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마재(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의 정 씨 가문에는 네 형제가 있었다.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가까운 곳이었다. 첫째 정약현의 딸, 명련은 황사영을 남편으로 맞는다.

네 명의 정 씨와 한 명의 황 씨는 조선 후기, 소용돌이 역사의 주인공들이었다. 이들은 천주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약종과 황사영은 죽음으로 맞서면서 끝까지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순교하고자 스스로 결심한 셋째 정약종으로 인해 목숨을 건졌다.

김훈의 <흑산>은 정 씨 가문과 황 씨의 이야기이다.

마재 정 씨 가문의 네 형제를 역사적으로 이야기할 때 가장 앞서는 사람은 언제나 막내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은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이상 사회에 대한 희망을 책으로 엮어낸 대학자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들 네 명의 정 씨 가문에 대한 책을 낼 때는 언제나 '정약용과 누구누구'를 사용했다. 역사적 비중이 정약용에게 집중돼 있기 때문이었다. 이덕일 교수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김훈의 <흑산>은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과 황사영에 포커스를 맞췄다. <흑산>은 정약전이 유배 간 '검은 섬'이다. 그곳에서 물고기의 생태를 관찰한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탄생한다.

아우구스티노에서 알렉시오에 이르는 죽음

김훈의 <흑산>은 아우구스티노의 죽음에서 시작해서 알렉시오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소설이다. 소설의 시작점은 이렇다.

"정약종, 너의 사호는 무엇이냐."

"아우구스티노다. 사호가 아니라 세례명이다."

정씨 가문의 셋째 정약종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둘째 정약전과 막내 정약용과 달리 정약종은 '골수' 천주교인이었다. 역사학자 이덕일 교수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서 장약종의 체포과정을 보면 스스로 천주교인임을 인정하고 자랑스러워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종은 2월11일 체포되었다. 자신을 잡으러 가던 금부도사를 길에서 지나쳤으나 자신을 잡으러 가는 길이냐고 묻고는 스스로 체포된 것이다."

정약종은 천주교로 인한 죽음을 받아들였고 순교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정약종의 죽음으로 시작된 <흑산>의 마지막은 황사영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제천 베론 토굴에 숨어있던 황사영은 조여 오는 체포 망에 걸려든다. 포졸과 군관들이 토굴을 덮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야! 알렉시오. 너 황사영이지?"

알렉시오는 황사영의 세례명. 황사영은 체포됐고 능지처참을 당한다. 정약종과 황사영의 죽음이 <흑산>의 시작과 끝이라면 그 중간의 이야기는 살아남은 정약전과 당시 천주교를 비밀스럽게 믿고 따르던 민초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끝없이 등장하는 민초들, 이미지에 묶여 입체적 서사는 실패

소설 <흑산>은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를 둘러싼 사건들을 그리고 있다. 정약전과 황사영이 중심에 놓여 있지만 당시 민초들이 많이 등장한다.

정주에서 말을 끌고 있는 마부 마노리, 궁궐에서 쫓겨난 늙은 궁녀 길가녀, 마포나루에서 들고나는 배꾼들에게 술을 파는 강사녀, 정 씨 가문의 노비로 있다가 면천된 김개동과 육손이…이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민초들이 당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가슴 속에 아로새겼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김훈은 소설 속에서 "주여, 주여 하고 부를 때 노비들은 부를 수 있는 제 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웠다."라고 묘사했다.

정조 서거이후 조선후기 사회는 정순왕후의 시대였으며 외척의 시대였다. 사도세자와 정조에 적극 반대했던 노론 벽파가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남인들은 처절하게 숙청당했다. 남인들을 숙청하기 위해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끌어들인 것이다.

김훈의 <흑산>에 등장하는 민초들과 정약전, 그리고 황사영의 이야기 구조는 아쉽게도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내면의 이야기에 주목하다 보니 인물 개별적인 묘사는 뛰어나지만 장편을 이끄는 입체적 이야기 구조는 부족하다.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로 발전하지 못했다.

장편과 단편의 차이는 무엇일까. 단편은 등장인물이 적는 반면 장편은 등장인물이 많다. 단편은 한 인물의 내면에 주목하는 반면, 장편은 다양한 사건 속에서 여러 인물들의 역할과 입체적 서사구조를 가진다.

김훈의 <흑산>은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단편 소설적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다. 각 인물들이 서로 엮이고 설키면서 갈등과 화해, 거대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다보니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동떨어져 여러 이미지로만 남아 버렸다. 소설을 읽어 나가는데 이어지는 느낌 보다는 서로 단절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 , 이제 여기에 사는 사람들

소설은 정약전이 '흑산(黑山)'을 '자산(玆山)'으로 바꾸어 부르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유일하게 흑산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창대에게 정약전은 이렇게 말한다.

"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黑은 너무 캄캄하다. 玆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정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되면서 절대 다시는 육지로 나가지 못할 것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살아있는 몸과 무한히 많은 시간 뿐. 흑산에서 정약전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닷가를 거닐고, 물고기와 날아다니는 새를 쳐다보는 일. 그곳에서 <자산어보>가 시작됐다. 한 인간의 숙명이었다.

김훈의 <흑산>은 조선후기 천주교를 둘러싼 민중들의 믿음과 갖은 고초를 겪으며 배교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소설에 등장하는 민초들이 입체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이미지에 머물러 버렸다. 그런 요소들이 장편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한계점으로 노출된다.

<흑산>에 나오는 정약전의 말 처럼 '또 지금, 이제, 여기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다 구체적이고 서로 연결되는 점을 찾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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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종종 걸음을 치는 여자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흐느적흐느적 걷는 남자
책가방을 둘러메고 신호등을 건너는 남자 아이
붐비는 지하철 속으로 사람을 쑤셔 넣는 역무원
내 앞에서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20대 젊은 여자
빈 틈 없는 사이를 꿰뚫고 선반에 있는 무가지를 집어 드는 할아버지
앞 사람 무릎을 툭툭 치며 DMB를 보며 혼자 실실 웃는, 앉아 있는 30대 남자
무가지란 무가지는 모두 챙겨 지하로 빠져드는 50대 남자
초록불이 들어오면 쏜살같이 튀어 나가는 10대 아이
도시에는 온갖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이런 글을 썼다고 하자. 도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하자. 이 글에 대해 조선의 현명한 군주 중의 한 명이었던 정조는 어떤 평가를 할까. 정조에게 위와 같은 글을 ‘패관소품(稗官小品)’에 불과한 글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도시에 사람이 많다라고 한 줄만 쓰면 되는 것을”이라고 평했을 것이다.

패관소품이란 말 그대로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말한다. 패관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①옛날 임금이 민간(民間)의 풍속(風俗)이나 정사(政事)를 살피기 위(爲)해 가설항담을 모아 기록(記錄)시키던 벼슬아치 ②이야기를 짓는 사람을 말한다. ‘稗’는 벼에서 자라는 ‘피’를 말한다. 일종의 기생충이다.

소품은 말 그대로 ‘소설’이다.

구멍을 통해 바라본 관찰자의 시선, 이옥

설흔의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라는 책은 조선후기 문인이었던 이옥과 김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여기서 우선 검색의 도움을 받아보자.

이옥(李鈺)

1760(영조 36)~1812(순조 12).

조선 후기의 문인.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려 억압받고 불우하게 지냈다. 그러나 이단적인 문학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 한문단편에서는 박지원과 맞먹는 경지에 이르고, 민요시 개척에서는 정약용과 함께 가장 앞선 성과를 보여주어 한문학 혁신의 2가지 방향을 주도했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기상(其相), 호는 문무자(文無子)·매사(梅史)·매암(梅庵)·경금자(絅錦子)·화석자.

김려(金鑢)

1766(영조 42)~1822(순조 22).

조선 후기의 문인.

악부시의 대가였으며, 전이라고 빙자한 단편소설을 지어 불우한 인물의 행적을 서술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정(士精), 호는 담정(潭庭). 노론계 명문인 재칠(載七)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이천(姜彝天)의 비어사건(飛語事件)에 연좌되어 부령으로 유배당했고,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진해로 유배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만년에 아들의 노력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함양군수로 있다가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젊은 시절에 이옥(李鈺)·이안중(李安中) 등 진보적인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소품체(小品體) 문장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혔다. 10여 년 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이를 시로 표현했다

검색에 나타난 이옥과 김려를 보면 ‘패관소품’이란 글을 사랑한 나머지, 정조의 눈에 가시처럼 밟혀 제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한 이들이다. 설흔의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에는 이러한 정황에 그대로 나타난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라는 책은 이옥과 김려의 우정과 그들의 문학에 대한 집착, 사랑을 담고 있다. 철저한 관찰자의 입장과 세밀한 묘사가 이들 둘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다. ‘구멍을 통해 바라본 세상’에 대한 이옥의 관찰자 입장을 강조한다.

모름지기 소설은 ‘묘사의 맛’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는 듯,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 소설의 기본이다. 이런 ‘묘사’는 내가 직접 경험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에서 나온다.

1799년 이옥이 지은 <시기(市記)>라는 글을 인용해 본다.

소와 강아지를 몰고 오는 자, 두 마리 소를 끌고 오는 자, 닭을 안고 오는 자, 문어를 끌고 오는 자, 돼지의 네 다리를 묶어서 메고 오는 자, 청어를 묶어서 오는 자, 청어를 엮어서 늘어뜨려 가져오는 자, 북어를 안고 오는 자, 대구를 가져오는 자, 북어를 안고 대구나 혹 문어를 가지고 오는 자, 담배풀을 끼고 오는 자, 땔나무와 섶을 메고 오는 자, 누룩을 짊어지거나 혹 이고 오는 자, 쌀 주머니를 메고 오는 자, 곶감을 끼고 오는 자, 한 권의 종이를 끼고 오는 자, 접은 종이를 손에 들고 오는 자, 짚신을 늘어뜨려 들고 오는 자, 대광주리에 순무를 담아 오는 자, 새끼로 꼰 신발을 들고 오는 자, 큰 베를 끌고 오는 자, 목면포를 묶어서 휘두르며 오는 자, 자기를 끌어안고 오는 자, 분과 시루를 짊어지고 오는 자, 자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오는 자, 나무로 돼지고기를 꿰어 가지고 오는 자, 오른손으로 엿과 떡을 움켜쥐고 먹는 아이를 업고 오는 자....

자신의 집 문간방에서 구멍으로 바라본 시장 사람들에 대한 이옥의 묘사가 담겨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똑같은 인물은 하나도 없다. 지독한 관찰력과 세밀하면서도 세심한 묘사가 드러난다. 이 글을 만약 정조가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옥의 절친한 친구인 김려는 정조가 이옥의 <시기>를 읽었다면 다음과 같이 반응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임금이 읽었으면 분기탱천했을 발칙한 글이었다. 임금이 그토록 싫어했던 소설 문체가 제대로 발휘된 글이었다. 임금은 벌컥 화를 내며 종이를 집어 던지고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시장에 사람이 많다고 한 줄만 쓰면 그만인 것을. 쓸데없는 묘사에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다니, 글도 형편없지만 종이와 먹과 붓이 참으로 아깝구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서두에 적은 ‘남자, 아이, 여자’ 등등에서도 “도시에 사람이 참 많다”라고 적으면 될 것을, 종이와 붓이 아깝다라는 정조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이처럼 정조는 이옥에게 ‘패관소품’체의 문체를 고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옥은 따르지 않았고 정조는 끝내 이옥을 내팽개쳐 버린다.

정조에게 ‘구멍을 통해 바라보는 시선’은 소인배나 하는 짓거리로 치부됐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예전부터 사람들에게 가장 감명 깊고 피부 깊숙이 파고들었던 문학의 제일은 ‘패관소품’이었던 것을. 중세시대 민중들의 글 읽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먹고 살기 빠듯했고, 자유가 아닌 누군가에게 속박돼 있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에도 문학과 이야기는 있었다. 저녁에 두른 두른 둘러앉아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이 시대를 살고 위안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권력자의 신임보다는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나누었던 두 남자

이옥은 자신의 ‘패관소품’에 대한 집착 때문에 벗인 김려가 고초를 당했다고 자책한다. 김려는 위의 약력에서 보듯 ‘패관소품’의 빌미로 부령과 진해로 유배생활을 한다. 벗이 고통에 처하자 이옥은 김려 몰래 유배지인 부령과 진해로 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김려의 글을 모은다.

후에 이옥이 죽고 그의 아들 우태에 의해 이런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옥과 김려의 글은 조선후기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글들로 가득 차 있다. 이옥은 김려의 글 중에서 <방주의 노래>를 가장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총은 귀 기울려 이 말을 듣고
고개 들고 껄껄껄 웃어 보였네.
귀한 자는 조상 덕을 물려받고
천한 사람 복을 못 타 가난하지만
공평하고 변함없는 세상 이치야
모든 사람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
하건만 공연히 등급을 갈라
이 세상은 지옥처럼 되었소그려.
불행히도 주인님은 백정이 되어
저자에서 짐승 고기 각을 뜨지만
착한 분은 제 위치에 만족해하고
소인들은 요행수로 빠져나가지요.
어찌 알리까 지금의 푸줏간 일이
벼슬 사는 우리보다 저 좋을는지.
이 늙은이 천성이 고지식하여
시속에 휩쓸릴까 저어한다오.
저 싫으면 이웃 간 원수로 되고
마음 맞으면 딴 나라 사이도 혼사하오니
우리들 사이좋은 사돈 맺자면
말 몇 마디 약속하면 그만이지요.
가난한가 부유한가 물을 것 없고
양반이다 상민이다 따질 것 없소.
잘되는가 못되는가 앞날의 일은
저희들의 팔자에 매인 것이지
백 가지 중 사람 하나 똑똑하다면
그 나머지 탁할 일 무엇 있겠소.

김려가 진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겪었던 일을 적은 글이다. 내용인즉슨 백정의 딸이 군관의 아들과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하물며 백정의 딸과 군관의 아들이 결혼한다는 내용 자체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옥이나 김려는 정조의 신임을 버리는 대신, 사람이 사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조선의 백성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았다. 이들이 있어 조선시대의 정확한 실상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자신들의 글을 통해 시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그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다.

그들에게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라는 말은 그래서 한낱 빈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멋진 곳에 그들이 있었고, 멋지기 때문에 글을 쓰고, 멋진 곳에 놀러가고, 멋진 글을 통해 서로 교우했던 ‘멋진 친구’들이었다.

성석제 작가는 이 책의 서평을 통해 “김려가 있어서 이옥 또한 자신의 문학 세계를 더 그윽하고 높은 경지로 만들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친교 또한 이옥의 작품처럼 우리 문학에 내려진 축복이다.”라고 썼다.

김려가 없었다면 이옥의 글을 담은 <담정총서>는 물론, 이옥의 글이 후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려가 없었다면 그의 ‘멋진 글’이 사라졌을 것이다. 친구가 있어 아름답고, 친구가 있어 그의 글이 그윽한 향기로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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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임오년 세 남자…사도세자·정조 그리고 정약용
<사도세자의 고백>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임오년 1762년. 249년 전 그날 어떤 남자들의 운명이 있었던 것일까.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태어난다. 죽은 사람은 사도세자였으며 태어난 사람은 삼미자(三眉子) 정약용이었다. 임오년의 죽음과 탄생은 모두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태어난 정약용도 그 우연의 비극 때문이었을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다.

한 인간의 탄생은 우연과 필연이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역사를 보더라도 혹은 지금의 사회를 보더라도 개인의 능력만으로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능력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

이런 인간의 세상사를 이미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일까. “살아가는데 있어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정말이지, 사람을 잘 만나야 자신의 능력도 발휘하고 꿈도 실현할 수 있다.

사도세자는 사람을 잘못 만나게 되는 비운의 왕자였다. 물론 그의 책임이 아니다. 그가 태어났던 환경 자체가 그렇게 만들었다. 리더에게 중요한 덕목으로 세 가지가 있다. 집안 살림능력과 조직 장악능력, 그리고 역사인식.

이 세 가지를 골고루 갖췄을 때 한 리더는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다. 사도세자의 역사인식은 리더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권력 장악에서 그는 밀리고 만다. 당시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인간들이 문제였다.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이때 이복 동생 연잉군(영조)은 죽음의 두려움에 휩싸인다. 가뜩이나 무수리의 아들이란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던 연잉군은 곧 자신에게 죽음이 닥쳐올 것이라고 스스로 자책한다. 조선시대 왕위를 물려받은 왕자는 권력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왕자는 권력의 견제를 받으며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연잉군에게 구세주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노론세력이었다. 경종은 임금에 오르면서 노론의 집중 견제를 받는 운명이었다.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는 남인계열이었다. 노론에게 조선시대의 당파는 노론밖에 없었으며 다른 당파는 철저한 제거 대상이었다. 연잉군의 어머니 최씨는 노론 편이었다. 노론의 선택은 현재의 왕을 인정하지 않고 연잉군에게 물려주는 것만이 생존권을 보장받는 일이었다.

노론은 경종에게 후사가 없음을 계속 지적하면서 왕세제로 연잉군을 봉하라고 강요하다시피 한다. 노론의 전술과 전략에 따라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연잉군은 왕세제로 임명되고 얼마 뒤 경종은 병으로 승하한다. 독살설이 제기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연잉군, 영조는 노론의 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왕에 등극하게 한 세력은 노론이었으며 따라서 영조는 당파를 떠나 인재를 골고루 발탁하겠다는 ‘탕평책’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론의 왕’이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사도세자의 주변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해 사료를 통해 짚어보고 있다. 아버지 영조, 노론,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이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역사적 자료를 통해 살펴보는 책이다.

과연 사도세자는 광폭한 행동과 이해할 수 없는 정신병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그 시대, 여러 가지 사건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을까. 아버지인 영조와 노론 세력의 철저한 전략과 전술에 따라 노론과 맞서고자 한 사도세자의 운명은 이미 결정돼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의 권력자는 어떤 절차를 통해 정해졌을까.

조선시대 최고 권력자인 임금이 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왕과 신하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왕이 직접 후계자를 지목하는 경우(이것은 당연히 세습이다)와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의 경우가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왕권이 강력했기 때문에 왕이 세자를 선택(대부분 장자승계 원칙)했지만 후기 조선사회로 넘어오면서 신권이 강력해 지면서 신하가 왕을 선택하는 택군의 시대로 접어든다. 영조도 자신 스스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노론 세력이 그를 왕으로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따라서 당시 노론 세력에 맞선 사도세자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될 확률은 낮았다. 아니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거대상 1호였다.

사도세자는 그렇게 노론 세력에 저항하다 노론 세력에 의해 제거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것이 임오년, 1762년이었다.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 또한 우연이었다.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여러 해 동안 공부하면서 반제(泮製. 정기적으로 보는 성균관 시험)에 매번 수석을 차지했다. 반제에 1등을 하게 되면 왕을 직접 접견한다. 여러 번 정조를 만났다. 그러나 유독 과거와는 인연이 없었다. 예컨대 학교 시험은 매번 1등을 하지만 학력고사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그렇게 정조를 몇 번 만나던 어느 날, 정조가 정약용에게 애처롭게 묻는다.

“몇 년 생인고?”

정조의 이 물음은 나이가 이제 제법 되었을 텐데 아직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있느냐는 질책성 의미도 섞여 있었다.

그것을 모르니 없는 정약용은 맥없이 대답한다.

“임오년생이옵니다.”

정약용의 대답에 정조와 정약용 둘 다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정약용은 ‘아차’ 싶었다. 정약용도 ‘임오년’이 어떤 해였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약용이 그러할 진대 정조는 오죽했을까. 정조와 정약용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임오년! 정조에게 임오년은 잊을 수 없는 해였다.

정조는 정약용의 ‘임오년’이란 대답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렇게 정조와 정약용의 필연과 우연은 ‘임오년’을 계기로 서로의 기억 속에 각인된다. 이후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 아래 차근차근 학문의 길을 걷게 된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에서부터 그의 주변 인물들에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약용의 비극은 아마도 천주교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승훈과 이벽 등 정약용의 주변에는 천주교와 큰 인연이 있다. 그 중에는 황사영도 있다.

18년 동안 유배의 길에 오른 것도 천주교가 시작이었다. 당시 천주교는 서학이란 이름으로 철저한 배격 대상이었다. 노론 세력에게 천주교는 그 이념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천주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싫었다. 따라서 천주교가 어떤 학문이든 그것은 탄압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정약용은 앞서 언급했듯이 ‘임오년’의 인연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게 되고, 물론 그의 능력이 뒤따랐기 때문, 정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한다. 한 때 잠깐 귀양(정조의 의도적인 견책)을 가던 중 온양을 통과한다.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요양을 위해 온양온천에 행궁을 한 적이 있음을 기억하고 당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촌부에게 묻는다. 당시 사도세자 행차를 직접 목격한 촌부의 일화는 사도세자의 인간성을 엿보기에 충분했다. 촌부의 말을 옮겨보자.

“저하(사도세자)의 행렬이 이곳에 이르고 잠시 쉬는 사이 군마들이 수박밭을 짓밟으면서 수박밭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때 저하께서는 수박밭의 주인들을 모두 불러 보상금을 일일이 지급하고 깨진 수박은 거둬 목마른 병사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정약용은 그 말을 듣고 이보다 더 현명한 군주는 없었을 것이라고 감동을 받는다. “피해를 본 주인들에게는 돈으로 보상하고, 또 목마른 병사들에게 수박을 나눠줌으로써 갈증을 해소하고, 아무도 피해를 보지 않고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한 사도세자의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판단한다.

그런 현명한, 현명했을 사도세자는 지금 가고 없는 상황, 정약용의 가슴으로 허허로운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임오년의 세 남자.

사도세자와 정조 그리고 정약용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정조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한마디로 자신의 정체성을 대내외에 공표한다.

“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보다 저 명확한 자기 정체성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명확히 한 셈이다. 노론의 공포심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 이제 그의 아들이 권력자가 되었고, 취임하는 날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포하는 정조! 노론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한 정조는 사도세자의 복위에 온 힘을 바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는 일을 꼽았다. 책임자로 정조는 정약용을 임명했다. 임오년의 세 남자가 다시 뭉칠 수밖에 없었다.

정약용은 화성신도시를 만들면서 기중기 등 첨단 기계를 만들어 백성들이 쉽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한강 배다리이다. 수십 척의 배를 서로 묶어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위대한 작업! 수원 화성으로 갈 수 있도록 만든 배다리!

이 배다리야 말로 임오년 세 남자의 걸작품이 아닐 수 없다.

한을 품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남자, 사도세자!

아비 사도세자의 죽음을 바로 앞에서 목격하면서도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했던 남자, 정조!

사도세자와 정조의 비극을 온 몸으로 체득했던 남자, 정약용!

임오년 세 남자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 바로 한강 ‘배다리’였다. 그 배다리는 사도세자와 정조, 정약용을 맺어주는 상징이자 실체였다.

배다리를 만들며 정약용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약용이 만든 배다리를 건너는 정조의 감격은 어떠했을까.

마침내 경기도 화성으로 안식의 터를 잡은 사도세자의 넋은 위로를 받았을까.

<사도세자의 고백>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를 쓴 이덕일 교수의 책을 개인적으로 참 많이 읽었다. <송시열과 그의 나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조선선비 살해사건>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등은 읽는 재미와 함께 또 다른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였다.

이덕일 교수의 책은 읽기에 참 편하다. 아마도 그것은 역사적 자료의 충분한 근거와 다양한 시각을 담은 노력 탓이지 않을까 싶다. 문체도 일반 역사서와는 차별 점을 두고 있다.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수필을 읽는 듯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이덕일 역사서’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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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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