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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04 우울한 날에 ‘전화벨’은 울리고…<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오늘 아침은 우울하다. 나로 인한 우울이 아니라 세상의 모습이 우울하다는 것이다. 나는 아침 5시50분에 일어날 수밖에 없다. 알람을 그렇게 맞춰 놓았다. 잠자리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알람이 있기 때문에. 알람을 해제하고(해제하지 않고 꿋꿋이 잠을 계속 자면 5분마다 자동으로 다시 울린다)아이패드로 YTN 아침 6시 뉴스를 들으며 출근 준비를 한다.

뉴스를 시작하는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뉴스가 시작됐다. 첫 번째→고물가 시대 서민들 울상, 두 번째→기름 값 서울에서 2천200원대 진입, 세 번째→대학생 집값 등록금 인상에 설렘 대신 한숨…3월4일의 아침은 모두 물가와 관련된 뉴스로 시작되고 끝을 맺었다. 어디에도 아침의 고요와 어울리는 뉴스는 존재하지 않았다.

출근길도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곤지암에서 강변역까지 광역버스를 이용하고 강변역에서 지하철로 환승한다. 그런데 이번 주부터 버스 안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버스가 바뀌었거나 혹은 인테리어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승객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 변화는 봄방학을 끝낸 학생들이 대거 몰린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내가 타는 버스가 곤지암을 출발해 광주시 초월읍에 다다랐을 때 입석 승객이 생긴다. 그런데 이번 주부터는 초월읍에 이르기 한참 전, 곤지암에서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벌써 승객들로 가득 찼다. 전과 비교했을 때 승객이 50% 정도는 증가한 것으로 보였다.

기름 값이 올라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서울 전세 값의 폭등으로 서울을 포기하고 경기도 광주 등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아마 이 두 가지 이유 모두 승객 증가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하니 역시 ‘돈’ 문제가 이 시대 가장 큰 고민이자 우울한 주제라는 사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언뜻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아마도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읽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온 신간이었다. 그때 언뜻 든 생각은 “신경숙 작가는 대단한 작가인가 보다. 몇 달 만에 장편소설을 또 한권 내놓다니…”였다. 또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라는 소설이 뭔가 우울한 감성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80년대의 대학은 어땠을까.

날이 밝으면 학교로 뛰어가고 싶고, 짱짱한 햇볕이 쏟아지면 가슴이 두근구근하고,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우산도 쓰지 않고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고독이 있었을까. 우리가 살아온 길은 나의 길이기도 하기 때문에 되돌아보는 것은 즐겁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다.

한 인생을 생각해 본다. 마냥 즐거운 기억과 줄곧 고통스러웠던 기억만 간직한 삶이 있을까. 그 어떤 삶이든 365일 즐거운 기억도, 고통스러운 기억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삶이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다가올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감정이 아닐까.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읽기에 고통스러운 한편의 장편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소설은 네 명의 쓸쓸한 청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디언이 말을 신나게 달리다 갑자기 멈춰 선다. 너무 빨리 달리면 자신의 영혼이 좇아오지 못할까 하는 걱정 때문이란다. <어디선가 전화벨이…>은 정윤, 윤미루, 단이, 이명서......네 명의 청춘, 네 명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경숙 작가의 젊은 시절 이야기라고 해도 무관하지 않을 듯.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전화벨이…>를 모두 읽어 본 사람이라면 신경숙 작가가 지니고 있는 그만의 매력을 읽을 수 있다. 감성에 다가가는 문체, 이야기를 풀어가는 졸망졸망하면서도 아기자기한 구조, 작가가 그려나가는 글 속에 몰입되는 모습…분명 신경숙 작가가 지니고 있는 장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였을까.

자전적 소설이라 평할 수 있겠는데, 신경숙 작가는 언제까지 이 한계에 갇혀 이런 소설만을 쓸까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전화벨이…>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여러 편의 우울한 에세이를 겹쳐놓은 느낌이었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의 전형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은 모두 작가가 만들어낸 인형이다. 그 인형이 작가에 의해 뼈가 만들어지고, 살이 붙고, 독특한 의상과 버릇, 몸짓...인간이 가진 모든 것들이 창조되면서 독특한 인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이 많은 독자들에게 다가간 매력은 수많은 인물들의 캐릭터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즉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마치 그 시대에 실제로 존재했던 구체적 인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때론 나의 친구 같기도, 때론 나를 괴롭히는 악당처럼 다가올 때 소설은 소설로 읽힌다.

신경숙의 <어디선가 전화벨이…>은 그렇지 못했다. 정윤, 윤미루, 단이, 이명서 이 네 명의 청춘은 ‘한 명’이었다. 모두 우울했고, 모두 고독했고, 모두 쓸쓸했으며, 모두 80년대의 암울한 캐릭터를 연출하고 있다. 그러니 인물들의 갈등 구조, 역사인식에 대한 태도는 고사하고 그들만의 버릇과 색깔, 동작 등이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의 청춘에 대한 넋두리만이 책 한권을 가득 채웠다.

<어디선가 전화벨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문장은 “어디야? 내가 그쪽으로 갈게."라고 해도 좋겠다. 이 말은 소설 속 이명서가 윤과 통화할 때 자신이 언제나 윤 쪽으로 가겠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윤이 단이에게, 단이 미루에게, 미루가 명서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전혀 낯설지 않다. 소설 속 네 명의 청춘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가졌지만 ‘80년대 청춘’이라는 한 인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충남대 오길영 교수는 <‘비평가’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면…‘신경숙을 부탁해!’(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01015135422&section=04)>라는 비평을 통해 “내가 보기에 그들의 이야기(네 명의 청춘)는 그들과 같은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내가 보기에는 진부하고 상투적이다”라고 지적한 뒤 “이 작품에 많은 고통이 그려지지만 많은 묘사들이, 적어도 내가 읽기에는 실감나는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신경숙은 고통을 고통스럽지 않게, 아름답게만 그린다”라고 비판했다.

분명 고통스러운 청춘들의 모습인데 이상하게 신경숙 작가의 글에서는 그 고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마치 고통을 즐기는 듯한, 그리고 그 고통이 낭만적인 풍경 같기도 한 느낌이었다. 그러니 <어디선가 전화벨이…>은 소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에세이로 다가오고 더 나아가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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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