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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20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유홍준 <저녁의 슬하> (1)

직접과 직방으로 살아가기

이렇게 시원한 시를 읽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한 줄기 물줄기가 시원스레 바람을 가르고, 강물을 씻은 바람이 이마에 얹히는 기분이었다. 시를 읽는 맛이 이런 것이구나 할 정도로 마음에 착착 달라붙었다. 아마도 그것은 직접, 직방으로 시는 쓰는 시인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유홍준 시인은 직접‧직방으로 사는 사람이다. 얼마나 직접과 직방을 좋아하는지 <저녁의 슬하>의 작가의 말에서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작가의 말을 직접, 그리고 직방으로 들어보자.

“내 발로 직접 어디를 가고 내 눈으로 직접 무엇을 본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

직접적으로 산 그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유홍준 시인은 ‘직접’이란 말을 계속 강조한다. 더 읽어보자.

“직접은 힘들고 고달픈 거야

간접은 편안하고 안락한 거야

직접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시인이 되고 교사가 돼?

간접은 지루하고 하품이 나

직접이 재밌고

직접이 즐거워

내 피부로 직접 저 햇살 받는 행복!

내 귀로 직접 저 물소리 듣는 기쁨!“

직접으로 살고 직접으로 적은 시

이쯤 되면 유홍준 시인이 과연 어떤 시를 <저녁의 슬하> 시집에 직접으로 펼쳐 놓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일몰 앞에서>란 시부터 읽어보자.

그와 나는 시소 타는 사람 같고
해와 달 같아서
누가 먼저 궁둥이를 털고 일어나면 툭 떨어진다. 하늘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저 뜨겁고 차가운
해와 달을
‘시소 타는 남녀’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일몰 앞에서>중에서).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해가 뜨는...시소게임! 시인은 해와 달의 움직임이 시소 타는 ‘남녀’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 해와 달은 ‘뜨겁고 차다’ 시인의 직접 삶이 이 ‘뜨겁고 차가움’에 녹아들어 있다. 삶이란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다. 시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뜨겁고 차가운 시인의 삶이 시에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공사장 모래더미에
삽 한 자루가
푹,
(중략)
모래밥도 먹어야 할 사람이 먹는다
모래밥도 먹어본 사람만이 먹는다
늙은 인부 홀로 저 모래밥 다 비벼 먹고 저승길 간다(<모래밥>중에서)

한 늙은 인부가 모래를 삽으로 뜨고 있다. 아마도 공사장에서 일하는 늙은이의 모습을 그려놓은 듯 하다. 마치 삽 한 자루가 푹 모래더미에 쑤셔 있는 것처럼 늙은 인부도 이제 삶의 차갑고 뜨거운 맛을 뒤로 하고 저승길 앞에 서 있다.

시인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 시인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노가다’ 판을 뛰었다. 공사장, 과일장사, 정신병원 관리자, 농사⋯. 시인의 삶이 직접적으로 표현돼 있는 시이다. <모래밥>은 밥 먹기 힘든 시기, 시인이 어느 공사장에서 직접 노동을 하면서 풍겨오는 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시인의 솔직한 감정도 시로 표현돼 있다.

화가 난 아버지가 쇠스랑을 들고 어머니를 쫓아갔다 화가 난 눈썹이 보기 좋았다 1975년이었다 입동(入冬)이었다. 내 그리운 쇠스랑⋯ 마당 저쪽 두엄더미에서는 허연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그리운 쇠스랑> 전문)

아버지와 쇠스랑? 뭔가 어울리는 조합 같다. 1975년 가난한 농촌의 모습. 아비는 패고 어머니는 도망가는 모습. 어머니는 입동의 시절에 집에서 쫓겨나 ‘허연 입김을’ 불면서 어디에선가 숨어 있었을까. 두엄더미의 뜨거운 ‘허연 김’이 어머니의 차가운 ‘허연 김’을 연상시키면서 ‘뜨거움과 차가움’의 해와 달을 느끼게 한다.

우리들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는가

<저녁의 슬하> 시집에서 시인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고인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고인의 슬하에는
고인이 있나 저녁이 있나
저녁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저 외로운
지붕의 슬하에는
말더듬이가 있나 절름발이가 있나
저 어미새의 슬하에는
수컷이 있나 암컷이 있나
(중략)
이 차가운 쇠붙이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이 차가운 이슬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슬하>중에서)

‘슬하’에는 무엇이 있나, 무엇이 있나? 시인은 계속 묻고 있다. 시인 또한 조부모와 부모의 슬하에서 컸을 것인데, 시인은 아직 ‘슬하’에 무엇이 있을 것인지 궁금해 한다. 과연 저녁의 슬하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녁을 짓는 연기? 아궁이게 타닥타닥 소리내며 타는 군불? 볏짚 사이로 웅크리고 잠을 준비하는 새들? 어둠? 이 모든 것이 ‘저녁의 슬하’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아직 ‘저녁의 슬하’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 한다. 시인의 슬하에는 아직 가지고 싶고, 그리워 하고 싶은 것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탓일 것이다. 시인이 계속 의문을 갖는 것은.

사람을 쬐다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는 사람을 싫어하면서 커오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시대에서 우리는 냉정해지고 차가워지고,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다.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왜? 이미 우리는 사람을 싫어하고 있으니까.

시인은 이러한 현실을 가만히 시로 읊는다.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중략)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중략)
눈가가 짓물러진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도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사람을 쬐다> 중에서)

유홍준 시인의 깊은 맛이 느껴지는 시 중의 하나로 꼽고 싶다. 우리는 사람을 쬐지 않은 지 오래됐다. 우리는 돈을 쬐고, 우리는 권력을 쬐고, 우리는 명예를 쬐고, 사람을 쬐지 않은 지 오래됐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오래된 관습이 돼 버렸다.

유럽의 날씨는 언제나 구름이 많거나 비가 오는 경우가 많다. 햇볕이 드는 날이면 사람들은 집 앞의 잔디밭에서, 혹은 대학 교정에서 그것도 아니면 도심의 휴식터에서 웃옷을 훌러덩 훌러덩 벗어 던지고 햇볕을 쬔다. 왜? 햇볕의 그리움과 햇볕의 소중함을 아니까.

사람이 사람을 쬐지 않은 이 시대, 우리는 무엇을 위해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쬐지 않으니 세상은 도대체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시인의 <들깻잎을 묶으며>라는 시는 이 시대의 자화상을 그대로 그리고 있다.

추석날 오후, 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중략)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자 우리
들깨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로 흰 구름 몇덩이 지나가는 추석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어보는
아아, 모처럼의 기쁨!(<들깻잎을 묶으며>)

푸른 들깻잎을 따고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이게 ‘돈’이라면 좋겠제 라고 묻는 형의 모습. 들깨밭이 온통 돈밭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런 것이니까. 얼마 전 5만원짜리 지폐 수십만장을 밭에 묻었다는 뉴스가 세상을 흥미롭게 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가지지 못한 우리는 동생에게 그런 농담을 건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러면서 겨울이 오면 삭힌 들깻잎을 척척 지폐처럼 올려, 들깨냄새 짙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다정하게 웃자라고 주문한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직접적 삶을 그리는 짧은 시로 <저녁의 슬하> 시집을 마무리 짓는다.

영월 지나 정선 지나 태백 긴 골짜기 사북사북 간다 사북사북 눈 온다 死北死北 死北死北⋯⋯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하염없이 내 뒤를 따라오고 있다.(<사북> 전문)

자본주의에서 쫓겨나 시인은 사북으로 간다. 그곳에라면 먹고 살 무엇인가 있겠지 하고 사북사북 걸어보지만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死北死北’이다. 시인 뿐만이 아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염없이 내 뒤를 따르고 있다. 이놈의 자본주의! 언제쯤 이런 ‘사북사북’을 그칠까.

돈에 환장한 사람과 돈에 미쳐 날뛰는 사람들은 이 시집, 읽지 말기를 권한다. 읽으면 안된다. 충격을 받아 ‘사북사북’거릴 수 있다. 오래간만에 직접적이고 직방적인 시를 읽었다. 유홍준 시인의 삶 자체가 직접적이고 직방적이었던 만큼 <저녁의 슬하>시집의 슬하에는 ‘생동감과 현실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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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