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민 2명 중의 1명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자신의 지위가 중하층이라고 생각하는 발표가 16일 있었다. 또 소득과 교육 수준에 따라 차별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시가 15세 이상 서울시민 4만5천60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이다. 

 

중요한 몇개의 내용을 보면 먼저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원인으로는 소득 수준(58.2%)이 가장 높았다. 다음으로 교육수준(50.1%), 직업(41.2%), 외모(13.2%), 나이(10.8%) 등의 순으로 차별을 받는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52.6%가 부채, 즉 빚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는 전년(2010년)보다 7.6% 늘어난 수치이다.

 

2011년의 조사를 보면 결과적으로 2010년보다 좋아지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악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을 중하층이라고 생각하는 수치도 2008년(49%) 이후 매년 증가해 2011년 51.7%를 기록했다.

 

왜? 굳이 서울

 

네티즌들의 의견을 보면 대부분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왜 굳이 서울을 고집할까?"를 강조하고 있다. 지방에 있는 네티즌들의 의견도 있었지만 서울에 살고 있는 네티즌들 역시 '왜? 서울?'이라고 되묻고 있다. 자신 스스로 서울에 버티고 있으면서. 의식은 탈(脫) 서울을 생각하지만 몸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소득수준에 따라 차별받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지적은 이제 식상한 해설이 돼 버렸다.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주관적 관찰이다. 짧은 출근시간에 잠을 자는 모습,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두드리면서 지루한 터널에 갇혀있는 자신을 방치하는 모습...엄마 손을 잡고 학교를 가는 아이의 모습도 지쳐 보였다.

 

나도 이 사회에 지쳐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의식은 늘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지만 몸은 따라가지 못한다. 의식은 언제나 약자를 고려해야 된다 생각지만 몸은 내 보신을 위해 움직인다. 의식을 항상 돈으로부터 자유롭다 하지만 몸은 매달 돌아오는 채무 상환으로 벌벌 떠는 지경이다.

 

이런 모습이 현재 서울시를 달리고 있는 자동차 안에서, 지하철 속에서, 버스 창밖을 바라보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에서 느껴진다는 것이다. 2명중 1명이 중하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조사결과가 아니라 현실로,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귀농귀촌인구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나라에서 귀농귀촌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우선 귀농부터 따져보자. 귀농은 말그대로 도시를 포기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 시골로 간다는 의미이다. 농사가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근본이었지만, 지금의 농촌현실은 '농사'가 아니라 '부동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귀농을 하려고 땅이 필요하다. 왠만한 지역에 땅을 구입하려고 하면 억대의 돈을 들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미 대한민국 전체 땅이 부동산의 거친 입김으로 값이 치솟아 있기 때문이다. 산간벽지가 아니고서야 농사지을 땅을 싼값으로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땅을 산다고 해도,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정착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하다. 혼자이면 모르겠지만 가정이 있는 가장이라면 귀농은 어쩌면 '화려한 노후'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땅을 살 돈이 충분하고, 그곳에서 나오는 작물이 팔리든 안팔리든 돈에 구애받지 않는 상황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귀촌은 어떤가. 귀촌은 시골에 삶의 터전을 두고 있지만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도시에 직장을 둔 사람들을 말한다. 전원주택 생활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도시의 삶에 지친 이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다. 나도 그 중 한명이지만.

 

이 또한 녹녹치 않다. 서울에 출근하기 위해서 제주도에 살수는 없다. 즉 가까운 도시로 출근하기 위해서는 도시 주변의 시골을 터전으로 잡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디 한번 작정하고 둘러보시라. 도시 근처의 전원주택들이 어느 정도의 가격인지. 

 

주택을 구입했다 하더라도 도시로 출퇴근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하루에 4~5시간을 들여 출퇴근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지쳐 나가떨어지게 마련이다. 몸이 지치면 의식도 지친다. 귀농귀촌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현실이 돼 버렸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답은 없다. 스스로 찾을 수밖에.

 

슈마허의 <자발적 가난>과 스코트·헬렌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이 답이 될 수 있을까.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이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숙제일 것이다. 돈을 억수로(?) 많이 벌어 자본으로부터 구속받지 않거나, 그렇지 않다면 자본으로부터 독립해 스스로의 가난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답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역시 의식으로는 충분히 인식되지만 몸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의식으로는 당장 그렇게 하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비극일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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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며칠 전이었다. 깊은 어둠으로 떨어지듯 닿은 국회의사당역은 환한 밝음으로 많은 사람을 맞았다. 9호선은 유독 다른 지하철과 달리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지하철은 긴 터널을 유유히 달렸다. 몇몇 역을 지나고 안내방송에서 '다음 역은 샛강역입니다.'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샛강?'

매번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오늘따라 '샛강'이란 목소리와 단어가 귀를 자극한다.

'그래, 예전 내가 살던 곳에도 샛강이 흘렀지. 여름이면 멱을 감고, 겨울이면 썰매를 타고, 봄이면 온갖 이름 모를 꽃들이 피었지. 여름방학이면 조무래기들이 소를 끌고 나와 꼴을 먹이곤 했지.'

정지용의 <향수>가 떠오른 것도 내 유년 시절 기억 한 귀퉁이에서부터 나왔다. 정지용 시인은 노래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 대는/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의 시는 모두 '과거 시재'를 쓰고 있다. '지즐 대는' '그리워' '줍던 곳' 등등. 우리에게 낯익은 풍경이 스쳐 떠오르지만 이제 그런 곳은 없다는, 진한 향수가 코 끝으로 밀려든다.

생산↔소비의 피폭시대

꽃이 피고, 옛 이야기 지즐대는 '그곳'은 과거의 추억이 돼 버렸다. 많은 도시인들은  주말이면 도시를 빠져나간다. 하루 정도 도시를 벗어난 사람들은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신을 버리기에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생산과 소비가 삶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생산하지 않고, 소비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도시화 시대에 우리는 서 있다.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은 도시를 벗어나고 싶지만 끝내 되돌아오는, 도시에서 삶을 마감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담았다.

소설은 쓰레기 처리장인 '꽃섬'이 주무대이다. 그렇고 그런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꽃섬' 오두막 동네는 버려진 각목과 판자, 깔판으로 집을 뚜딱뚜딱 만든다. 구역별로 나눠 쓰레기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재활용품을 모아, 이를 되판다. 그 돈으로 '꽃섬'의 식구들은 하루를 일하고 하루를 먹고 산다.

열넷(하지만 자신은 열여섯이라 말한다)살 '딱부리'도 시장 통에서 행상을 하던 어머니를 따라 이곳에 왔다. 딱부리의 아버지는 새 사람이 되기 위해 군인에 의해 어딘가로 끌려갔다. 이런 내용을 유추해 보면 <낯익은 세상>은 198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딱부리의 삶은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흘러간다. 그곳에서 아수라 반장(특정 구역을 책임지고 있는 반장)과 어머니가 살림을 합치지만, 딱부리에게 떨어진 것은 '땜통'이라는 ,약간은 부족한 아수라반장의 아들, 동생 한 명 뿐이다.

<낯익은 세상>은 딱부리와 땜통의 성장 소설이자, 생산과 소비의 피폭시대를 담고 있다. 

같은 공간이지만 전혀 다른, 현실↔김서방네  

딱부리와 땜통이 자주 찾아가는 '빼빼 엄마'의 집은 성장하는 소년들의 두 가지 세상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상처 받은, 혹은 세상에서 버려진 개들을 키우는 '빼빼 엄마'는 빙의(영혼이 옮겨 붙는 현상)를 받은 사람이다.

그녀는 언제나 현실과 김 서방네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온갖 쓰레기와 그곳에서 버려진 것을 찾아 재활용하는 현실의 '꽃섬' 사람들과 '꽃섬'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곳에서 살다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김 서방네'의 예전 '꽃섬'은 같은 위치에 있지만 완전히 다른 공간을 보여준다.

딱부리와 땜통은 빼빼엄마의 빙의로 예전의 꽃섬을 본다.

현실의 꽃섬은 파리떼가 우글거리고 덤프트럭이 온갖 허접 쓰레기를 버리면 작업반원들이 구역별로 우르르 떼거지로 몰려 깡통과 옷가지와 종이를 집어 올린다. 그게 현실이고 딱부리의 인생이다.

그러나 쓰레기 장이 들어서기 전의 꽃섬은 그렇지 않았다. <낯익은 세상>의 낯익으면서도 낯선 꽃섬과 만나는 것은 그래서 더욱 가슴을 울린다. 

딱부리와 땜통이 찾아간 예전의 꽃섬, 김 서방네의 꽃섬은 어땠을까. 소설은 이렇게 묘사한다.

"한가운데 숲이 우거지고 나직한 산도 있는 이웃 섬이 보였고 돛을 단 조각배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강변 풀밭에는 송아지를 거느린 어미 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풀꽃이 가득 피어난 강가에는 오리가 날아 앉거나 물장난을 치는 게 보였다."

내가 살던 그 예전의 '샛강'이 있는 마을과 정지용이 노래한 '향수'의 옥천이나, 딱부리와 땜통이 경험한 예전의 '꽃섬'. 과거의 모습이 됐고, 돌이킬 수 없는 현실 앞에 그리움의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다.

낯익음↔낯섦

<낯익은 세상>은 열 넷의 딱부리 눈으로, 딱부리 인생으로 바라본 현실을 그린 소설이다. 황석영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자본주의는 세계의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자본주의를 인정한 셈이다.

<낯익은 세상>은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쉽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그 배경으로는 누구나 경험했을, 혹은 누구나 생각했을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석영 작가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내가 도시 외곽의 쓰레기장에 주목한 것은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의 삶이 끝없이 만들어서 쓰고 버리는 욕망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는 삶의 목적이 되었고 온 세계가 그것을 위하여 모든 역량과 꿈까지도 탕진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풍경은 세계의 여느 도시 외곽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매우 낯익은 세상이다."

작가의 말처럼 <낯익은 세상>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지속적으로 '낯익은 세상'과 만난다.   난지도와 같은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가 없어졌지만 지금도 우리는 쓰고 버리고, 재생하고...쓰고 버리고....또 재생하고. 자본주의의 생산과 소비는 끝없이 이어진다.

황석영 작가의 말처럼 '자본주의는 세계의 운명'이 된 걸까.

최근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 간단한 두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는 세계의 운명'이 아닐 수도 있다. 자본주의를 버리고 떠나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이라 함은 자기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자발적'이란 말에는 자본주의 현실과 싸우겠다는, 혹은 자본주의 현실을 버리겠다는 적극적 의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자본주의가 과연 세계의 운명'이 돼 버렸는지는 좀 더 생각해 볼 일이다.

'가난'이란 말을 보면 더욱 자본주의에 대항한다는 의미가 크다. 생산과 소비에서 풍족한 소비를 꿈꾸는 현대인들과 달리 이들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생산과 소비의 쳇바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기본이기 때문에 '가난'이라는 말 자체는 정반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것은 자본주의와 투쟁한다는 의미로 읽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라는 소설의 박범신 작가의 말이 언뜻 떠오른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이 문명에서 그나마 오래 살려면 인간다운 정서를 가급적 버리는 게 좋다."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해 보면 어떨까. "자본주의에서 그나마 오래 살려면 자본주의 습성을 가급적 버리는 게 좋다"라고.

우리에게 '낯익은 세상'은 과연 무엇일까.

끝없이 생산과 소비라는 쳇바퀴에서 숨 쉴 틈 없이 살아가는 현실인가. 아니면 이제는 잃어버린, 가족과 이웃이 있었고 들꽃과 돛단배가 유유히 거닐던 조금은 가난했지만 소박했던 그런 모습인가.   

두 가지 모두 우리에게 '낯익은 세상'이자 혹은 '낯선 모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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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자발적 가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자발적 가난'은 부러움과 현실 불가능의 경계점에 있다. 21세기 들어 이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직접 실천에 나서는 사람도 많다. 지리산으로, 혹은 산골로 숨어들며(?) 현대 문명과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자연으로 들어간다.

현대인들은 '자발적 가난'이란 단어 앞에 멈칫한다. 나도 그러고 싶다는 '부러움'과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자괴감'이 동시에 밀려오기 때문이다. '부러움'과 '자괴감'의 갈등 속에서 어느 것 하나 결정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사람이 많다.

21세기 새로운 눈의 탄생

현대 과학문명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는 게 사실이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성장과 분배'라는 잣대를 들고 옥신각신하는 것도 어쩌면 현대 과학문명이 벌여놓은 결과물일지 모른다.

한국 사회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성장과 분배의 갈등 속에서 골이 깊어가고 있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강요하고 있는 자본주의 성장에는 과학문명의 발전이 그 밑거름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출간된 <제3의 눈-시선의 변화와 문명의 대전환>이란 책은 21세기 '새로운 눈의 탄생'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현재의 과학혁명을 '시선의 변화' 나아가 '새로운 눈의 탄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선의 변화'는 관점의 변화가 아닌 '세상을 보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자본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종합적, 입체적으로 판단하는 '크로스오버적 시각'을 주문한다.

김제동의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에서 정재승 과학자 인터뷰가 있다. 정 교수는 과학이 가지는 기본적 속성을 말하면서 이제 시각을 바꿀 때라고 강조한다.

"과학기술은 인간적 가치를 높이는 기술, 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것에 기여해야 한다. 질주하는 과학을 멈출 수 없으니까, 질주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평면시에서 입체시로, 문명을 만든 시선

5만5천 년 전 원숭이 조상 카르폴레스테스의 눈은 얼굴 옆면에 위치해 있었다. 이 눈은 몸의 뒤쪽까지 볼 정도로 넓은 지역을 감시해 포식자들을 피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거리 감각이 없는 2차원적 '평면시(平面視)'였다.

이후 500만 년이 흐르자 원숭이 조상의 눈 위치에 변화가 생긴다. 두 눈이 얼굴 앞면으로 모아진 이 원숭이 조상의 이름은 쇼쇼니우스로, 눈이 감지하는 전체 시계(視界)는 좁아진 반면 거리와 입체 감각이 두드러지게 진화한 '입체시’(立體視)'를 갖게 된다.

이로부터 세상은 존재감을 갖는 '있음'으로 이뤄지게 됐다. 3천300만 년 전 지구에 한랭화가 불어 닥쳤을 때 등장한 카토피테쿠스라는 원숭이는 줄어든 먹이를 더 잘 찾기 위해 빛을 느끼는 시세포 수를 늘린다. 이에 따라 '중심와(中心窩, 망막중의 뒤쪽의 빛이 들어와서 초점을 맺는 부위))'와 안구 방이 만들어지면서 영장류의 시선은 비로소 안정된 영상을 얻게 됐다.

안정된 영상을 볼 수 있는 시선이 만들어지면서 인간은 '있음↔없음' '확실성↔불확실성' '나↔너' '물체↔정신' 등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제3의 시선>은 분석하고 있다.

안정된 시선과 이분법적 세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끝없는 과학문명에 대한 집착을 강화했다. 과학문명은 브레이크 없이 질주했고 무분별한 약탈과 제국주의 침탈, 물질만능주의 조차 정당화됐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질주하던 과학으로 인한 부작용 앞에 놓여 있다. 지구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이상기후라는 신호로 끊임없이 인간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고, 이런 부작용은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제 3의 눈…>은 시선의 변화를 주문하고 있다. 눈에 맺히는 있음과 눈에 맺히지 않는 없음의 존재를 통틀어 사고하는 자세. 물리학과 동양사상, 과학과 종교를 아우르면서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자각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지은이 김용호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신화, 이야기를 시작하다> <세계화 시대의 공력 쌓기> <네 안의 가능성을 찾아라> <나를 찾기 위해 인도에 왔다> 등의 책을 출간했다.

책 속 저자의 말이 하나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자기 안에 있는 특수성과 보편성을 결합해 낼 때 한국 문화가 새로운 문명의 창조에 기여할 바는 적지 않을 것이다."

장르: 인문/사회
저자: 김용호
출판사: 돌베개
가격: 1만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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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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