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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05 조선의 快…快…快…이수광 <조선사 쾌인쾌사>

“오늘은 좋은 사람 여덟 명이 집을 방문할 것이니...좋은 안주와 술을 준비해 놓도록 하거라.”

때는 조선 중종 시절. 병조판서(지금으로 따지면 국방부장관)를 지낸 신용개는 하인들에게 분부한다. 조금씩 어둠이 밀려들고 때는 가을, 국화 향기가 물씬 묻어나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하인들은 안주와 술을 준비하고 기다린다. 어둠은 더욱 짙게 내려앉고, 그러나 손님 여덟 사람은 올 줄을 모른다. 밤이 점점 무르익는데도 신용개는 미동도 없이 책상에 앉아 글을 읽고 있다. 안달이 난 것은 하인들이다. 졸려 죽겠는데!!!

“대감마님! 손님이 언제 오십니까? 술상은 벌써 준비해 놓았습니다.”

(하인들의 독백: 우리도 빨리 들어가서 좀 자자! 책만 읽고...도대체 놈들은 온다는 거여, 안 온다는 거여?)

그러나 신용개는 하인들의 물음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시간을 더욱 흘러 달빛이 조용히 툇마루에 스며들고 밤이 무르익었을 무렵 신용개는 서책을 덮고 조용히 일어나 술상 앞으로 간다.

“손님들은 이미 와 계신다.”

그러면서 아침나절 툇마루에 옮겨놓은 국화 여덟 송이를 쳐다본다. 붓거니 잣거니 신용개는 국화 여덟 송이에게 한잔 한잔 술을 따르고 자신도 따라 마신다. 그렇게 신용개는 가을 향기 묻어나는 저녁, 국화 여덟 송이와 술에 대취한다.

신용개는 술을 아주 좋아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사헌부와 사간원(왕에게 신하들의 잘잘못을 직언하는 직책)들에게 탄핵을 받기까지 하는데 탄핵의 이유가 단순하다. 그 이유인즉슨 “신용개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업무를 보지 못합니다.”는 것. 이쯤 되면 얼마나 술을 좋아했을 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또 하나. 신용개가 중종에게 사직서를 내밀었다. 그러자 신용개의 능력과 재주를 아꼈던 중종은 적극 만류한다. 만류하면서 중종이 내놓는 선물이 걸작이다. 중종은 “내가 경에게 술을 내릴 것이니 사직하지 마라.”고 한다.

조선 역사에 깃들어 있는 민족정신

이수광의 <조선의 쾌인쾌사>에는 조선시대 쾌인(快人)으로 불리는 이들의 짧은 에피소드와 쾌사(快事), 유쾌한 일들에 대한 일화를 담았다. 한반도 국민으로 태어났다면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어느 것이든 한 가락 정도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TV를 켜면 곳곳에 조선의 역사에 대한 드라마가 펼쳐지고, 서점에 가면 조선의 역사에 대한 수많은 책들을 만난다. 그 뿐인가. 만화를 통해서도 조선의 역사가 아이들에게 읽혀지고, 수많은 작품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 우리는 조선에 대해 이렇게 집착할까.

그것은 아마도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엄청난 양의 역사서가 그 원인일 것이다. 500여 년의 역사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있는 그대로 적어 후세들에게 그대로 물려준 그들의 시대정신에 감탄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왕조실록의 우수성과 대단함은 그 기록하는 방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은 자신의 통치시절의 역사를 절대 볼 수 없다. 왕이 죽고 나서야, 그 왕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는 실록청이 신설되기 때문에 절대 자신의 역사를 살아서는 볼 수 없다. 그러니 왕들의 경우, 생존했을 때 더욱 조심했을 것이다.

또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역할도 한몫한다.

조선 태종시절 때 민인생이라는 사관이 있었다. 태종이라면 알다시피 무시무시한 군주 아니었던가.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왕에 올라, 자신의 처남을 죽이고, 왕권에 도전하는 거의 모든 신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차갑고 냉철한 군주였다.

어느 날, 태종이 사냥을 나갔다. 당근! 민인생은 붓과 종이를 들고 쫄래쫄래 따라 나선다. 태종은 무인답게 사냥을 즐겼고 사냥솜씨도 일품이었다.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군주였다. 그때 사슴 한 마리가 태종 앞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저만치 ‘겅중겅중’ 뛰어 나간다. 태종은 말을 달려 사슴을 좇았다. 그런데 아뿔싸, 그만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 말이 쓰러지고 태종이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민인생은 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종이에 기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종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옷을 털털 털고 민인생에게로 조용히 다가왔다.

태종: (궁금증)“지금 무엇을 적고 있는 것인가?”

민인생: “......”

태종: (사실확인)“경은 내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인가?”

민인생: “......”

태종: (협박)“그것은 적지마라! 만약 적었다가는 내 그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민인생: “......”

태종의 궁금증과 사실 확인, 급기야 협박성 명령에도 민인생은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한 것은 태종일 수밖에. 태종은 다른 신하들을 멀리하고 민인생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 안으며 한적한 곳으로 그를 데려간다. 마치 동무를 대하듯이.

태종: (다시 한 번 확인) “경은 내 말을 알아들었는가?”

경고하다시피 민인생에게 윽박질러 보지만 민인생은 이번에도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조바심이 난 태종. 아주아주 조용한 말투로.

태종:(애원조로) “그...한번만 봐주게. 아! 사실 말에서 떨어진 것은 맞긴 맞는데 후세대들이 보면 내가 쪽팔리지 않겠는가? 어떻게 좀 안되까?"

그때서야 민인생이 한 마디 한다.

민인생: “사관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적을 뿐 평가는 후세대들이 하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전하! 사관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게임 끝! 태종은 민인생의 이 말에 아무런 대구도 하지 못하고 그날 사냥을 접고 궁궐로 후퇴했다. 태종이 쫓던 사슴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낼름거리며 멀리 도망갔다나 어쨌다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조선의 역사

조선의 역사는 곳곳에 후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드라마적 요소가 무궁무진 숨어있다. 태종이 장남인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는 드라마적 요소.

그러나 단종때 대 반전극이 펼쳐진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이 왕위를 물려받고, 문종의 아들 단종이 왕위를 다시 물려받게 되지만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강제 퇴위당하고 마는 단종. 그때 양녕대군은 단종의 폐위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세조의 편에 서서 단종을 폐위시키는 일등공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 두고 후세 역사가들은 양녕대군이 자신이 물려받아야 할 왕위를 세종이 가져가면서 세종의 손자(단종)에게 복수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단편적인 사실만 두고 하는 것이겠지만.

이런 반전과 함께 곳곳에 여자들이 등장한다. 인수대비, 문정왕후, 장녹수, 장희빈, 인형왕후…

그 방대한 역사는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방대한 글을 통해 그대로 전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왕과 여자, 왕과 신하, 여자와 여자 등 입체적인 갈등이 그대로 묘사돼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선왕조실록은 한편의 거대한 장편 서사 드라마 교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설명이다.

그 속에서 반전과 반전이 거듭되고 곳곳에 후세대들이 느끼게 하는 카타르시스가 숨겨져 있다.

은근한 은유에 숨어있는 날선 비판

글이 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다시 <조선사 쾌인쾌사>로 돌아가 보자. 이제 은유 속에 숨겨져 있는 은근한 비판이자 날선 칼날들을 만나보자.

송도 기생 설매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은 담고 있다.

때는 태조 이성계 시절, 나라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공신들을 위한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중 송도 기생 설매의 모습은 화용월태. 꽃이 이 보다 아름다울 수 있으며 달빛이 이 보다 더 고울 수 있을까. 설매의 모습은 여러 신하를 유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기생들의 노래도 익어가고, 많은 공신들이 설매를 어떻게 해 볼까 적극적으로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한 공신이 설매에게 묻는다.

“듣자니 기생은 아침에는 동쪽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는 서쪽에서 잠을 잔다고 하는데, 오늘 밤 이 늙은이에게 수청을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기생을 노류장화라고 했던가. 길가에 피어있는 버드나무와 담장아래 있는 꽃처럼 누구나 쉽게 꺾을 수 있는 존재. 그러나 조선시대 기생은 기개와 절개가 있었다. 이 말은 들은 설매는 낯 빛 하나 변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이렇게 응수한다.

“동쪽에서 밥을 먹고 서쪽에서 잠을 자는 것은 노류장화의 본분입니다. 왕 씨도 섬기고 이 씨도 섬기는 대감과는 유유상종이 아니겠습니까? 모시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게임 끝! 졸지에 유유상종. 같은 부류로 분류돼 버린 늙은 중신! 이 늙은 중신은 그날, 자신이 생각하기에 한갓 기생에게 보기 좋게 당한 셈이다. 그윽한 은유 속에 숨겨져 있는 날선 비판에 날카로운 칼이 숨겨져 있지 않은가. 과연 그날 공신은 설매와 같이 잠자리에 들 수 있었을까.

후세들을 즐겁게 하는 조선의 역사

조선의 역사가 즐거운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출판의 왕국’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수많은 개인문집들이 출간됐다. 어떤 형태로든 문집으로 엮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성리학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유학에 관한 서적이 많았지만 그 중에는 서민들에게 웃음을 주는 쾌담과 허풍스러운 이야기들도 많이 전해진다. 그런 유산들이 후세들에게 그대로 전해졌으니 우리 민족은 축복받은 민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의 쾌인쾌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만 더 인용해 보자.

조선의 큰 절 중에 합천의 해인사와 평양의 석왕사가 있었다. 이 두 절에는 전해오는 전설이 있는데 해인사의 가마솥이 엄청 크다는 것과 석왕사의 해우소가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두 절의 스님이 서로 확인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러다 중간 지역에서 떡하니 만난다.

먼저 석왕사 스님이 해인사 스님에게 묻는다.

석왕사 스님: “내 들으니 해인사 가마솥은 그 크기가 엄청나다고 하던데, 도대체 얼마나 큽니까?”

해인사 스님: “글쎄요, 좀 크긴 합니다만 제가 정확히 설명은 드릴 수 없고 다만, 큰 스님이 얼마 전 가마솥에 팥죽을 끓이다가 팥죽을 젓기 위해 가마솥에 조각배를 띄워 떠났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헉! 석왕사 스님을 놀래 자빠졌다. 이번에는 해인사 스님이 묻는다.

해인사 스님: “석왕사도 전설이 있던데 해우소가 그렇게 크다고 들었습니다. 그 크기가 얼마만 합니까.”

석왕사 스님: “해인사의 가마솥에야 비견할까마는 제가 평양을 떠날 때 큰 스님이 대변을 보셨는데 아직 그 대변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헉! 해인사 스님이 이번에는 뒤로 넘어졌다.

조선의 역사는 파란만장한 우리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때론 감동으로, 때론 짙은 연민으로, 때론 웃음으로, 때론 절망으로, 때론 희망으로….이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조선의 역사! 무엇보다 그곳에서부터 현재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조선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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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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