나라에 끌려갔지만 그곳에서 그는 조선의 대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비밀스럽게 빼내 자신이 조선으로 돌아가면 더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마음속으로 다지고 또 다졌다. 청나라의 볼모로 있는 이상 그들 나라에 밉보여서는 안될 일.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고개를 숙이는 척 하면서 와신상담했다.

이런 소현세자의 모습은 아버지 인조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청나라와 친한 소현세자가 자신을 몰아내고 왕이 될 것이라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다. 조선의 왕 중에 중종(연산군을 몰아내고)과 인조(광해군을 몰아내고)는 반정(쿠데타)으로 왕이 된 인물이다. 이들은 그래서인지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밀어내고 왕이 될 것이란 피해의식에 빠져 있었다. 인조는 특히 그 정도가 심해 심지어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까지 의심하고 나섰다.

오랜 기간 동안 볼모로 갔다가 풀려난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인조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었다.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정치적인 적이었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효를 가장 중요시하는 조선에서 아들이 아비를 죽일 수는 없는 일, 아비인 인조가 아들을 죽일 수밖에. 소현세자는 그렇게 말라갔고 끝내 죽어갔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현세자의 아내인 강빈도 사약을 받아 죽었다. 인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손자들인 소현세자의 아들 셋을 모두 유배 보내버렸고, 유배지에서 그 중 한명은 죽고 만다. 아들을 죽이고,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를 유배 보낸 인조! 과연 그를 아버지와 시아버지와 할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세영의 <북벌>에는 소현세자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또 하나의 중심축으로 등장한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있었을 당시 친분을 쌓았던 성명욱! 성명욱은 조선 최대의 상단을 이끄는 단주이다. 성명욱과 함께 소현세자의 후궁인 최 씨를 모셨던 묘선이라는 궁녀도 등장한다.

묘선은 최 씨가 소현세자의 아들을 낳으면서 급사하자, 소현세자의 서자를 몰래 빼돌린다. 그 서자가 박석주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또 효종이 북벌의 시기로 잡은 몇 달 전 청나라에서 칙사가 도착했다. ‘파부내’라는 이름의 칙사인데, 성명욱은 이 칙사와 손을 잡고 효종을 몰아내고 소현세자의 서자를 왕으로 만들 책략을 꾸민다.

성명욱 단주는 효종이 추진하고 있는 북벌이야 말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자존심만 내세우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단정한다. 청은 뜨는 태양이지만 명은 지는 태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당에 청에 복수할 생각만 하는 비현실적인 군주, 그가 효종이라는 판단이다. 성명욱은 그러면서 “소현세자만 있었더라도 조선은 이렇게 쇠약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가짜 임금(효종)을 몰아내고 소현세자의 핏줄에게 진짜 임금 직을 물려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벌을 추진하는 효종파와 현실적인 상황을 기초로 소현세자를 다시 부활시키자는 소현세자파의 갈등! 과연 조선시대에는 이들 뿐이었든가. 절대 아니다. 또 하나의 권력, 사대부가 있었다.

송시열의 나라, 조선

효종파와 소현세자 파의 갈등 속에 또 하나의 갈등 축이 등장하는데 바로 서인의 영수 송시열(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43203) 파이다. 송시열은 효종의 스승이자 효종을 왕으로 등극시킨 일등공신이다. 조선시대의 강력한 윤리 중 하나,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같다는 것. 그러니 송시열이 효종에게 어떤 인물인지 불을 보듯 뻔하다.

송시열은 자신의 제자이자 자신이 직접 앉힌 왕인만큼 효종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효종은 조선을 다스리지만 효종을 다스리는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송시열인 만큼 무엇이 두려웠겠는가. 무엇이 무서웠겠는가.

효종이 승하하기 전까지 송시열은 이조판서를 맡고 있었다. 이조판서는 그야말로 인사권을 쥐고 있는 핵심 판서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청와대 민정수석과 인사수석을 겸하고 있는 직책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효종이 북벌을 추진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효종실록의 기사로 돌아가 본다.

효종 10년(1659년) 5월 4일

대조전에서 승하하다

상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약방 도제조 원두표(元斗杓), 제조 홍명하(洪命夏), 도승지 조형(趙珩) 등이 대조전의 영외(楹外)에 입시하고 의관 유후성(柳後聖)·신가귀(申可貴) 등은【이때 신가귀는 병으로 집에 있었는데 이날 병을 무릅쓰고 궐문(闕門) 밖에 나아가니, 드디어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먼저 탑전에 나아가 있었다. 상이 침을 맞는 것의 여부를 신가귀에게 하문하니 가귀가 대답하기를,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또한 농증(膿症)을 이루려 하고 있으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연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하고, 유후성은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왕세자가 수라를 들고 난 뒤에 다시 침을 맞을 것을 의논하자고 극력 청하였으나 상이 물리쳤다. 신가귀에게 침을 잡으라고 명하고 이어 제조 한 사람을 입시하게 하라고 하니, 도제조 원두표가 먼저 전내(殿內)로 들어가고 제조 홍명하, 도승지 조형이 뒤따라 곧바로 들어갔다.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침구멍으로 피가 나오니 상이 이르기를,

“가귀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

하였다.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솟아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血絡)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제조 이하에게 물러나가라고 명하고 나서 빨리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을 바르게 하였는데도 피가 그치지 않으니, 제조와 의관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의 증후가 점점 위급한 상황으로 치달으니, 약방에서 청심원(淸心元)과 독삼탕(獨參湯)을 올렸다.

백관들은 놀라서 황급하게 모두 합문(閤門) 밖에 모였는데, 이윽고 상이 삼공(三公)과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약방 제조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승지·사관(史官)과 제신(諸臣)들도 뒤따라 들어가 어상(御床) 아래 부복하였는데, 상은 이미 승하하였고 왕세자가 영외(楹外)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승하한 시간은 사시(巳時)에서 오시(午時) 사이였다.

훈련대장 이완(李浣)이 도감(都監)의 군병을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호위하였다.

그렇다면 송시열은 과연 북벌에 찬성했을까. 당연히 찬성했다. 왜냐하면 조선의 사대부는 주자학이 근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랑캐인 청나라를 섬기는 일 따위는 아예 맞지 않는 처신이다. 무력으로는 이기지 못하지만 정신적으로 까지 청나라를 섬기는 것은 아니었다.

또 다시 질문 하나. 그렇다면 송시열은 진짜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었을까. 여기서 오세영의 <북벌>에서는 서인정권의 경우 북벌은 주장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전혀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라고 설명한다.

그 이유로 명분상으로는 북벌이 서인들에게 걸맞는 말이지만 현실적으로 전쟁을 해서 자신들이 이득을 볼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인들은 북벌을 주장하면서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적극 반대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 효종이 적극 추진하는 북벌이 실행에 옮겨지면 왕권이 절대적으로 강화돼 서인이 집권하고 있는 신권은 무너질 것이란 판단을 하고 있었다.

조선은 효종의 나라도 아니요, 그렇다고 백성의 나라는 더욱 아니며 송시열에게는 그의 나라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서인들은 효종 말기, 북벌이 가시화되자 효종을 버리고 소현세자 파와 손을 잡은 뒤 효종을 폐하고 소현세자의 서자에게(후궁의 아들)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정치공작에도 나선다. 정작 소현세자를 죽인 서인들이었지만 효종의 현실적 불벌에 적극 반대하기 위해 적과 손을 잡는 형국이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 어떤 가치보다도 현실적인 권력에 집착한 세력! 그들이 바로 서인들이었으며 그 우두머리가 바로 송시열이었다.

백성을 뼈에 새기는 정치인, 있다? 없다?

오세영의 <북벌> 내용은 간단하다.

청에 복수하기 위해 북벌을 주장하는 ①효종파

친청을 내세우며 가짜 임금을 패하고 소현세자의 핏줄에게 왕위를 물려주자는 ②소현세자파

북벌이든 친청이든 상관없이 서인을 배제하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③송시열파.

효종파 든, 소현세자파 든, 송시열파 든 그 속에 백성을 뼈에 새긴 집단은 그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 자신의 이해와 자신의 포부를 위해 싸우는 정치집단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가뭄이 조선을 심각하게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복수를 위해 북벌을 주장한 비현실적인 효종!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 비극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복수의 칼날을 켜는 소현세자 세력들!

왕이든, 청나라든 서인들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송시열!

이들 중에 그 어느 곳에서 백성은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끼어줄 생각도 없어 보인다. 이런 역사가 비단 조선시대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역사는 지금, 이 나라 대한민국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안타까움이지 비극이다.

다시 백성들의 시대가 오고 있다. 내년 2012년은 총선과 대통령선거가 이어진다. 정치인들은 다시 ‘백성’을 들고 나올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백성은 ‘표를 찍어주는 존재’일 때만 의미가 있다. 그 이후에는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지극히 이기적인 동물이다.

인류 진화의 역사상 가장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동물이 정치인이지 않을까. 그렇더라도 표를 찍을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면 정말 잘 찍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아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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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오늘은 좋은 사람 여덟 명이 집을 방문할 것이니...좋은 안주와 술을 준비해 놓도록 하거라.”

때는 조선 중종 시절. 병조판서(지금으로 따지면 국방부장관)를 지낸 신용개는 하인들에게 분부한다. 조금씩 어둠이 밀려들고 때는 가을, 국화 향기가 물씬 묻어나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하인들은 안주와 술을 준비하고 기다린다. 어둠은 더욱 짙게 내려앉고, 그러나 손님 여덟 사람은 올 줄을 모른다. 밤이 점점 무르익는데도 신용개는 미동도 없이 책상에 앉아 글을 읽고 있다. 안달이 난 것은 하인들이다. 졸려 죽겠는데!!!

“대감마님! 손님이 언제 오십니까? 술상은 벌써 준비해 놓았습니다.”

(하인들의 독백: 우리도 빨리 들어가서 좀 자자! 책만 읽고...도대체 놈들은 온다는 거여, 안 온다는 거여?)

그러나 신용개는 하인들의 물음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시간을 더욱 흘러 달빛이 조용히 툇마루에 스며들고 밤이 무르익었을 무렵 신용개는 서책을 덮고 조용히 일어나 술상 앞으로 간다.

“손님들은 이미 와 계신다.”

그러면서 아침나절 툇마루에 옮겨놓은 국화 여덟 송이를 쳐다본다. 붓거니 잣거니 신용개는 국화 여덟 송이에게 한잔 한잔 술을 따르고 자신도 따라 마신다. 그렇게 신용개는 가을 향기 묻어나는 저녁, 국화 여덟 송이와 술에 대취한다.

신용개는 술을 아주 좋아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사헌부와 사간원(왕에게 신하들의 잘잘못을 직언하는 직책)들에게 탄핵을 받기까지 하는데 탄핵의 이유가 단순하다. 그 이유인즉슨 “신용개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업무를 보지 못합니다.”는 것. 이쯤 되면 얼마나 술을 좋아했을 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또 하나. 신용개가 중종에게 사직서를 내밀었다. 그러자 신용개의 능력과 재주를 아꼈던 중종은 적극 만류한다. 만류하면서 중종이 내놓는 선물이 걸작이다. 중종은 “내가 경에게 술을 내릴 것이니 사직하지 마라.”고 한다.

조선 역사에 깃들어 있는 민족정신

이수광의 <조선의 쾌인쾌사>에는 조선시대 쾌인(快人)으로 불리는 이들의 짧은 에피소드와 쾌사(快事), 유쾌한 일들에 대한 일화를 담았다. 한반도 국민으로 태어났다면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어느 것이든 한 가락 정도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TV를 켜면 곳곳에 조선의 역사에 대한 드라마가 펼쳐지고, 서점에 가면 조선의 역사에 대한 수많은 책들을 만난다. 그 뿐인가. 만화를 통해서도 조선의 역사가 아이들에게 읽혀지고, 수많은 작품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 우리는 조선에 대해 이렇게 집착할까.

그것은 아마도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엄청난 양의 역사서가 그 원인일 것이다. 500여 년의 역사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있는 그대로 적어 후세들에게 그대로 물려준 그들의 시대정신에 감탄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왕조실록의 우수성과 대단함은 그 기록하는 방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은 자신의 통치시절의 역사를 절대 볼 수 없다. 왕이 죽고 나서야, 그 왕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는 실록청이 신설되기 때문에 절대 자신의 역사를 살아서는 볼 수 없다. 그러니 왕들의 경우, 생존했을 때 더욱 조심했을 것이다.

또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역할도 한몫한다.

조선 태종시절 때 민인생이라는 사관이 있었다. 태종이라면 알다시피 무시무시한 군주 아니었던가.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왕에 올라, 자신의 처남을 죽이고, 왕권에 도전하는 거의 모든 신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차갑고 냉철한 군주였다.

어느 날, 태종이 사냥을 나갔다. 당근! 민인생은 붓과 종이를 들고 쫄래쫄래 따라 나선다. 태종은 무인답게 사냥을 즐겼고 사냥솜씨도 일품이었다.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군주였다. 그때 사슴 한 마리가 태종 앞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저만치 ‘겅중겅중’ 뛰어 나간다. 태종은 말을 달려 사슴을 좇았다. 그런데 아뿔싸, 그만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 말이 쓰러지고 태종이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민인생은 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종이에 기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종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옷을 털털 털고 민인생에게로 조용히 다가왔다.

태종: (궁금증)“지금 무엇을 적고 있는 것인가?”

민인생: “......”

태종: (사실확인)“경은 내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인가?”

민인생: “......”

태종: (협박)“그것은 적지마라! 만약 적었다가는 내 그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민인생: “......”

태종의 궁금증과 사실 확인, 급기야 협박성 명령에도 민인생은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한 것은 태종일 수밖에. 태종은 다른 신하들을 멀리하고 민인생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 안으며 한적한 곳으로 그를 데려간다. 마치 동무를 대하듯이.

태종: (다시 한 번 확인) “경은 내 말을 알아들었는가?”

경고하다시피 민인생에게 윽박질러 보지만 민인생은 이번에도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조바심이 난 태종. 아주아주 조용한 말투로.

태종:(애원조로) “그...한번만 봐주게. 아! 사실 말에서 떨어진 것은 맞긴 맞는데 후세대들이 보면 내가 쪽팔리지 않겠는가? 어떻게 좀 안되까?"

그때서야 민인생이 한 마디 한다.

민인생: “사관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적을 뿐 평가는 후세대들이 하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전하! 사관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게임 끝! 태종은 민인생의 이 말에 아무런 대구도 하지 못하고 그날 사냥을 접고 궁궐로 후퇴했다. 태종이 쫓던 사슴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낼름거리며 멀리 도망갔다나 어쨌다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조선의 역사

조선의 역사는 곳곳에 후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드라마적 요소가 무궁무진 숨어있다. 태종이 장남인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는 드라마적 요소.

그러나 단종때 대 반전극이 펼쳐진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이 왕위를 물려받고, 문종의 아들 단종이 왕위를 다시 물려받게 되지만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강제 퇴위당하고 마는 단종. 그때 양녕대군은 단종의 폐위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세조의 편에 서서 단종을 폐위시키는 일등공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 두고 후세 역사가들은 양녕대군이 자신이 물려받아야 할 왕위를 세종이 가져가면서 세종의 손자(단종)에게 복수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단편적인 사실만 두고 하는 것이겠지만.

이런 반전과 함께 곳곳에 여자들이 등장한다. 인수대비, 문정왕후, 장녹수, 장희빈, 인형왕후…

그 방대한 역사는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방대한 글을 통해 그대로 전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왕과 여자, 왕과 신하, 여자와 여자 등 입체적인 갈등이 그대로 묘사돼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선왕조실록은 한편의 거대한 장편 서사 드라마 교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설명이다.

그 속에서 반전과 반전이 거듭되고 곳곳에 후세대들이 느끼게 하는 카타르시스가 숨겨져 있다.

은근한 은유에 숨어있는 날선 비판

글이 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다시 <조선사 쾌인쾌사>로 돌아가 보자. 이제 은유 속에 숨겨져 있는 은근한 비판이자 날선 칼날들을 만나보자.

송도 기생 설매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은 담고 있다.

때는 태조 이성계 시절, 나라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공신들을 위한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중 송도 기생 설매의 모습은 화용월태. 꽃이 이 보다 아름다울 수 있으며 달빛이 이 보다 더 고울 수 있을까. 설매의 모습은 여러 신하를 유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기생들의 노래도 익어가고, 많은 공신들이 설매를 어떻게 해 볼까 적극적으로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한 공신이 설매에게 묻는다.

“듣자니 기생은 아침에는 동쪽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는 서쪽에서 잠을 잔다고 하는데, 오늘 밤 이 늙은이에게 수청을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기생을 노류장화라고 했던가. 길가에 피어있는 버드나무와 담장아래 있는 꽃처럼 누구나 쉽게 꺾을 수 있는 존재. 그러나 조선시대 기생은 기개와 절개가 있었다. 이 말은 들은 설매는 낯 빛 하나 변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이렇게 응수한다.

“동쪽에서 밥을 먹고 서쪽에서 잠을 자는 것은 노류장화의 본분입니다. 왕 씨도 섬기고 이 씨도 섬기는 대감과는 유유상종이 아니겠습니까? 모시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게임 끝! 졸지에 유유상종. 같은 부류로 분류돼 버린 늙은 중신! 이 늙은 중신은 그날, 자신이 생각하기에 한갓 기생에게 보기 좋게 당한 셈이다. 그윽한 은유 속에 숨겨져 있는 날선 비판에 날카로운 칼이 숨겨져 있지 않은가. 과연 그날 공신은 설매와 같이 잠자리에 들 수 있었을까.

후세들을 즐겁게 하는 조선의 역사

조선의 역사가 즐거운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출판의 왕국’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수많은 개인문집들이 출간됐다. 어떤 형태로든 문집으로 엮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성리학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유학에 관한 서적이 많았지만 그 중에는 서민들에게 웃음을 주는 쾌담과 허풍스러운 이야기들도 많이 전해진다. 그런 유산들이 후세들에게 그대로 전해졌으니 우리 민족은 축복받은 민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의 쾌인쾌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만 더 인용해 보자.

조선의 큰 절 중에 합천의 해인사와 평양의 석왕사가 있었다. 이 두 절에는 전해오는 전설이 있는데 해인사의 가마솥이 엄청 크다는 것과 석왕사의 해우소가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두 절의 스님이 서로 확인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러다 중간 지역에서 떡하니 만난다.

먼저 석왕사 스님이 해인사 스님에게 묻는다.

석왕사 스님: “내 들으니 해인사 가마솥은 그 크기가 엄청나다고 하던데, 도대체 얼마나 큽니까?”

해인사 스님: “글쎄요, 좀 크긴 합니다만 제가 정확히 설명은 드릴 수 없고 다만, 큰 스님이 얼마 전 가마솥에 팥죽을 끓이다가 팥죽을 젓기 위해 가마솥에 조각배를 띄워 떠났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헉! 석왕사 스님을 놀래 자빠졌다. 이번에는 해인사 스님이 묻는다.

해인사 스님: “석왕사도 전설이 있던데 해우소가 그렇게 크다고 들었습니다. 그 크기가 얼마만 합니까.”

석왕사 스님: “해인사의 가마솥에야 비견할까마는 제가 평양을 떠날 때 큰 스님이 대변을 보셨는데 아직 그 대변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헉! 해인사 스님이 이번에는 뒤로 넘어졌다.

조선의 역사는 파란만장한 우리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때론 감동으로, 때론 짙은 연민으로, 때론 웃음으로, 때론 절망으로, 때론 희망으로….이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조선의 역사! 무엇보다 그곳에서부터 현재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조선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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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