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다. 명절에는 가족이 모이는 날이다. 떨어져 있던 친족들이 모이고 자연스럽게 이야기꽃이 핀다. 이번 추석에는 어떤 이야기가 중심을 이룰까. 아마도 대한민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민주주의는 정당정치가 기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당들에 실망한 분들이 많다. 대놓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자(者)가 그 자(者)라고.” 여당과 야당이 있지만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노라고. 선거 때만 되면 고민된다고. 찍을 자(者)가 없다고.

그런데 올 추석을 며칠 앞두고 변화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시민단체 대표주자인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안철수 서울대 교수가 불러일으킨 회오리가 크게 불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치권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이 바람은 과연 왜 불고 있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친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윤휴

조선 효종과 현종, 숙종 대를 살았던 윤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덕일의 <윤휴와 침묵의 제국>은 당시 상황을 객관적 사료로 조망하면서 윤휴라는 인물의 종합적 평가에 나섰다. 윤휴는 오랫동안 ‘사문난적(성리학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있던 인물이었다.

과연 그럴까.

윤휴는 효종과 현종이 여러 번 벼슬에 나오라고 강권했지만 한 번도 나선 적이 없었다. 그는 고향에서 책을 읽고 학문에만 매진했다. 여러 책을 편견 없이 독파하다 보니 자신만의 사고 시스템이 생겼다.

윤휴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부분은 ‘백성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다. 윤휴는 먼저 <예기> 42편에 나오는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이라는 문구를 인용했다.

이 한자는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과 친한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이름에 있다.”는 뜻이다.

윤휴는 “<예기> 42편의 ‘백성과 친하다(親民)’를 주자 학자들이 신민(新民)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지적했다. 본래의 의미를 왜곡했다는 주장이었다. ‘신민’은 백성을 교화해 새롭게 한다는 의미이지만 ‘친민’은 백성과 친하다는 뜻으로 백성이 ‘천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백성을 ‘신민’의 관점으로 바라보던 조선의 주자 학자들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다. 신분의 차이가 엄격하며 백성들은 사대부를 위해 존재한다는 우월적 관점이다.

반면 윤휴는 백성은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천하’라고 여겼다. 자신과 백성 사이에 계급적 차별이 없으며 백성은 정성과 신의가 있다고 여겼다.

윤휴의 대개혁…지패법과 호포법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조선의 가장 큰 문제는 민생 파탄이었다. 지금 대한민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가계대출은 폭증하고 있고, 물가는 치솟고, 청년실업은 끝을 보이지 않고 있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폭증하고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큰 전쟁을 겪으면서 백성들이 내야 하는 세금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양란을 겪으면서 돈이 있는 양민들이 돈으로 양반을 사면서 세금을 내는 일반 백성들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세금의 양은 늘고 세금 내는 백성은 줄어들었으니 세금의 몫이 두 배로 증가했다. 세금을 피해 도망가거나 유랑민이 되는 게 오히려 나았다. 아니면 산골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든가. 나라가 있는 게 오히려 더 힘든 폭정의 시대였다.

효종과 현종 때 끝내 벼슬길에 나서기를 거부한 윤휴는 마침내 숙종 1년에 궁궐로 들어간다. 윤휴의 대개혁이 시작됐다.

윤휴가 내놓은 개혁 법안은 지패법과 호포법이었다.

조선은 신분의 차이에 따라 재질이 다른 나무에 신분을 적은 호패법을 쓰고 있었다. 나무 재질에 따라 신분이 확연히 구분됐다. 윤휴는 이 호패법을 없애고 지패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패법은 신분에 구별 없이 종이로 만든 신분증 제도를 실시하자는 것. 지금으로 따진다면 주민등록증과 같은 개념이다.

사대부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했다.

윤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호포법 개혁에도 나섰다. 세금을 내지 않던 양반들에게도 군포(군역에 대한 세금)를 받자는 것이었다. 양반의 인구를 정확히 계산해 세금을 부과하자는 대개혁적인 발상이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윤휴의 개혁 법안은 피폐된 삶을 되살리고 신분의 차별을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민생법안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권력을 쥐고 있던 사대부들은 달랐다.

윤휴의 개혁안에 대해 당시 사관(史官)들 조차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사관은 지금으로 따지면 언론사 기자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이다. 사관들은 기사를 통해 “지패를 만들어 작은 주머니에 차니, 이때 사람들이 ‘소낭패(작은 주머니에 찬 지패)’가 ‘대낭패(아주 난감한 상황)’라고 말했다.”고 이죽거렸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백성이 흉년으로 굶주리는데 주구(관청에서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것)를 더하고 밀속(비밀 단속)을 보태서 백성들의 원성이 길에 가득했지만 윤휴의 당은 이를 ‘기뻐하면서 북치고 춤춘다’고 일컬었다.”라고 비아냥거렸다.

정론직필의 역할을 맡은 사관조차 윤휴의 개혁안에 왜곡된 여론을 이용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덕일 교수는 “숙종 때의 사관들은 서인(노론) 당론을 따르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른바 춘추의 붓을 가졌다는 사관들의 시각이 이 정도였다.”고 분석했다.

지금과 다를 것이 없다. 대한민국의 몇몇 언론사들은 민심과 민의보다는 특정 집단의 이해를 대변하고 심지어 사실을 왜곡해 자신들만의 특권을 맘껏 누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국민(백성)은 여전히 ‘신민’, 즉 교화의 대상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덕일 교수는 <윤휴와 침묵의 시대>를 통해 윤휴가 살았던 시대는 “나라보다 당이 중시되는 시대, 군부보다 당수가 중시되는 시대였다.”고 평가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투표에서 참패한 뒤 곧바로 사퇴한 것을 두고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당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당이 우선시되는 시대는 지금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덕일 교수는 개혁가 윤휴의 모습을 두고 “당시 사대부들은 어떤 지탄을 받아도 계급적 특권을 내려놓을 생각은 없었다. 언행일치와 지행합일을 추구하던 윤휴 같은 사대부는 소수였다.”고 지적했다.

시대는 윤휴에게 더욱 안 좋은 상황으로 치달았다.

숙종 6년 윤휴가 속해 있었던 남인 정권이 몰락하고 서인 정권이 재집권한다. 이때부터 청남(남인의 한 파)에 속해 있었던 윤휴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된다. 끝내는 ‘사문난적(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으로 지목돼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역사에서 거론되지 않을 만큼 핍박을 받았다.

윤휴 “백성은 신령하고 신의가 있다

윤휴의 백성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실록 기록들이 많다. 그 중 한 문장을 보자. 윤휴는 숙종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신이 일찍이 생각하기를 지금 사대부들은 그 마음속에 이해가 엇갈리고 보고 들은 것이 지식을 가리기 때문에 의논이나 행동이 본심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민들은 비록 무식해도 하늘이 부여한 성품이 어줍지 않아 지극히 어리석은 듯 하면서도 신령하고 정성을 다하면서 신의가 있습니다.”

윤휴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대부 보다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런 윤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 역사는 그렇게 조금씩 퇴보하고 있었다.

윤휴는 답답한 자신의 마음을 시로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 삼막사 망해루에 올라 시를 읊었다.

“푸른 산에 찬 기운 일어 망해루에 바람이 거세고/강구름이 비를 불러 해는 모래톱으로 사라지네/이때에 높이 올라 바라보는 것도 우연한 충성인데/눈 들어 산하를 보니 시름을 이길 수 없도다.”

바람도 거세고, 해는 사라져 버리고, 시름을 이길 수 없다던 윤휴! 그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다.

윤휴의 개혁안이 좌절되면서 조선 역사는 퇴보하고 ‘침묵의 제국’으로 걸어들어 갔다. 사대부만의 나라, 사대부만의 권력, 사대부만의 정치가 조선후기 사회를 움직였다. 백성은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는 과연 얼마나 다를까.

박원순 이사와 안철수 교수가 불러온 회오리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두 사람이 불러일으킨 회오리는 거센 물결로 계속 뻗어나가고 있다.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 있는 해이다.

‘언행일치와 지행합일을 추구하던 윤휴 같은’이라는 책 속의 문구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 박원순과 안철수에게서 국민들은 그런 문구를 떠올렸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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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임오년 세 남자…사도세자·정조 그리고 정약용
<사도세자의 고백>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임오년 1762년. 249년 전 그날 어떤 남자들의 운명이 있었던 것일까.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태어난다. 죽은 사람은 사도세자였으며 태어난 사람은 삼미자(三眉子) 정약용이었다. 임오년의 죽음과 탄생은 모두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태어난 정약용도 그 우연의 비극 때문이었을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다.

한 인간의 탄생은 우연과 필연이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역사를 보더라도 혹은 지금의 사회를 보더라도 개인의 능력만으로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능력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

이런 인간의 세상사를 이미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일까. “살아가는데 있어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정말이지, 사람을 잘 만나야 자신의 능력도 발휘하고 꿈도 실현할 수 있다.

사도세자는 사람을 잘못 만나게 되는 비운의 왕자였다. 물론 그의 책임이 아니다. 그가 태어났던 환경 자체가 그렇게 만들었다. 리더에게 중요한 덕목으로 세 가지가 있다. 집안 살림능력과 조직 장악능력, 그리고 역사인식.

이 세 가지를 골고루 갖췄을 때 한 리더는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다. 사도세자의 역사인식은 리더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권력 장악에서 그는 밀리고 만다. 당시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인간들이 문제였다.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이때 이복 동생 연잉군(영조)은 죽음의 두려움에 휩싸인다. 가뜩이나 무수리의 아들이란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던 연잉군은 곧 자신에게 죽음이 닥쳐올 것이라고 스스로 자책한다. 조선시대 왕위를 물려받은 왕자는 권력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왕자는 권력의 견제를 받으며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연잉군에게 구세주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노론세력이었다. 경종은 임금에 오르면서 노론의 집중 견제를 받는 운명이었다.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는 남인계열이었다. 노론에게 조선시대의 당파는 노론밖에 없었으며 다른 당파는 철저한 제거 대상이었다. 연잉군의 어머니 최씨는 노론 편이었다. 노론의 선택은 현재의 왕을 인정하지 않고 연잉군에게 물려주는 것만이 생존권을 보장받는 일이었다.

노론은 경종에게 후사가 없음을 계속 지적하면서 왕세제로 연잉군을 봉하라고 강요하다시피 한다. 노론의 전술과 전략에 따라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연잉군은 왕세제로 임명되고 얼마 뒤 경종은 병으로 승하한다. 독살설이 제기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연잉군, 영조는 노론의 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왕에 등극하게 한 세력은 노론이었으며 따라서 영조는 당파를 떠나 인재를 골고루 발탁하겠다는 ‘탕평책’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론의 왕’이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사도세자의 주변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해 사료를 통해 짚어보고 있다. 아버지 영조, 노론,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이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역사적 자료를 통해 살펴보는 책이다.

과연 사도세자는 광폭한 행동과 이해할 수 없는 정신병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그 시대, 여러 가지 사건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을까. 아버지인 영조와 노론 세력의 철저한 전략과 전술에 따라 노론과 맞서고자 한 사도세자의 운명은 이미 결정돼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의 권력자는 어떤 절차를 통해 정해졌을까.

조선시대 최고 권력자인 임금이 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왕과 신하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왕이 직접 후계자를 지목하는 경우(이것은 당연히 세습이다)와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의 경우가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왕권이 강력했기 때문에 왕이 세자를 선택(대부분 장자승계 원칙)했지만 후기 조선사회로 넘어오면서 신권이 강력해 지면서 신하가 왕을 선택하는 택군의 시대로 접어든다. 영조도 자신 스스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노론 세력이 그를 왕으로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따라서 당시 노론 세력에 맞선 사도세자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될 확률은 낮았다. 아니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거대상 1호였다.

사도세자는 그렇게 노론 세력에 저항하다 노론 세력에 의해 제거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것이 임오년, 1762년이었다.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 또한 우연이었다.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여러 해 동안 공부하면서 반제(泮製. 정기적으로 보는 성균관 시험)에 매번 수석을 차지했다. 반제에 1등을 하게 되면 왕을 직접 접견한다. 여러 번 정조를 만났다. 그러나 유독 과거와는 인연이 없었다. 예컨대 학교 시험은 매번 1등을 하지만 학력고사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그렇게 정조를 몇 번 만나던 어느 날, 정조가 정약용에게 애처롭게 묻는다.

“몇 년 생인고?”

정조의 이 물음은 나이가 이제 제법 되었을 텐데 아직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있느냐는 질책성 의미도 섞여 있었다.

그것을 모르니 없는 정약용은 맥없이 대답한다.

“임오년생이옵니다.”

정약용의 대답에 정조와 정약용 둘 다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정약용은 ‘아차’ 싶었다. 정약용도 ‘임오년’이 어떤 해였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약용이 그러할 진대 정조는 오죽했을까. 정조와 정약용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임오년! 정조에게 임오년은 잊을 수 없는 해였다.

정조는 정약용의 ‘임오년’이란 대답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렇게 정조와 정약용의 필연과 우연은 ‘임오년’을 계기로 서로의 기억 속에 각인된다. 이후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 아래 차근차근 학문의 길을 걷게 된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에서부터 그의 주변 인물들에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약용의 비극은 아마도 천주교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승훈과 이벽 등 정약용의 주변에는 천주교와 큰 인연이 있다. 그 중에는 황사영도 있다.

18년 동안 유배의 길에 오른 것도 천주교가 시작이었다. 당시 천주교는 서학이란 이름으로 철저한 배격 대상이었다. 노론 세력에게 천주교는 그 이념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천주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싫었다. 따라서 천주교가 어떤 학문이든 그것은 탄압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정약용은 앞서 언급했듯이 ‘임오년’의 인연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게 되고, 물론 그의 능력이 뒤따랐기 때문, 정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한다. 한 때 잠깐 귀양(정조의 의도적인 견책)을 가던 중 온양을 통과한다.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요양을 위해 온양온천에 행궁을 한 적이 있음을 기억하고 당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촌부에게 묻는다. 당시 사도세자 행차를 직접 목격한 촌부의 일화는 사도세자의 인간성을 엿보기에 충분했다. 촌부의 말을 옮겨보자.

“저하(사도세자)의 행렬이 이곳에 이르고 잠시 쉬는 사이 군마들이 수박밭을 짓밟으면서 수박밭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때 저하께서는 수박밭의 주인들을 모두 불러 보상금을 일일이 지급하고 깨진 수박은 거둬 목마른 병사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정약용은 그 말을 듣고 이보다 더 현명한 군주는 없었을 것이라고 감동을 받는다. “피해를 본 주인들에게는 돈으로 보상하고, 또 목마른 병사들에게 수박을 나눠줌으로써 갈증을 해소하고, 아무도 피해를 보지 않고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한 사도세자의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판단한다.

그런 현명한, 현명했을 사도세자는 지금 가고 없는 상황, 정약용의 가슴으로 허허로운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임오년의 세 남자.

사도세자와 정조 그리고 정약용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정조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한마디로 자신의 정체성을 대내외에 공표한다.

“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보다 저 명확한 자기 정체성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명확히 한 셈이다. 노론의 공포심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 이제 그의 아들이 권력자가 되었고, 취임하는 날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포하는 정조! 노론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한 정조는 사도세자의 복위에 온 힘을 바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는 일을 꼽았다. 책임자로 정조는 정약용을 임명했다. 임오년의 세 남자가 다시 뭉칠 수밖에 없었다.

정약용은 화성신도시를 만들면서 기중기 등 첨단 기계를 만들어 백성들이 쉽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한강 배다리이다. 수십 척의 배를 서로 묶어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위대한 작업! 수원 화성으로 갈 수 있도록 만든 배다리!

이 배다리야 말로 임오년 세 남자의 걸작품이 아닐 수 없다.

한을 품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남자, 사도세자!

아비 사도세자의 죽음을 바로 앞에서 목격하면서도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했던 남자, 정조!

사도세자와 정조의 비극을 온 몸으로 체득했던 남자, 정약용!

임오년 세 남자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 바로 한강 ‘배다리’였다. 그 배다리는 사도세자와 정조, 정약용을 맺어주는 상징이자 실체였다.

배다리를 만들며 정약용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약용이 만든 배다리를 건너는 정조의 감격은 어떠했을까.

마침내 경기도 화성으로 안식의 터를 잡은 사도세자의 넋은 위로를 받았을까.

<사도세자의 고백>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를 쓴 이덕일 교수의 책을 개인적으로 참 많이 읽었다. <송시열과 그의 나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조선선비 살해사건>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등은 읽는 재미와 함께 또 다른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였다.

이덕일 교수의 책은 읽기에 참 편하다. 아마도 그것은 역사적 자료의 충분한 근거와 다양한 시각을 담은 노력 탓이지 않을까 싶다. 문체도 일반 역사서와는 차별 점을 두고 있다.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수필을 읽는 듯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이덕일 역사서’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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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