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살기 전 그곳에 늪이 있었다.

삶의 터전이었던 어부들은 이날 배를 띄우지 않았다.

야생 오리들이 헤엄치고

흰 날개짓 우아하게 그리는 백로는 더 넓게 하늘을 날았다.

사람들은 찾아 오고

1만년 된 물은 아직도 흐르고 있다.

뜨거운 피 속으로

인간의 피 속으로

스며들면 좋았겠지만

인간의 피는

늪의 물에 닿지 못한다.

보고 보고

또 쳐다보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늪의 깊이를 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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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가문의 영광이겠다

초고속승진이라는 키워드가

포털 인기검색어에 랭크됐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되뇌겠는가

가문의 영광이겠다

남의 입이 됐다는 소식이

늘 뉴스의 중심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그 이름을 불렀겠는가

가문의 영광이겠다

후배들보다는 위에 충성했고

그 충성이 언제나 한결같았으니

얼마나 많은 고위층들이 보듬어 주었겠는가

 

가문의 수치겠다

초고속승진이라는 키워가

포털 인기검색어에 랭크됐으니

지난 시절, 인기검색어에

‘욕설녀’ ‘된장녀’ ‘막말녀’ 등도 있었으니

가문의 수치겠다

남의 입이 됐다는 소식이

늘 뉴스의 중심이었으니

내 입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은 게지

가문의 수치겠다

후배들보다는 위에 충성한,

위는 몇 년이면 스쳐지나가지만

아래는 늘 그곳에 있다는 것을 망각했겠지

 

가문의 영광과

가문의 수치라는

이 짧은 단어 사이에서

주저 없이 일시적 가문의 영광을 선택한 그녀에게

이젠,

가문의 수치가 영원히 역사로 기록되고

죽어서도 지워지지 않을 터이니

슬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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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오늘은 좋은 사람 여덟 명이 집을 방문할 것이니...좋은 안주와 술을 준비해 놓도록 하거라.”

때는 조선 중종 시절. 병조판서(지금으로 따지면 국방부장관)를 지낸 신용개는 하인들에게 분부한다. 조금씩 어둠이 밀려들고 때는 가을, 국화 향기가 물씬 묻어나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하인들은 안주와 술을 준비하고 기다린다. 어둠은 더욱 짙게 내려앉고, 그러나 손님 여덟 사람은 올 줄을 모른다. 밤이 점점 무르익는데도 신용개는 미동도 없이 책상에 앉아 글을 읽고 있다. 안달이 난 것은 하인들이다. 졸려 죽겠는데!!!

“대감마님! 손님이 언제 오십니까? 술상은 벌써 준비해 놓았습니다.”

(하인들의 독백: 우리도 빨리 들어가서 좀 자자! 책만 읽고...도대체 놈들은 온다는 거여, 안 온다는 거여?)

그러나 신용개는 하인들의 물음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시간을 더욱 흘러 달빛이 조용히 툇마루에 스며들고 밤이 무르익었을 무렵 신용개는 서책을 덮고 조용히 일어나 술상 앞으로 간다.

“손님들은 이미 와 계신다.”

그러면서 아침나절 툇마루에 옮겨놓은 국화 여덟 송이를 쳐다본다. 붓거니 잣거니 신용개는 국화 여덟 송이에게 한잔 한잔 술을 따르고 자신도 따라 마신다. 그렇게 신용개는 가을 향기 묻어나는 저녁, 국화 여덟 송이와 술에 대취한다.

신용개는 술을 아주 좋아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사헌부와 사간원(왕에게 신하들의 잘잘못을 직언하는 직책)들에게 탄핵을 받기까지 하는데 탄핵의 이유가 단순하다. 그 이유인즉슨 “신용개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업무를 보지 못합니다.”는 것. 이쯤 되면 얼마나 술을 좋아했을 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또 하나. 신용개가 중종에게 사직서를 내밀었다. 그러자 신용개의 능력과 재주를 아꼈던 중종은 적극 만류한다. 만류하면서 중종이 내놓는 선물이 걸작이다. 중종은 “내가 경에게 술을 내릴 것이니 사직하지 마라.”고 한다.

조선 역사에 깃들어 있는 민족정신

이수광의 <조선의 쾌인쾌사>에는 조선시대 쾌인(快人)으로 불리는 이들의 짧은 에피소드와 쾌사(快事), 유쾌한 일들에 대한 일화를 담았다. 한반도 국민으로 태어났다면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어느 것이든 한 가락 정도는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TV를 켜면 곳곳에 조선의 역사에 대한 드라마가 펼쳐지고, 서점에 가면 조선의 역사에 대한 수많은 책들을 만난다. 그 뿐인가. 만화를 통해서도 조선의 역사가 아이들에게 읽혀지고, 수많은 작품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 우리는 조선에 대해 이렇게 집착할까.

그것은 아마도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엄청난 양의 역사서가 그 원인일 것이다. 500여 년의 역사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있는 그대로 적어 후세들에게 그대로 물려준 그들의 시대정신에 감탄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왕조실록의 우수성과 대단함은 그 기록하는 방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은 자신의 통치시절의 역사를 절대 볼 수 없다. 왕이 죽고 나서야, 그 왕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는 실록청이 신설되기 때문에 절대 자신의 역사를 살아서는 볼 수 없다. 그러니 왕들의 경우, 생존했을 때 더욱 조심했을 것이다.

또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역할도 한몫한다.

조선 태종시절 때 민인생이라는 사관이 있었다. 태종이라면 알다시피 무시무시한 군주 아니었던가.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왕에 올라, 자신의 처남을 죽이고, 왕권에 도전하는 거의 모든 신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차갑고 냉철한 군주였다.

어느 날, 태종이 사냥을 나갔다. 당근! 민인생은 붓과 종이를 들고 쫄래쫄래 따라 나선다. 태종은 무인답게 사냥을 즐겼고 사냥솜씨도 일품이었다.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군주였다. 그때 사슴 한 마리가 태종 앞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저만치 ‘겅중겅중’ 뛰어 나간다. 태종은 말을 달려 사슴을 좇았다. 그런데 아뿔싸, 그만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 말이 쓰러지고 태종이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민인생은 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종이에 기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종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옷을 털털 털고 민인생에게로 조용히 다가왔다.

태종: (궁금증)“지금 무엇을 적고 있는 것인가?”

민인생: “......”

태종: (사실확인)“경은 내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인가?”

민인생: “......”

태종: (협박)“그것은 적지마라! 만약 적었다가는 내 그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민인생: “......”

태종의 궁금증과 사실 확인, 급기야 협박성 명령에도 민인생은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한 것은 태종일 수밖에. 태종은 다른 신하들을 멀리하고 민인생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 안으며 한적한 곳으로 그를 데려간다. 마치 동무를 대하듯이.

태종: (다시 한 번 확인) “경은 내 말을 알아들었는가?”

경고하다시피 민인생에게 윽박질러 보지만 민인생은 이번에도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조바심이 난 태종. 아주아주 조용한 말투로.

태종:(애원조로) “그...한번만 봐주게. 아! 사실 말에서 떨어진 것은 맞긴 맞는데 후세대들이 보면 내가 쪽팔리지 않겠는가? 어떻게 좀 안되까?"

그때서야 민인생이 한 마디 한다.

민인생: “사관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적을 뿐 평가는 후세대들이 하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전하! 사관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게임 끝! 태종은 민인생의 이 말에 아무런 대구도 하지 못하고 그날 사냥을 접고 궁궐로 후퇴했다. 태종이 쫓던 사슴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낼름거리며 멀리 도망갔다나 어쨌다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조선의 역사

조선의 역사는 곳곳에 후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드라마적 요소가 무궁무진 숨어있다. 태종이 장남인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는 드라마적 요소.

그러나 단종때 대 반전극이 펼쳐진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이 왕위를 물려받고, 문종의 아들 단종이 왕위를 다시 물려받게 되지만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강제 퇴위당하고 마는 단종. 그때 양녕대군은 단종의 폐위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세조의 편에 서서 단종을 폐위시키는 일등공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 두고 후세 역사가들은 양녕대군이 자신이 물려받아야 할 왕위를 세종이 가져가면서 세종의 손자(단종)에게 복수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단편적인 사실만 두고 하는 것이겠지만.

이런 반전과 함께 곳곳에 여자들이 등장한다. 인수대비, 문정왕후, 장녹수, 장희빈, 인형왕후…

그 방대한 역사는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방대한 글을 통해 그대로 전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왕과 여자, 왕과 신하, 여자와 여자 등 입체적인 갈등이 그대로 묘사돼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선왕조실록은 한편의 거대한 장편 서사 드라마 교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설명이다.

그 속에서 반전과 반전이 거듭되고 곳곳에 후세대들이 느끼게 하는 카타르시스가 숨겨져 있다.

은근한 은유에 숨어있는 날선 비판

글이 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다시 <조선사 쾌인쾌사>로 돌아가 보자. 이제 은유 속에 숨겨져 있는 은근한 비판이자 날선 칼날들을 만나보자.

송도 기생 설매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은 담고 있다.

때는 태조 이성계 시절, 나라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공신들을 위한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중 송도 기생 설매의 모습은 화용월태. 꽃이 이 보다 아름다울 수 있으며 달빛이 이 보다 더 고울 수 있을까. 설매의 모습은 여러 신하를 유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기생들의 노래도 익어가고, 많은 공신들이 설매를 어떻게 해 볼까 적극적으로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한 공신이 설매에게 묻는다.

“듣자니 기생은 아침에는 동쪽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는 서쪽에서 잠을 잔다고 하는데, 오늘 밤 이 늙은이에게 수청을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기생을 노류장화라고 했던가. 길가에 피어있는 버드나무와 담장아래 있는 꽃처럼 누구나 쉽게 꺾을 수 있는 존재. 그러나 조선시대 기생은 기개와 절개가 있었다. 이 말은 들은 설매는 낯 빛 하나 변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이렇게 응수한다.

“동쪽에서 밥을 먹고 서쪽에서 잠을 자는 것은 노류장화의 본분입니다. 왕 씨도 섬기고 이 씨도 섬기는 대감과는 유유상종이 아니겠습니까? 모시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게임 끝! 졸지에 유유상종. 같은 부류로 분류돼 버린 늙은 중신! 이 늙은 중신은 그날, 자신이 생각하기에 한갓 기생에게 보기 좋게 당한 셈이다. 그윽한 은유 속에 숨겨져 있는 날선 비판에 날카로운 칼이 숨겨져 있지 않은가. 과연 그날 공신은 설매와 같이 잠자리에 들 수 있었을까.

후세들을 즐겁게 하는 조선의 역사

조선의 역사가 즐거운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출판의 왕국’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수많은 개인문집들이 출간됐다. 어떤 형태로든 문집으로 엮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성리학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유학에 관한 서적이 많았지만 그 중에는 서민들에게 웃음을 주는 쾌담과 허풍스러운 이야기들도 많이 전해진다. 그런 유산들이 후세들에게 그대로 전해졌으니 우리 민족은 축복받은 민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의 쾌인쾌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만 더 인용해 보자.

조선의 큰 절 중에 합천의 해인사와 평양의 석왕사가 있었다. 이 두 절에는 전해오는 전설이 있는데 해인사의 가마솥이 엄청 크다는 것과 석왕사의 해우소가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두 절의 스님이 서로 확인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러다 중간 지역에서 떡하니 만난다.

먼저 석왕사 스님이 해인사 스님에게 묻는다.

석왕사 스님: “내 들으니 해인사 가마솥은 그 크기가 엄청나다고 하던데, 도대체 얼마나 큽니까?”

해인사 스님: “글쎄요, 좀 크긴 합니다만 제가 정확히 설명은 드릴 수 없고 다만, 큰 스님이 얼마 전 가마솥에 팥죽을 끓이다가 팥죽을 젓기 위해 가마솥에 조각배를 띄워 떠났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헉! 석왕사 스님을 놀래 자빠졌다. 이번에는 해인사 스님이 묻는다.

해인사 스님: “석왕사도 전설이 있던데 해우소가 그렇게 크다고 들었습니다. 그 크기가 얼마만 합니까.”

석왕사 스님: “해인사의 가마솥에야 비견할까마는 제가 평양을 떠날 때 큰 스님이 대변을 보셨는데 아직 그 대변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헉! 해인사 스님이 이번에는 뒤로 넘어졌다.

조선의 역사는 파란만장한 우리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때론 감동으로, 때론 짙은 연민으로, 때론 웃음으로, 때론 절망으로, 때론 희망으로….이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조선의 역사! 무엇보다 그곳에서부터 현재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조선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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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임오년 세 남자…사도세자·정조 그리고 정약용
<사도세자의 고백>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임오년 1762년. 249년 전 그날 어떤 남자들의 운명이 있었던 것일까.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태어난다. 죽은 사람은 사도세자였으며 태어난 사람은 삼미자(三眉子) 정약용이었다. 임오년의 죽음과 탄생은 모두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태어난 정약용도 그 우연의 비극 때문이었을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다.

한 인간의 탄생은 우연과 필연이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역사를 보더라도 혹은 지금의 사회를 보더라도 개인의 능력만으로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능력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

이런 인간의 세상사를 이미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일까. “살아가는데 있어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정말이지, 사람을 잘 만나야 자신의 능력도 발휘하고 꿈도 실현할 수 있다.

사도세자는 사람을 잘못 만나게 되는 비운의 왕자였다. 물론 그의 책임이 아니다. 그가 태어났던 환경 자체가 그렇게 만들었다. 리더에게 중요한 덕목으로 세 가지가 있다. 집안 살림능력과 조직 장악능력, 그리고 역사인식.

이 세 가지를 골고루 갖췄을 때 한 리더는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다. 사도세자의 역사인식은 리더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권력 장악에서 그는 밀리고 만다. 당시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인간들이 문제였다.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이때 이복 동생 연잉군(영조)은 죽음의 두려움에 휩싸인다. 가뜩이나 무수리의 아들이란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던 연잉군은 곧 자신에게 죽음이 닥쳐올 것이라고 스스로 자책한다. 조선시대 왕위를 물려받은 왕자는 권력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왕자는 권력의 견제를 받으며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연잉군에게 구세주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노론세력이었다. 경종은 임금에 오르면서 노론의 집중 견제를 받는 운명이었다.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는 남인계열이었다. 노론에게 조선시대의 당파는 노론밖에 없었으며 다른 당파는 철저한 제거 대상이었다. 연잉군의 어머니 최씨는 노론 편이었다. 노론의 선택은 현재의 왕을 인정하지 않고 연잉군에게 물려주는 것만이 생존권을 보장받는 일이었다.

노론은 경종에게 후사가 없음을 계속 지적하면서 왕세제로 연잉군을 봉하라고 강요하다시피 한다. 노론의 전술과 전략에 따라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연잉군은 왕세제로 임명되고 얼마 뒤 경종은 병으로 승하한다. 독살설이 제기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연잉군, 영조는 노론의 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주고 왕에 등극하게 한 세력은 노론이었으며 따라서 영조는 당파를 떠나 인재를 골고루 발탁하겠다는 ‘탕평책’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론의 왕’이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사도세자의 주변을 둘러싼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해 사료를 통해 짚어보고 있다. 아버지 영조, 노론, 사도세자의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이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역사적 자료를 통해 살펴보는 책이다.

과연 사도세자는 광폭한 행동과 이해할 수 없는 정신병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그 시대, 여러 가지 사건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을까. 아버지인 영조와 노론 세력의 철저한 전략과 전술에 따라 노론과 맞서고자 한 사도세자의 운명은 이미 결정돼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의 권력자는 어떤 절차를 통해 정해졌을까.

조선시대 최고 권력자인 임금이 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왕과 신하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왕이 직접 후계자를 지목하는 경우(이것은 당연히 세습이다)와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의 경우가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왕권이 강력했기 때문에 왕이 세자를 선택(대부분 장자승계 원칙)했지만 후기 조선사회로 넘어오면서 신권이 강력해 지면서 신하가 왕을 선택하는 택군의 시대로 접어든다. 영조도 자신 스스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노론 세력이 그를 왕으로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따라서 당시 노론 세력에 맞선 사도세자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될 확률은 낮았다. 아니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거대상 1호였다.

사도세자는 그렇게 노론 세력에 저항하다 노론 세력에 의해 제거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것이 임오년, 1762년이었다.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 또한 우연이었다.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여러 해 동안 공부하면서 반제(泮製. 정기적으로 보는 성균관 시험)에 매번 수석을 차지했다. 반제에 1등을 하게 되면 왕을 직접 접견한다. 여러 번 정조를 만났다. 그러나 유독 과거와는 인연이 없었다. 예컨대 학교 시험은 매번 1등을 하지만 학력고사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그렇게 정조를 몇 번 만나던 어느 날, 정조가 정약용에게 애처롭게 묻는다.

“몇 년 생인고?”

정조의 이 물음은 나이가 이제 제법 되었을 텐데 아직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고 있느냐는 질책성 의미도 섞여 있었다.

그것을 모르니 없는 정약용은 맥없이 대답한다.

“임오년생이옵니다.”

정약용의 대답에 정조와 정약용 둘 다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정약용은 ‘아차’ 싶었다. 정약용도 ‘임오년’이 어떤 해였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약용이 그러할 진대 정조는 오죽했을까. 정조와 정약용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임오년! 정조에게 임오년은 잊을 수 없는 해였다.

정조는 정약용의 ‘임오년’이란 대답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렇게 정조와 정약용의 필연과 우연은 ‘임오년’을 계기로 서로의 기억 속에 각인된다. 이후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 아래 차근차근 학문의 길을 걷게 된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에서부터 그의 주변 인물들에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약용의 비극은 아마도 천주교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승훈과 이벽 등 정약용의 주변에는 천주교와 큰 인연이 있다. 그 중에는 황사영도 있다.

18년 동안 유배의 길에 오른 것도 천주교가 시작이었다. 당시 천주교는 서학이란 이름으로 철저한 배격 대상이었다. 노론 세력에게 천주교는 그 이념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천주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싫었다. 따라서 천주교가 어떤 학문이든 그것은 탄압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정약용은 앞서 언급했듯이 ‘임오년’의 인연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게 되고, 물론 그의 능력이 뒤따랐기 때문, 정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한다. 한 때 잠깐 귀양(정조의 의도적인 견책)을 가던 중 온양을 통과한다.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요양을 위해 온양온천에 행궁을 한 적이 있음을 기억하고 당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촌부에게 묻는다. 당시 사도세자 행차를 직접 목격한 촌부의 일화는 사도세자의 인간성을 엿보기에 충분했다. 촌부의 말을 옮겨보자.

“저하(사도세자)의 행렬이 이곳에 이르고 잠시 쉬는 사이 군마들이 수박밭을 짓밟으면서 수박밭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때 저하께서는 수박밭의 주인들을 모두 불러 보상금을 일일이 지급하고 깨진 수박은 거둬 목마른 병사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정약용은 그 말을 듣고 이보다 더 현명한 군주는 없었을 것이라고 감동을 받는다. “피해를 본 주인들에게는 돈으로 보상하고, 또 목마른 병사들에게 수박을 나눠줌으로써 갈증을 해소하고, 아무도 피해를 보지 않고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한 사도세자의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판단한다.

그런 현명한, 현명했을 사도세자는 지금 가고 없는 상황, 정약용의 가슴으로 허허로운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임오년의 세 남자.

사도세자와 정조 그리고 정약용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정조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한마디로 자신의 정체성을 대내외에 공표한다.

“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보다 저 명확한 자기 정체성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명확히 한 셈이다. 노론의 공포심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자신들이 죽인 사도세자, 이제 그의 아들이 권력자가 되었고, 취임하는 날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포하는 정조! 노론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한 정조는 사도세자의 복위에 온 힘을 바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는 일을 꼽았다. 책임자로 정조는 정약용을 임명했다. 임오년의 세 남자가 다시 뭉칠 수밖에 없었다.

정약용은 화성신도시를 만들면서 기중기 등 첨단 기계를 만들어 백성들이 쉽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한강 배다리이다. 수십 척의 배를 서로 묶어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위대한 작업! 수원 화성으로 갈 수 있도록 만든 배다리!

이 배다리야 말로 임오년 세 남자의 걸작품이 아닐 수 없다.

한을 품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남자, 사도세자!

아비 사도세자의 죽음을 바로 앞에서 목격하면서도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했던 남자, 정조!

사도세자와 정조의 비극을 온 몸으로 체득했던 남자, 정약용!

임오년 세 남자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 바로 한강 ‘배다리’였다. 그 배다리는 사도세자와 정조, 정약용을 맺어주는 상징이자 실체였다.

배다리를 만들며 정약용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약용이 만든 배다리를 건너는 정조의 감격은 어떠했을까.

마침내 경기도 화성으로 안식의 터를 잡은 사도세자의 넋은 위로를 받았을까.

<사도세자의 고백>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를 쓴 이덕일 교수의 책을 개인적으로 참 많이 읽었다. <송시열과 그의 나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조선선비 살해사건>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등은 읽는 재미와 함께 또 다른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였다.

이덕일 교수의 책은 읽기에 참 편하다. 아마도 그것은 역사적 자료의 충분한 근거와 다양한 시각을 담은 노력 탓이지 않을까 싶다. 문체도 일반 역사서와는 차별 점을 두고 있다.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수필을 읽는 듯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이덕일 역사서’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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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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