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속도전이다. 아이들은 미친 듯 달려간다. 되돌아 볼 여유가 없다. 간혹 되돌아보면 부모가, 선생이, 학교가, 현실이 “뒤돌아볼 여유가 있으면 앞으로~앞으로 나가라!”고 꾸중한다. Only Forward!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는 아이들에게는 ‘고운 두려움’도 ‘아름다운 무서움’은 모른다. 아름다움과 고움, 두려움과 무서움이 정확히 이분법적으로 나눠져 한 감정만 가진다. 그 감정 하나만 가지고 무서운 속도로 현실 속으로 뛰어간다.

초등학생이 중학교 책을 공부하고, 중학생이 고등학교 책을 공부한다. 아이들은 왜 그것을 공부하는 지도 알지 못한 채 엄마에 의해, 학교에 의해, 현실에 의해 ‘속도전’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예전 국민학교 시절 나에게는 예쁜 여선생님이 있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시골학교에 온 선생님은 깎아 놓은 인형이었다. 키도 크지 않은 여선생님은 무척 예뻤다. 난 그런 선생님이 무서웠다. 매일 밭일 하느라 때 묻은 수건을 쓰고 일하는 우리 어머니, 시커먼 얼굴과 거침없이 입는 옷차림새와 너무 달랐다.

당시 그 여선생님은 나에게 ‘고운 두려움’이었고 ‘아름다운 무서움’이었다.

그 여선생 때문에 나는 자주 학교를 빼먹었다. 학교에 간답시고 친구를 꼬드겨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시골장터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

나는 경남 창녕군 이방면에서 태어났다. 창녕은 지리적으로 마산과 대구에 가까운 지역이다. 그래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마산이나 대구로 유학(?)을 떠난다. 나도 대구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국민학교 5학년 때 전학했다.

그 전까지 나는 시골에서 뒹굴고 뛰어 다녔다. 시골에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축제가 있다. 5일장이다. 내가 살던 곳은 3, 8일 장이 서는 ‘창녕장’과 4, 9일마다 장이 서는 ‘이방장’이 있었다. 장이 열리면 시골 사람들은 옷을 차려입고 머리와 등에 팔 물건을, 이고 지고 장으로 향했다.

장터에 도착하면 고소한 음식 냄새가 이미 장터를 가득 채웠다. 그 중 잡채는 단연 으뜸 먹거리였다. 5일마다 찾아오는 장터는 온갖 신기한 것들의 대향연이었다. 멀리 외지에서 귀한 물건들을 갖고 5일장을 순회하는 상인들이 많았다. 장터는 학용품이며 신발이며, 장터 국밥이며 모든 것들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버지는 장터에 도착하면 인사를 받기 바빴다. 한 평생을 그곳에 살았으니 건너 마을, 먼 마을 할 것 없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어른들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얼굴을 알지 못하더라도 나이 드신 어르신들에게 고개를 숙인 뒤 제 갈 길을 가는 모습. 시골 장터는 낯선 상인들과 낯익은 사람들의 어울림이었고 큰 축제의 공간이었다.

장이 서면 아버지는 먼저 팔 물건들(말린 고추, 마늘, 참깨 등)을 가지고 장터로 향했다. 그리고 엄마는 뒤늦게 장터로 향했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팔 물건들을 모두 팔고, 도처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장터국밥 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곳에서 권커니 받거니 막걸리 잔이 돌아가고, 아무래도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는 아버지는 젊은 사람들이 권하는 한 잔의 막걸리를 여러 번 마실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장터에 도착할 때쯤에 벌써 아버지의 얼굴은 벌겋게 익어 있었다.

늦은 밤, 달빛은 고요한데 때 아닌 노래 소리는 들리고

어머니는 벌겋게 달라 오른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판 물건의 값을 거의 빼앗다시피 해 당신이 살 물건을 고르기 위해 가 버린다. 어머니가 필요한 물건을 모두 구입할 때까지 아버지는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에 둘러싸여 막걸리 잔에 인생을 논하고 ‘이 놈의 나라꼴’을 걱정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어머니는 집으로 향한다. 늦은 밤, 어둠이 내릴 때까지 아버지는 장터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나설 때. 엄마는 나에게 “신작로까지 갔다 오니라.”라며 아버지 마중을 시킨다.

어둠이 내리고 하늘엔 달이 떠올라 흐르는 냇물에 달빛이 씻겨 나가고, 얕은 재를 넘어 신작로로 나간다. 조용히 물 흐르는 소리,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만 들리고 아버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몇 십 분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저 멀리서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경재 시인의 <원기마을 이야기>는 이경재 시인이 살고 있는 거창의 모습을 담았다. <원기마을 이야기>에는 유년 시절, 시인이 경험했던 이야기들이 옛 추억처럼 스쳐 지나기도 하고, 아름답게 펼쳐진다. 내 유년 시절의 모습과 다르지 않는 장면들이다.

소요령 달아 딸랑하던 대문 멀리
덕유산 지는 햇살 둥구나무 스며들면
두레박 호박돌 가지런히 씻어놓고
솔가지 밑불 돋아 삭다리 따스운 군불 놓던
엄니, 형, 나랑
소골소골 애기하던 행복도 있었구나
어쩌다 큰 동네 사시는 아버지
술 드시고 오시는 날이면
으레 있을 어머니 악다구니와
세간 어지럽게 부서지는 소리
지레 겁먹은 유년의 아픔이
담벼락 쭈그려 앉아 지푸라기 두르며(<들성리 1>중에서)

아버지는 오지 않고, ‘엄니, 나, 형’ 이렇게 셋이서 군불을 때며 소곤소곤 이야기하던 옛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가끔씩 찾아오는 아버지의 등장은 ‘어머니 악다구니’와 ‘세간 어지럽게 부서지는 소리’가 있었음을 회고한다.

시인은 <원기마을 이야기>에서 어머니를 두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려 놓았다. 시인의 어머니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아닐까.

경남 거창땅 국농소 전형적인 농경 마을
아들 둘 낳고 남편에게 소박맞은
삼십 년 넘게 외롭게 사시는
도재 어머니 있답니다
처녀적 인근 위천면 큰 부잣집 둘째 딸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지만(<도재 어머니> 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고이 자란 ‘부잣집 둘째 딸’은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복 없이 ‘외롭게 사시는’ 생활을 이어온다. 그런 어머니에게 외할아버지는 ‘재산 목록 1호’를 선물해 준다.

날품팔이보다 나을 거라고
한 마지기 논을 팔아
애써 외할아버지 장만해 주신
우리집 재산목록 1호
솜씨 좋은 어머니 명성 주위에 자자
회갑집 마루마기 혼삿집 예복
일거리 쉴 날 없이
늦은 밤도 마다 않고
저린 발 오래도록 굴리셨지요(<재봉틀>중에서)

1960~70년대의 한국의 시골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 속에서 힘겹지만 다정한 추억과 기억을 끄집어내는 시들이다. 추억과 기억 속에는 아픔과 고통도 있기 마련이다.

이경재 시인은 이런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시작해 자신이 살아왔고 거쳐 왔던 주변의 풍경, 그 중에서도 특히 시골장터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 길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까
아직도 비포장 읍내 가는 길
젖 터져 젖 터져 소리치던 할머니
결국 새우젓만 터져
한바탕 웃음 자지러지던
콩나물시루같이 빼곡하던 장날의 완행버스
이리 쓸리고 저리 쓸려도
악을 쓰며 따라가던 장구경
파김치 되어 돌아와도
넉넉한 볼거리 피곤함도 잊었었네
이 길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까
쌀 몇 되박이면 푸짐했던 장터 인심
할아버지 고무신, 어머니 몸빼 한 벌
어물전 찬거리. 감칠맛나는 자장면
동생들 학용품 사고도 남아
석양 붉게 묻어난 파장의 선술집
막걸리 몇 잔 얼근하게 취하시던
아버지 구수한 술주정도 만날 수 있을까
딱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시골길> 전문)

‘시골길’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지금은 웬만한 곳은 모두 포장이 돼 있지만 당시에는 비포장 길이 많았다. 버스도 하루에 한두 번 정도 다니고, 허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버스. 그러니 버스는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콩나물시루같이’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 버스에 사람들로 가득차고 서로 밀치는 가운데 한 할머니가 “젖 터져! 젖 터져!”라고 말하고, 알고 보니 “그것은 새우젓”이었다는 모습에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시골장터에 나섰던 시인의 아버지, 혹은 나의 아버지, 혹은 대부분의 아버지의 모습은 ‘막걸리 몇 잔 얼근하게 취하시던/아버지 구수한 술주정도 만날 수 있을까’로 표현돼 있다.

그 장터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던가

내 고향에 5일마다 섰던 ‘창녕장’과 ‘이방장’ 처럼 시인의 거창이란 곳에서는 ‘위천장’이 정기적으로 섰든가 보다. 시인은 위천장에 대한 추억을 이렇게 읊고 있다.

돌아오는 장날이면
모동 강남불 상천 사람
어나리 서마리 황산 남산동 사람
멀리 덕유산 첫 자락
황점 빙기실 소정 사람 죄다
끄덕끄덕 구루마 타고 모여들던 곳
다리목 기름집 지나 삼거리 마늘전
어물전 채소전 신전 옷전
뭉실뭉실 김나던 국밥집 열무김치 막국수
사돈에 팔촌까지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던
왁자지껄 위천장 옛날 이야기였네
외할머니 따라 장구경 가면
아이구 불쌍한 우리 새끼
다리밑 어메 보러 나왔나
눈깔사탕 몇 개쯤 공짜로 주던 곰보아줌마
동네사람 노놔먹는 밥 한 술
넉넉히 어린 시장기 덤으로 채우던 누룽지
지금에서 미치도록 그리운
왁자지껄 위천장 옛날 이야기였네(<위천장> 전문)

정겨운 모습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외할머니의 손주 사랑에서부터, 시골 사람들의 푸근한 인심까지. 하지만 시인은 그런 옛 모습을 추억하면서 “왁자기껄 위천장 옛날 이야기였네.”라고 노래한다.

시집 이름이 <원기마을 이야기>인 것은 ‘원기마을’에 대한 14편의 연작시가 있기 때문이다.

시집에는 <원기마을 이야기 1>에서부터 <원기마을 이야기 14>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각 시편마다 부제가 붙었다. 1-내력, 2-탄생, 3-성장에서부터 14-맹세까지.

이곳에 누가 터를 닦고 살았으랴
먹을거리 되는 땅이라곤
가파른 산자락 내려오다
어쩌다 낮게 드리운 자리
얼씨구나 논을 치고 부지런히 밭을 치고
양지바른 한 켠 초가삼간 집을 지어
덕유산 구천골 산자락 닮은(<원기마을 이야기 1-내력>중에서)

저 산을 볼거나
소백산맥 내려오던 산줄기
대덕산 수도산 가야산으로 치닫고
또 한 줄기
덕유산 지리산 백운산 내달리던
우뚝 선 세 봉우리 삼봉산(<원기마을 이야기 2-탄생>중에서)

지금은 의젓하게 자란 힘센 청년
한 형제처럼 산다네 원기마을(<원기마을 이야기 3-성장>중에서)

시인은 ‘원기마을’을 통해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농촌 마을을 꿈꾼다. 작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그의 작은 소망이다. <원기마을 이야기>에는 시인과 함께 농촌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고, 이루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친구들의 이야기가 실명으로 등장한다.

시인은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고 있다. 새벽이면 신문 배달 일을 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작은 공동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 한 번도 거창이나 삼봉산, 위천마을을 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시인의 <원기마을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곳을 많이 다녀왔고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기시감(데자뷰)’에 빠져든다.

이경재 시인은 작가의 말을 통해 “신문 배달을 하다 보니 새벽을 너무나 좋아하게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시는 씨’라는 선배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경재 시인은 “농부의 씨앗 사랑만큼 시의 씨를 뿌렸다.”고 적었다.

염무웅 선생의 말에 따르면 이경재 시인은 거창에서 전통찻집을 하고 농사를 짓는 것으로 나와 있다. 언제 거창을 가게 되면 꼭 한번 들러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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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