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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13 아프니까 산다…김인숙 <안녕 엘레나> (2)

통입골수(痛入骨髓).

아픔이 골수에까지 스며들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김인숙 작가의 <안녕 엘레나>는 통입골수의 아픔을 표현하고 있다. <안녕 엘레나>에 담겨져 있는 단편들의 모든 주제가 통입골수이며, “아프니까 산다.”는 말을 표현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중 <산너머 남촌에는> 단편이 제일 아프다.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있다.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별로 없다. 자식이 퇴근해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고, 손주 녀석들이 언제쯤 귀가할 까 궁금해 하는 일이 전부다. 마냥 집안에 앉아 있는 듯 없는 듯 그 존재마저도 가뭇하다.

아흔의 할머니를 등장시킨 것은 다만 나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개인적으로도 우울하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지만 역사 자체가 암울한 시대였고 통입골수의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기억이 되살아나고

할머니가 낳은 자식들은 모두 잘 컸다. 넉넉하게 사는 아이도 있고, 그렇지 못한 아이도 있지만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된다. 할머니는 모두 열두 명의 아이를 낳았다. 물론 지금 모두 살아있지 않다. 몇 명은 배 속에서 이미 죽어 태어났고 몇 명은 태어나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다섯 명 만 살아남았다. 그 중 한명은 배 속에서 인위적으로 수술을 통해 사장됐다.

열여덟에 시집와 마흔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주구장창 아이만 낳았다. 그 정도였으니 남편과 살가운 관계였지 않을까. 할머니의 말을 빌려보자.

“씹을헐놈! 외지를 떠돌던 남편이 몇 년 만에 돌아와 한 일이라고는 고작 씹질뿐이었으니...”

그랬다. 남편은 일본에 끌려 군대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또 외지를 떠돌아 다녔다. 외간 여자와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그렇게 남편이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였지만 그녀의 배는 때마다 불러왔다.

열한 번째 아이를 잉태했을 때 꼬박꼬박 모아놓은 돈을 갖고 병원으로 향했다. 다리를 벌린 채 의사에게 몸을 맡겼다. 그렇게 열한 번째 아이는 세상을 보지 못하고 제거됐다. 그날, 할머니는 읍내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 수십 번을 더 주저앉았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세 번쯤 주저앉았을 때, 문득 이마가 시원했다. 할머니의 말을 다시 빌려보자.

“아이고, 바람이 좋기도 하여라, 참으로 시원한 바람도 다 있구나. 세상에 이렇게 시원한 바람은 처음이로다.”

무겁게 당기는 듯한 아랫도리의 고통도 뒤로하고, 이마를 씻고 지나가는 그 바람이 얼마나 시원했던지, 할머니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세월은 지나, 다섯 아이들은 모두 컸다. 열두 번째 낳은 막내딸이 벌써 오십 줄에 들어섰으니...

그래서 할머니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귀밑 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아흔의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쳐 온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보는 것, 그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되살아나는 기억뿐이지 않을까.

할머니의 고통스런 기억은 고스란히 막내딸에게 전이된다.

미국으로 여행을 간 막내딸이 한 달 만에 돌아온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안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둘러싸고 누워 잠이 든다. 뭔가 이상하다. 막내답게 “엄마!”하고 와락 껴안는 것이 보통인데...

“잘 다녀왔느냐?”는 어미의 물음에도 막내딸은

“선물을 못 사왔네...엄마 선물을 사왔어야 했는데...”라며 가물가물 깊은 잠 속으로만 빠져든다.

다른 아이들을 통해 막내딸의 막내아들이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즉사했음을 전해 듣는다. 아! 얼마나 아팠을까. 그 마음이. 잠든 막내딸이 잠 속에서 이불을 계속 끌어당기자 할머니는 창문을 본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창문을 닫으려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 예의 또 그 ‘시원한’ 바람이 분다. 창문을 닫을 생각은 접어둔 채 잠든 막내딸을 보며 되뇐다.

“막내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 자신의 이마를 건드리는 바람을 느낄 때마다 어찌하며 미소가 떠오르는지 곰곰 생각해봐야 할 날이 올 것이다.”

‘아프니까 산다.’는 말이 절로 생각나게 하는 소설이다.

이 가(家)가 이 씨(氏)를 죽이다

김인숙 작가가 단단히 화가 났다. <그날>에 묻어 있는 문체와 구성을 보면 한 인물에 극도로 분노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 인물에 대한 적개심이 물씬 묻어난다. <그날>은 1909년 12월22일 이완용이 스물한 살의 이재명에게 칼을 맞고 폐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결국엔 살아나는 애석한 이야기를 담았다.

이재명 의사의 칼이 이완용의 폐를 관통하면서 넘치는 피의 모습과 그 속에서도 ‘살아만 나면...’ ‘살게만 되면...’이라고 외치는 이완용의 비겁함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미국에 공사로 떠났던 이완용이 미국에서 할 일 없이 시간만 죽이는 모습도 이완용의 인간됨을 표현하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다.

해방이 되고 일본이나 다른 나라로 모두 떠나버린 이완용의 후세들이 감히 땅을 다시 돌려달라고 대한민국을 상대로 소송을 벌인 경우라니...우리나라 역사는 아픔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몰지각, 몰염치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김인숙 작가는 <그날>의 마지막을 소설 형식이 아니라 팩트(사실 fact)를 중심으로 하는 신문기사 형식을 빌려 썼다. 그만큰 이완용이라는 인물에 대한 적개심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의미 있는 소설의 한 대목.

“이완용에게 칼을 휘두른 이재명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재판 당시, 재판장인 스기하라가 “피고와 같이 흉행(兇行)한 사람은 몇 사람이냐”고 묻자 이재명은 “이천만 대한민국 모두이다”라고 소리쳐 대답했다.”

통쾌한 대답이 아닐 수 없다. 이완용이 1909년 이재명의 칼에 죽었다면 그 다음해인 을사조약을 체결해 나라를 팔아먹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역사에서 가정을 하는 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지만.

우리를 더 아프게 하는 가족해체시대

<안녕 엘레나>에 실려 있는 다른 단편 <현기증> <숨-악몽> <어느 찬란한 오후> <조동욱, 파비안느> 등에는 모두 아픈 가족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내와 아이와 떨어져 혼자 생활하는 비행기 조정사와 동굴 이야기를 담은 <현기증>,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오빠에 대한 부채의식을 강하게 느끼는 쌍둥이 동생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어느 찬란한 오후> 등 김인숙의 단편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아픈 모습’의 내면이 고스란히 표현돼 있다.

아픈 기억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 아픈 기억은 세월이 지나고 보면 추억이라 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아픔이 후세대들에 까지 그대로 이어진다면 과연 추억이라 할 수 있을까.

김인숙 작가가 <안녕 엘레나>를 통해 보여준 ‘아픈 우리들의 모습’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그 아픔이 후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희망도 녹아들어 있다. 물론 현실은 아픔이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지만...

무엇보다 가족이 해체되면서 그 아픔을 나눠가질 수 있는 존재조차도 이제 가물가물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혼자서 아픔을 견디지 못해 누구도 알 수 없는 죽음을 맞게 되는 이들...우리 시대의 우울한 자화상이지 않을까.

아픔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아픔을 나눠가질 수 있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동료가 있다면 이 세상은 살아갈 만하다. 아픔은 기쁨이라는 이란성 쌍둥이를 데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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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