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속도전이다. 아이들은 미친 듯 달려간다. 되돌아 볼 여유가 없다. 간혹 되돌아보면 부모가, 선생이, 학교가, 현실이 “뒤돌아볼 여유가 있으면 앞으로~앞으로 나가라!”고 꾸중한다. Only Forward!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는 아이들에게는 ‘고운 두려움’도 ‘아름다운 무서움’은 모른다. 아름다움과 고움, 두려움과 무서움이 정확히 이분법적으로 나눠져 한 감정만 가진다. 그 감정 하나만 가지고 무서운 속도로 현실 속으로 뛰어간다.

초등학생이 중학교 책을 공부하고, 중학생이 고등학교 책을 공부한다. 아이들은 왜 그것을 공부하는 지도 알지 못한 채 엄마에 의해, 학교에 의해, 현실에 의해 ‘속도전’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예전 국민학교 시절 나에게는 예쁜 여선생님이 있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시골학교에 온 선생님은 깎아 놓은 인형이었다. 키도 크지 않은 여선생님은 무척 예뻤다. 난 그런 선생님이 무서웠다. 매일 밭일 하느라 때 묻은 수건을 쓰고 일하는 우리 어머니, 시커먼 얼굴과 거침없이 입는 옷차림새와 너무 달랐다.

당시 그 여선생님은 나에게 ‘고운 두려움’이었고 ‘아름다운 무서움’이었다.

그 여선생 때문에 나는 자주 학교를 빼먹었다. 학교에 간답시고 친구를 꼬드겨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시골장터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

나는 경남 창녕군 이방면에서 태어났다. 창녕은 지리적으로 마산과 대구에 가까운 지역이다. 그래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마산이나 대구로 유학(?)을 떠난다. 나도 대구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국민학교 5학년 때 전학했다.

그 전까지 나는 시골에서 뒹굴고 뛰어 다녔다. 시골에는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축제가 있다. 5일장이다. 내가 살던 곳은 3, 8일 장이 서는 ‘창녕장’과 4, 9일마다 장이 서는 ‘이방장’이 있었다. 장이 열리면 시골 사람들은 옷을 차려입고 머리와 등에 팔 물건을, 이고 지고 장으로 향했다.

장터에 도착하면 고소한 음식 냄새가 이미 장터를 가득 채웠다. 그 중 잡채는 단연 으뜸 먹거리였다. 5일마다 찾아오는 장터는 온갖 신기한 것들의 대향연이었다. 멀리 외지에서 귀한 물건들을 갖고 5일장을 순회하는 상인들이 많았다. 장터는 학용품이며 신발이며, 장터 국밥이며 모든 것들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버지는 장터에 도착하면 인사를 받기 바빴다. 한 평생을 그곳에 살았으니 건너 마을, 먼 마을 할 것 없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어른들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얼굴을 알지 못하더라도 나이 드신 어르신들에게 고개를 숙인 뒤 제 갈 길을 가는 모습. 시골 장터는 낯선 상인들과 낯익은 사람들의 어울림이었고 큰 축제의 공간이었다.

장이 서면 아버지는 먼저 팔 물건들(말린 고추, 마늘, 참깨 등)을 가지고 장터로 향했다. 그리고 엄마는 뒤늦게 장터로 향했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팔 물건들을 모두 팔고, 도처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장터국밥 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곳에서 권커니 받거니 막걸리 잔이 돌아가고, 아무래도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는 아버지는 젊은 사람들이 권하는 한 잔의 막걸리를 여러 번 마실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장터에 도착할 때쯤에 벌써 아버지의 얼굴은 벌겋게 익어 있었다.

늦은 밤, 달빛은 고요한데 때 아닌 노래 소리는 들리고

어머니는 벌겋게 달라 오른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판 물건의 값을 거의 빼앗다시피 해 당신이 살 물건을 고르기 위해 가 버린다. 어머니가 필요한 물건을 모두 구입할 때까지 아버지는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에 둘러싸여 막걸리 잔에 인생을 논하고 ‘이 놈의 나라꼴’을 걱정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어머니는 집으로 향한다. 늦은 밤, 어둠이 내릴 때까지 아버지는 장터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나설 때. 엄마는 나에게 “신작로까지 갔다 오니라.”라며 아버지 마중을 시킨다.

어둠이 내리고 하늘엔 달이 떠올라 흐르는 냇물에 달빛이 씻겨 나가고, 얕은 재를 넘어 신작로로 나간다. 조용히 물 흐르는 소리,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만 들리고 아버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몇 십 분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저 멀리서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경재 시인의 <원기마을 이야기>는 이경재 시인이 살고 있는 거창의 모습을 담았다. <원기마을 이야기>에는 유년 시절, 시인이 경험했던 이야기들이 옛 추억처럼 스쳐 지나기도 하고, 아름답게 펼쳐진다. 내 유년 시절의 모습과 다르지 않는 장면들이다.

소요령 달아 딸랑하던 대문 멀리
덕유산 지는 햇살 둥구나무 스며들면
두레박 호박돌 가지런히 씻어놓고
솔가지 밑불 돋아 삭다리 따스운 군불 놓던
엄니, 형, 나랑
소골소골 애기하던 행복도 있었구나
어쩌다 큰 동네 사시는 아버지
술 드시고 오시는 날이면
으레 있을 어머니 악다구니와
세간 어지럽게 부서지는 소리
지레 겁먹은 유년의 아픔이
담벼락 쭈그려 앉아 지푸라기 두르며(<들성리 1>중에서)

아버지는 오지 않고, ‘엄니, 나, 형’ 이렇게 셋이서 군불을 때며 소곤소곤 이야기하던 옛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가끔씩 찾아오는 아버지의 등장은 ‘어머니 악다구니’와 ‘세간 어지럽게 부서지는 소리’가 있었음을 회고한다.

시인은 <원기마을 이야기>에서 어머니를 두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려 놓았다. 시인의 어머니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아닐까.

경남 거창땅 국농소 전형적인 농경 마을
아들 둘 낳고 남편에게 소박맞은
삼십 년 넘게 외롭게 사시는
도재 어머니 있답니다
처녀적 인근 위천면 큰 부잣집 둘째 딸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지만(<도재 어머니> 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고이 자란 ‘부잣집 둘째 딸’은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복 없이 ‘외롭게 사시는’ 생활을 이어온다. 그런 어머니에게 외할아버지는 ‘재산 목록 1호’를 선물해 준다.

날품팔이보다 나을 거라고
한 마지기 논을 팔아
애써 외할아버지 장만해 주신
우리집 재산목록 1호
솜씨 좋은 어머니 명성 주위에 자자
회갑집 마루마기 혼삿집 예복
일거리 쉴 날 없이
늦은 밤도 마다 않고
저린 발 오래도록 굴리셨지요(<재봉틀>중에서)

1960~70년대의 한국의 시골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 속에서 힘겹지만 다정한 추억과 기억을 끄집어내는 시들이다. 추억과 기억 속에는 아픔과 고통도 있기 마련이다.

이경재 시인은 이런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시작해 자신이 살아왔고 거쳐 왔던 주변의 풍경, 그 중에서도 특히 시골장터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 길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까
아직도 비포장 읍내 가는 길
젖 터져 젖 터져 소리치던 할머니
결국 새우젓만 터져
한바탕 웃음 자지러지던
콩나물시루같이 빼곡하던 장날의 완행버스
이리 쓸리고 저리 쓸려도
악을 쓰며 따라가던 장구경
파김치 되어 돌아와도
넉넉한 볼거리 피곤함도 잊었었네
이 길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까
쌀 몇 되박이면 푸짐했던 장터 인심
할아버지 고무신, 어머니 몸빼 한 벌
어물전 찬거리. 감칠맛나는 자장면
동생들 학용품 사고도 남아
석양 붉게 묻어난 파장의 선술집
막걸리 몇 잔 얼근하게 취하시던
아버지 구수한 술주정도 만날 수 있을까
딱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시골길> 전문)

‘시골길’에 대한 추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지금은 웬만한 곳은 모두 포장이 돼 있지만 당시에는 비포장 길이 많았다. 버스도 하루에 한두 번 정도 다니고, 허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버스. 그러니 버스는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콩나물시루같이’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 버스에 사람들로 가득차고 서로 밀치는 가운데 한 할머니가 “젖 터져! 젖 터져!”라고 말하고, 알고 보니 “그것은 새우젓”이었다는 모습에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시골장터에 나섰던 시인의 아버지, 혹은 나의 아버지, 혹은 대부분의 아버지의 모습은 ‘막걸리 몇 잔 얼근하게 취하시던/아버지 구수한 술주정도 만날 수 있을까’로 표현돼 있다.

그 장터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던가

내 고향에 5일마다 섰던 ‘창녕장’과 ‘이방장’ 처럼 시인의 거창이란 곳에서는 ‘위천장’이 정기적으로 섰든가 보다. 시인은 위천장에 대한 추억을 이렇게 읊고 있다.

돌아오는 장날이면
모동 강남불 상천 사람
어나리 서마리 황산 남산동 사람
멀리 덕유산 첫 자락
황점 빙기실 소정 사람 죄다
끄덕끄덕 구루마 타고 모여들던 곳
다리목 기름집 지나 삼거리 마늘전
어물전 채소전 신전 옷전
뭉실뭉실 김나던 국밥집 열무김치 막국수
사돈에 팔촌까지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던
왁자지껄 위천장 옛날 이야기였네
외할머니 따라 장구경 가면
아이구 불쌍한 우리 새끼
다리밑 어메 보러 나왔나
눈깔사탕 몇 개쯤 공짜로 주던 곰보아줌마
동네사람 노놔먹는 밥 한 술
넉넉히 어린 시장기 덤으로 채우던 누룽지
지금에서 미치도록 그리운
왁자지껄 위천장 옛날 이야기였네(<위천장> 전문)

정겨운 모습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외할머니의 손주 사랑에서부터, 시골 사람들의 푸근한 인심까지. 하지만 시인은 그런 옛 모습을 추억하면서 “왁자기껄 위천장 옛날 이야기였네.”라고 노래한다.

시집 이름이 <원기마을 이야기>인 것은 ‘원기마을’에 대한 14편의 연작시가 있기 때문이다.

시집에는 <원기마을 이야기 1>에서부터 <원기마을 이야기 14>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각 시편마다 부제가 붙었다. 1-내력, 2-탄생, 3-성장에서부터 14-맹세까지.

이곳에 누가 터를 닦고 살았으랴
먹을거리 되는 땅이라곤
가파른 산자락 내려오다
어쩌다 낮게 드리운 자리
얼씨구나 논을 치고 부지런히 밭을 치고
양지바른 한 켠 초가삼간 집을 지어
덕유산 구천골 산자락 닮은(<원기마을 이야기 1-내력>중에서)

저 산을 볼거나
소백산맥 내려오던 산줄기
대덕산 수도산 가야산으로 치닫고
또 한 줄기
덕유산 지리산 백운산 내달리던
우뚝 선 세 봉우리 삼봉산(<원기마을 이야기 2-탄생>중에서)

지금은 의젓하게 자란 힘센 청년
한 형제처럼 산다네 원기마을(<원기마을 이야기 3-성장>중에서)

시인은 ‘원기마을’을 통해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농촌 마을을 꿈꾼다. 작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그의 작은 소망이다. <원기마을 이야기>에는 시인과 함께 농촌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고, 이루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친구들의 이야기가 실명으로 등장한다.

시인은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고 있다. 새벽이면 신문 배달 일을 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작은 공동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 한 번도 거창이나 삼봉산, 위천마을을 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시인의 <원기마을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곳을 많이 다녀왔고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기시감(데자뷰)’에 빠져든다.

이경재 시인은 작가의 말을 통해 “신문 배달을 하다 보니 새벽을 너무나 좋아하게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시는 씨’라는 선배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경재 시인은 “농부의 씨앗 사랑만큼 시의 씨를 뿌렸다.”고 적었다.

염무웅 선생의 말에 따르면 이경재 시인은 거창에서 전통찻집을 하고 농사를 짓는 것으로 나와 있다. 언제 거창을 가게 되면 꼭 한번 들러 봐야겠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새벽 3시에 눈이 떠졌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정말 저절로 눈이 스스로, 능동적으로 열렸다.

달콤한 잠 속에서 뭔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일어났다. 이후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리맡에 있는 아이패드로 트위터에 접속해 본다. 4월1일 만우절이라 그런지 여러 가지 재밌는 ‘거짓말’들이 타임라인을 물들이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거짓말로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내 ‘행복한 거짓말’ ‘재밌는 거짓말’로 세상을 가볍게 웃고 지나가기에는 현실이 너무 버겁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때 타임라인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기사를 접했다.

"내 자식 살려내, 삼성 입사 얼마나 좋아했는데"

기사를 읽는 내내 잠이 오지 않는 새벽만큼 답답하고 가슴이 먹먹했다. 여전히 삼성이라는 공간에서, 삼성이라는 터전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나를 발견한다.

새벽잠을 아침까지 설치고 이른 아침 출근길에 올랐다. 출근길에도 피곤함 보다는 우울함이 먼저 몰려 왔다. 삼성을 둘러싼 유쾌하지 못한 일들과 비극적 경험 들이 하나 둘씩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염무웅 선생의 <문학과 시대현실>이란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책을 펼쳐 들었다. 읽을 차례를 보니 신경림 시인 편이다. 신경림 시인의 시부터 읽어보자.

장에 간 큰아버지는 좀체로 돌아오지 않고

감도 다 떨어진 감나무에는

어둡도록 가마귀가 날아와 운다(<시골 큰집> 부분)


그리하여 산 일번지에 밤이 오면

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

뒷산에 와 부딪혀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산1번지> 부분)


그리하여 증언하는 자 아무도 없는가.

이 더러운 역사를, 모두 흙 속에서

영원히 원통한 귀신이 되어 우는가.(<1950년의 총살) 부분)


바람은 복대기를 몰아다가 문을 때리고

낙반으로 깔려죽은 내 친구들의 아버지

그 목소리를 흉내내며 울었다,(<폐광> 부분)


저 밤새는 슬프게 운다

상여 뒤에 애처롭게 매달려

그 소년도 슬프게 운다(<밤새> 부분)


메밀꽃이 피어 눈부시던 들길

숨죽인 욕지거리로 술렁대던 강변

절망과 분노에 함께 울던 산바람(<해후> 부분)

위에 언급된 시 모두 우리 현대사의 질곡과 아픔, 학대받는 자들의 울음과 분노,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경림 시인의 시를 엿보면서 삼성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삼성과 관련돼 많은 증언을 했던 사람들은 조금씩 잊혀가고 이젠 ‘증언하는 자 아무도 없는가’라고 신경림 시인의 시가 다르게 읽힌다. 그래서 ‘이 더러운 역사를, 모두 흙 속에서 영원히 원통한 귀신이 되어 우는가’라고 분노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게 ‘더러운 역사’와 ‘흙 속에서 영원히 원통한 귀신이 되어 울 때’ 밤새도 슬프게 울었고 ‘상여 뒤에 애처롭게 매달려 그 소년도 슬프게 운다’고 해석하는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 몇 해 전 ‘삼성공화국’과 관련된 책들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권력에 예의 바르고 ‘외롭고 힘없는 자’에게 무뢰(無賴)한 삼성

삼성을 공화국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경제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삼성이 미치는 영향력은 가히 폭발적이면서도 공포스럽다. 정치, 문화, 사회, 학계 등 삼성이 내미는 권력에 주저 없이 손을 잡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삼성과 손을 잡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 늘려 있다.

삼성(Samsung)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 물음은 단순하지 않다. 하나의 기업집단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은 대한민국에서 정치, 사회, 문화 영역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다. 삼성을 기업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왕국’으로 판단하게 된다.

무엇보다 ‘삼성왕국’이 우리 사회에 미치고 있는 가장 큰 테제는 ‘선(善)과 악(惡)조차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헤게모니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선과 악은 보편적인 개념이다. 누구나 ‘저것은 선’ ‘이것은 악’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개념이 있다.

그렇지만 이 개념이 삼성으로 넘어오면 완전히 뒤틀리고 만다. 삼성에게 있어 선(善)의 개념은 “삼성에 유리하면 모든 것이 선”이며 악은 “삼성에게 해를 끼치면 악(惡)”이 된다. 무소불위의 헤게모니를 지니게 된다는 의미이다.

보편적 상식 개념인 ‘선과 악’의 개념과 정의조차 바꿀 수 있는 집단이 삼성이라는 존재이

다. 과연 그 속에는 어떤 시스템이 흐르고 있을까. 그런 삼성에 끌려가는(?) 사람들-판검사, 변호사, 기자, 회계사 등등-은 왜 자처해서 ‘삼성 왕국’으로 걸어 들어가고 그것을 영광으로 삼을까.


삼성반도체 젊은 청춘들의 비극은 아직 진행 중 <삼성반도체와 백혈병>

반올림에서 발간한 <삼성반도체와 백혈병>은 삼성반도체 공장에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했거나 혹은 투병을 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성반도체 공장에 근무한 몇 년 뒤 백혈병에 걸려 죽어간 이들⋯그들은 모두 젊은 청춘들이었다.

황유미, 박지연 씨 등의 죽음⋯꽃다운 나이에 그들은 위대한(?) 삼성에 입사해 처절하게 죽어갔다. <삼성반도체와 백혈병>은 황유미 씨의 죽음이 남긴 것을 시작으로 반도체 공장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짚어본다.

백혈병이 삼성 직원들에게 발병하면서 대책위를 꾸리게 되고 산재 신청에 얽힌 잘못된 점과 역학조사를 둘러싼 공방 등을 탐사 보도 형식으로 담았다. 산재 승인이 되지 않은 현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규명하고 또 다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다뤘다.

<삼성반도체와 백혈병>은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라고 그들의 운동을 규정하고 계속 ‘싸워나갈 것’을 천명하고 있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변호사에 대해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워낙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당사자이며 삼성과 관련돼 가장 객관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검사 출신으로 삼성 법무팀에 근무하다 양심선언을 하게 되고 몇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이슈와 논쟁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통해 ‘삼성의 참 모습’에 접근하고 이다.

차명계좌를 이용한 비자금 조성과 검찰과 법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삼성의 인맥구조와 조직체계 등을 체험적으로 기록했다. 삼성 구조본의 역할과 그들의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의 활동, 그리고 삼성을 둘러싼 모든 문제점을 해결하는 그들만의 노하우 등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한다.

삼성에 맞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함께 맞서 싸워 나갔던 과정을 그렸고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용을 통해 “삼성이 변하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프레시안 편집부의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편집부에서 엮은 <삼성왕국의 게릴라들>은 거대한 ‘삼성 공화국’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모습을 직접 취재하고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다.

삼성을 향해 칼을 뽑은 변호사-김용철

삼성에 시선 맞춘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경제 민주화 꿈꾸는 금산 분리 파수꾼-김상조 교수

'떡값 검사' 공개한 촌철살인의 비평가-노회찬 국회의원

삼성왕국과 전쟁 선포한 '심삼성' - 심상정 전국회의원

비정한 사회와 자본을 고발한 저널리스트-이상호 기자

무노조 신화에 맞선 다윗의 투쟁 - 김성환 삼성일반노동조합 위원장

이들 7인의 ‘게릴라’들이 삼성 공화국에 맞서 어떤 투쟁과 싸움을 전개했고 그동안의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 등을 살폈다.

끝나지 않은 외침과 울음⋯어찌 해야 하는가

신경림 시인의 시들 속에 삼성으로 인해 죽고, 삼성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이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새벽잠에서 일어나 기사를 접하고, 출근길에 읽는 시가 무척이나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5.18 광주민중항쟁의 희생자들에게 바친 <씻김굿> 또한 시대만 달라졌을 뿐 삼성에 대입하면 그대로 읽혀진다.

염무웅 선생은 신경림 시인의 시를 해석하면서 “삶과 문학의 길을 오로지 꼿꼿하게 걸으면서 자신과 같이 외롭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빌려주고 그들의 꿈과 희망을 우리 문학세계의 한복판에 깃발처럼 우뚝 심어놓은”이라고 신경림 시인을 평가했다.

‘외롭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빌려주는 존재⋯그러나 삼성은 위에서 언급된 책을 통해 살펴보고 분석해 보면 ‘외롭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무뢰하고 권력에 예의바른’ 존재로 다가온다.

삼성반도체 공장에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죽어간 꽃다운 그들과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는 故 김주현 씨의 명복을 빈다.

편히 가라네 날더러 편히 가라네

꺽인 목 잘린 팔다리 끌고 안고

밤도 낮도 없는 저승길 천리 만리

편히 가라네 날더러 편히 가라네

잠들라네 날더러 고이 잠들라네

보리밭 풀밭 모래밭에 엎드려

피멍든 두 눈 억겁년 뜨지 말고

잠들라네 날더러 고이 감들라네

잡으라네 갈가리 찢긴 이 손으로

피묻은 저 손 따뜻이 잡으라네

햇빛 밝게 빛나고 새들 지저귀는

바람 다스운 새 날 찾아왔으니

잡으라네 찢긴 이 손으로 잡으라네

꺽인 목 잘린 팔다리로는 나는 못가,

피멍든 두 눈 고이는 못 감아,

못 잡아, 이 찢긴 손으로는 못 잡아,

피묻는 저 손을 나는 못 잡아

되돌아왔네, 피멍든 눈 부릅뜨고 되돌아왔네

꺽인 목 잘린 팔다리 끌고 안고

하늘에 된서리 내리라 부드득 이빨 갈면서

이 갈가리 찢긴 손으로는 못 잡아,

피묻은 저 손 나는 못 잡아,

골목길 장바닥 공장마당 도선장에

줄기찬 먹구름 되어 되돌아왔네

사나운 아우성 되어 되돌아왔네(<씻김굿> 전문)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새벽마다 행복이라는 한 조각에 젖어든다.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 녀석은 저녁 9시만 되면 꾸벅꾸벅 졸음에 빠진다. 분명히 자기 방에서 자기 시작한 녀석이 새벽이면 잠자리를 옮긴다. (거의 매일)화장실에 들렀다 자기 방으로 가지 않고 우리 방으로 살포시 기어들어 온다. 아마 새벽 4~5시 사이가 아닐까 싶다. 5시50분에 알람이 맞춰져 있는 휴대폰 소리에 일어나 보면 아들 녀석이 아내와 내 사이를 확연하게(?) 가로질러 누워 있는 모습을 본다.

얼굴 방향이 늘 엄마 쪽이란 게 좀 서글프지만. 살짝 손으로 얼굴을 내 쪽으로 돌릴 냥 치면 곧바로 엄마 쪽으로 향해 버린다. 자동이다. 모유를 오랫동안 먹었던 탓일까, 엄마를 향한 얼굴 표정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런 아이를 볼 때마다 희미한 웃음과 행복감이 밀려드는 새벽이 좋다. 커가면서 점점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아직도 새벽에 부모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아이가 사랑스럽다.

신채호 선생의 ‘내 사랑, 내 조국’

1928년 중국 북경.

한 줄기 찬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책상 앞에 앉아 앞으로 무정부주의 활동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우리나라 역사를 재정립하는 작업에도 몰두하고 있었다. 시대는 암울했다. 일제의 교묘한 식민지 정책은 한반도를 넘어 이곳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책을 앞에 둔 신채호 선생은 순간 자신의 눈을 비볐다. 바로 눈앞에 놓여 있는 글자가 가물가물해지더니 희뿌연 안개가 뒤덮이고 마침내 보이지 않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이러다 실명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신채호 선생은 고국의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최근 갈수록 눈이 침침한 것이 이러다 실명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소. 큰 아이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으니 사진 한 장 동봉해 보내주기 바라오.”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지만 아이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편지를 접한 아내는 만사를 제쳐두고 사진을 보내는 대신, 아이를 업고 북경으로 직접 달려갔다. 아내와 아이를 마주한 신채호 선생은 기쁨과 함께 슬픔이 몰려들었다. 한 달 동안의 달콤한 가족생활도 잠시, 신채호 선생은 다시 아내와 아이를 고국으로 돌려보낸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단란한 가족과 함께 있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헤어졌고 1929년 신채호 선생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대련 감옥에 수감된다. 이어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가족생활은 더욱 어려워진다. 감옥에서 아내가 풀장수로 겨우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신채호 선생. 그는 부인에게 비통한 심정의 편지를 보낸다.

“내 걱정은 말고 잘 지내시오. 정 할 수 없거든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시오.”

염무웅 선생의 <문학과 시대현실> 중에 나오는 내용이다. 염무웅 선생은 “단재 선생의 전기와 연보에 기록된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나는 솟구치는 감동에 눈물이 도는 것을 억누르지 못한다.”고 적었다.

종로에 길 잃는 아이 찾기, 팔봉의 ‘자기만의 사랑’

1932년 서울 종로.

네 살배기 아이와 한 살 아래인 조무래기가 엿장수를 따라가고 있다. 무작정 엿장수 가위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두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한 스님이 아이들을 근처 종로파출소에 데려다 주였다. 순사들이 아이들에게 집 주소며, 어디 사는지 물었지만 네 살, 세 살의 아이들에게는 어려운 질문이었다. 아이들은 겁도 나고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그때 어떤 할머니가 나타나 부모가 찾을 때까지 자신이 아이들을 돌보겠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아이들은 알지도 못하는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근처 할머니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즐겁게 지냈다. 이때 할머니의 대문을 박차고 아이의 아버지가 들이 닥쳤다. 팔봉 김기진이었다.

팔봉은 아이들을 보자 양팔에 한 명씩 끌어안고 할머니 집을 나와 인력거에 아이들을 태웠다. 그리고 자신은 인력거 뒤를 따라 가면서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회사에서 부리나케 뛰어 온 팔봉이 곧바로 아이를 찾은 것이다.

팔봉은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맡고 있었다.

염무웅 선생이 <문학과 시대현실>에서 단재와 팔봉의 ‘내 사랑, 아이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에피소드 때문이다. 1995년에 염무웅 선생이 발간한 비평집이 <단재상>과 <팔봉비평문학상> 등 두 상을 한꺼번에 받게 됐다.

염무웅 선생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단재와 팔봉의 한 단편을 묘사했다. 그리고 나지막이 “단재와 팔봉은 그 성격상 너무나 다른 인물인데...”라며 이 이야기를 전해준다.

단재의 올곧은 자주와 민족정신에 비해 팔봉은 친일 행적으로 후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은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런 두 인물을 기리는 상은 동시에 받게 됐으니 참 난감했다고 회고했다.

<문학과 시대현실>은 읽는 중에 있는 나에게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말 그대로 문학은 ‘시대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참혹하고 잔인했던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두 인물의 편린을 살짝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피붙이를 사랑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실명이 되기 전에 아이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며 사진을 부탁했던 신채호,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 종로 거리를 헤맸을 김기진,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단재와 팔봉의 ‘내 사랑 내 곁에’는 그 결말에 이르면 무척이나 다르다. 단재는 ‘아이 사랑’을 ‘나라 사랑’으로 이어갔지만 팔봉은 친일 행적으로 ‘자기 자식만 사랑’한 사람에 머물고 말았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은 무엇이었을까.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많은 시민이 죽고,

5.16 쿠데타로 군부정권이 들어서 유신까지 펼쳐지고

5.18 광주민주화항쟁으로 많은 시민이 죽어간,

80년대 대학가에서 젊은 학생들이 몸을 던져 자신을 희생한,

그 비극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그 시작은 친일세력에 대한 명확한 ‘짚고 넘어가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일제에 빌붙어 자신의 가족과 편리만을 위해 식민지 국민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핍박한 이들이 있었다.

특히 그 당시 사회적 지도자에 있었던 사람이었다면, 이는 분명히 책임을 묻고 짚고 넘어갔어야 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들어서고 친일세력들은 그대로 미군정의 책임자로 둔갑했으며 독립 운동가들이 오히려 또 다시 고통 받는 시대에 이른다.

그 해결 못한, 풀지 못한 비극이 4.19→5.16→유신→5.18까지 이어진 것이다.

신채호 선생의 “정 할 수 없거든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시오.”라는 이 말에 염무웅 선생의

“솟구치는 감동에⋯”라는 말은 누구나 공감한다. 눈물이 감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당시 우리나라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신채호 선생에게 감사하는 마음,

그런 분이 우리나라에 있었고 그로 인해 감동과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

이 땅에 태어난 우리들의 축복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