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이나 이혼한 마거릿 미드에게
기자들이 왜 또 이혼했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녀가 되물었다
“당신들은 그것만 기억하나
내가 세 번이나 뜨겁게 사랑했다는 것은
묻지 않고“(<물음> 중에서)

천양희 시인은 <물음>이란 시에서 ‘이혼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각의 차이를 확연하게 볼 수 있는 시구다. 우리는 주관과 시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주관과 시각이 종합적으로 체득될 때 그것은 가치관을 형성하는 기본이 된다.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각’이다.

마거릿 미드의 여러 번 결혼을 두고 기자들의 관심은 “왜 또 이혼했느냐”는 질문이 먼저일 것이다. 마거릿 미드의 입장이 아니라 ‘이혼한 여자’라는 곳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마거릿 미드는 되받아쳐 “왜 당신들은 그것만 묻나? 내가 세 번이나 뜨겁게 사랑했다는 것은 왜, 왜, 왜 묻지 않나”라고 소리친다.

마거릿 미드는 ‘인류학의 어머니’로 불리는 인물이다. 나도 인류학을 전공했으니 마거릿 미드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고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는 시를 읽어보자.

마거릿 미드는 서사모아와 뉴기니 등지를 발로 뛰면서 참여관찰을 통해 연구한 학자이다.

서사모아에는 빵나무라는 것이 있다. 이곳 원시 부족들에게 빵나무는 주된 먹거리이다. 배고프면 나무에 올라 빵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먹는다. 피곤하면 누워 잠을 잔다. 이 원시 부족에게는 통제와 간섭이 거의 없다.

예컨대 이런 경우이다. A라는 가정에 부모와 ‘지니’라는 이름의 딸이 하나 있다. 딸은 열다섯이다. 어느 저녁, 지니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21세기 한국에서는 난리가 난다. 납치에서부터 온갖 극한 상황까지 염두에 둔다). 부모는 딸의 귀가를 기다리지 않고 저녁을 먹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든다. 그날 지니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침이 지나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지니는 그제서야 집에 들어온다.

지니가 외박을 하고 들어 왔지만 부모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꾸짖지도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웃집의 “어디에선가 잤겠지.”라는 생각. 다른 집안의 딸이 지니의 집에서 자고 간다하더라도 지니의 부모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이곳 원시 부족들은 자신의 가족이 어느 집에서 자든, 며칠을 나가 있든, 어디에선가 자고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이 원시 부족의 독특한 문화 때문이다. 누가 자기 집에 와서 자든, 내 가족의 누가 다른 집에 가서 자든 서로에 대한 믿음과 배려를 먼저 생각한다. 통제와 간섭보다는 자유와 배려를 우선시 하는 문화적 전통 때문이다. 문화는 이처럼 한 사회를 이루는 기본 골격을 갖추게 한다.

마거릿 미드는 “왜 태어나면서부터 남성은 공격적이고 적극적이며, 여성은 다소곳하고 수동적일까”라는 의문이 휩싸였다. 서사모아와 뉴기니 등지를 연구한 마거릿 미드는 어떤 한 부족의 경우 여성이 사냥을 하고, 남성이 가정 일을 하는 문화를 보게 된다. 그런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마거릿 미드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문화구조가 그렇게 만든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연구 결과는 이후 여성주의(페미니즘) 운동의 출발이 되는 이론으로 정립된다.

‘귀가 순해지는’⋯가벼우면서도 텅 빔을 꿈꾼다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새가 있던 자리>중에서)

천양희 시인은 ‘가벼운 새’에 주목한다. 도대체 앉을 수 없는 곳에서도 ‘가벼운 새’는 앉는다. 심지어 바람 속에서도 쉴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한가. 시인은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라고 읊조린다. 가볍게, 바람 속에서도 쉴 수 있는 새를 꿈꾸는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942년생인 시인의 나이 올해 만 69세. 한국 나이로는 칠순이다. ‘귀가 순해지고’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다.

아버지 가고
나는 벌써
귀가 순해졌다(<오래된 나무> 중에서)

가벼운 새를 꿈꾸면서도 ‘아직 인간이 되려면 얼마를 더 걸어야 할 지 모르는’ 시인이지만 이제 “바람 몰아쳐도 크게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어느덧 이순의 나이에 다다르고 있다.

이순을 지나 칠순에 다가간 나이에는 무엇보다 받아들이기 보다는 ‘나를 비워가는 것’이 이치에 맞는 삶일까. 시인은 ‘공(空), 텅 빔’에 관심을 가진다.

모르는 소리 마오 속이 비었으니 얼마나 가벼운지 모른다오 속이 비었다고 참으로 가벼운 존재는 아니오 속없이 사는 내가 나는 대견하오 속없이 사는 건 마음 비우고 사는 것과 다르지 않소 나는 평생 속없는 자로서 간단없이 갈 길 가려 하오(<공어(空魚)이야기>중에서>

가벼운 새처럼, 그리고 속없이 마음을 비우고 사는 것처럼 시인은 갈 길을 가려하고 있다. 하지만 여자로 태어난 시인에게 여성이란 비애는 늘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다.

하룻밤 사이에 겨울이 오고
소낙비 같은 슬픔이 쳐들어와선
이 땅에 여자로 태어나
누구의 아내로 사는 누구라도
허난설헌을 읽는 밤
너무 늦게 마르는 눈물자국이여(<허난설헌을 읽는 밤>중에서)

조선의 혁명아였던 허균의 누이였던 허난설헌. 그녀는 조선의 가장 위대한 여성시인이자 작가였다. 그러나 여성으로 태어난 그녀는 “나에게 세 가지 한이 있다.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 하필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라고 한탄한다. 그녀의 시는 중국으로 건너가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태어난 조선에서는 “아녀자가 시는 무슨 시” “이 시는 베꼈음에 틀림없다”는 등의 비난만 받는다. 작가의 진정한 가치보다 ‘여자’라는 몰상식의 가치가 팽배했던 조선이었다.

천양희 시인은 그런 ‘허난설헌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 또한 ‘너무 늦게 마르는 눈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들에 ‘우두커니’ 선 시인

시인은 마침내 ‘마들’에 선다. 마들이라면 넓은 들, 혹은 말들이 뛰어노는 들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생각해보니 수직이 없는 들에는 그늘이 빠져 있다
말의 발자국 거기서 끊겨 있다
끊어진 것은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들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오늘은 내가 번개라도
돌을 쪼개듯 들을 쪼갤 수는 없다(<나의 처소>중에서)

마들에 나가
들판 끝 본다
눈 끝의 새 본다
들풀에도 새가 앉네
새는 가벼우니까(<겨울 들>중에서)

들판은 이제 들의 판을 바꾸어버렸다
마들은 이제 말의 들이 아니다
나는 다시 적는다
이제 마들은 말의 들이 아니다(<마들시편>중에서)

마침내 시인은 마들에 서서 저 깊은 수평선을 보고 있다. 끝없는 그곳에는 수직이 없고 그늘도 없다. 들판의 끝을 보고, 그곳에서 눈 끝으로 새를 본다. 여전히 새는 ‘가벼우니’ 들풀에도 앉아 있다.

오래된 농담과 시적 씨앗을 찾는 시인

시인은 이제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다. 시인은 거쳐 지나온 자신의 삶과 같은 오래된 농담에 귀 기울인다. 늘 곁에 있고, 늘 함께 있지만 왠지 외로운 부부. 현대의 부부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서로 외로움을 진하게 풍기는 존재가 아닐까. 늙은 부부가 한 쪽을 업고 길을 지나가는 시 한편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 보였다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엔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오래된 농담>중에서)

갑자기 이 시편에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이 떠 오른 것은 왜일까. <오래된 정원>에 나오는 한 문장 때문이었을까. 수배중인 남자가 자신을 숨겨준 여자의 집을 떠날 때 여자가 떠나는 남자의 뒤에다 대고 가만히 독백한다.

“먹여줬지. 재워줬지. 입혀줬지. 몸줬지⋯.뭐가 아쉬워서 네가 가냐?"

<오래된 농담>과 <오래된 정원>의 시와 소설이 겹쳐지면서 묘한 긴장감과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천양희 시인은 자신의 시에 대한 의미도 스스로 털어놓고 있다. 천양희 시인에게 시는 과연 무엇일까. 다음 시를 보면 들춰진다.

시를 쓰니 세상에 빚 갚는 것이고
의지할 시를 자식처럼 키우니 저축 아닌가
그래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난다네
시시시(時視詩) 가득한 통장에
마이너스는 없다네(<시(詩)통장>중에서)

‘시 통장’에 마이너스가 없다는 표현이 가슴 속으로 다가온다. 물가는 오르고, 먹고 살기 힘든 요즈음 마이너스 통장이 아닌 것만으로도 잘 살고 있는 축에 속하지 않을까. 시인은 시를 통해 세상에 빚을 갚고 그러면서 넉넉지는 않지만 마이너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시 통장’에는 시(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담을 수 있는 ‘시(時) 통장’도 있고, 모든 것을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꼬박꼬박 저장할 수 있는 ‘시(視) 통장’도 함께 있다. 넉넉한 ‘시 통장’일 수밖에 없겠다.

천양희 시인의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는 시인의 칠순 인생에서 여러 가지 관조적인 생각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넓은 들판에서 시인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아쉬움과 넉넉함, 때론 슬픔과 비애, 나아가 기쁨과 행복까지 노래한다.

‘시인의 말’에서 천양희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쓰는 일이라고 아직도 믿으면서”라고 적었다. 천양희 시인에게 시는 ‘세상에 빚을 갚는 일이자 가장 죄없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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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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