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봄비를 맞는다. 봄비는 조용히 내린다. 예전에 있었던 구멍가게에도, 힘들게 엉금엉금 비탈길을 올랐던 그 길에도, 퉁탕퉁탕 온갖 소리가 들려오던 움막집이 있던 그곳에도 봄비는 내린다.

그러나 지금은 구멍가게도, 비탈길도, 움막집도 모두 사라졌다. 대신 대형 마트가, 잘 깔린 아스팔트길이, 아파트가 그곳에 들어서 있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줄을 길게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던 풍경은 이미 추억의 사진이 된 지 오래다.

그곳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는 휴대폰이 분주하고 전철이 쌩쌩 달리는 달라진 세상에서도 여전히 같은 옷매무새와 머리 모양을 하고 소리 친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 내 아들을 살려내라!”

여자의 목소리는 언제가 똑같다. 달라진 것은 주변의 풍경과 사람들이다.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최신의 휴대폰을 들고 전철 속으로 들어간다. 봄비를 맞으며. 그러나 여자는 달라진 세상과 호흡하지 못한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때가 되면 나타나 “내 아들을 살려내라.”고 소리친다.

그렇게 소리치다 지쳐 갈 때쯤엔 악에 받친 목소리를 내뱉는다.

“용서하지 않을 테다. 용서하지 않을 테다.”

아들을 죽인 이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예전 그 모습 그대로의 여자! 여자도 봄비를 맞고 있다. 여자는 달라진 세상을 향해 소리친다. “용서하지 않을 테다.”라고. 세상은 대형 마트와 아파트가 들어서고 달라졌는데, 여자의 목소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그대로 지켜본다. 여자에게 다가가 “할머니 세상이 변했어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머니가 대신 해 주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나는 달라진 세상의 한 일원이 돼 있다.

달라진 세상에 순종하면서, 자본주의의 맹렬한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나는 할머니의 그런 모습을 지켜만 볼 뿐, 그녀를 부축하거나 그녀와 손을 잡고 같이 “내 아들을 살려내라.”고 소리치지도 못하고, “용서하지 않을 테다.”라고 악을 쓰지도 못한다.

모든 것이 변한 그곳에서 오직 변하지 않은 것은 할머니의 모습과 그 소리만이다. 할머니의 아들은 살아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봄비를 맞으며 할머니의 모습에서 달라진 서러운 옛길을 느낄 뿐이다.

신경림의 <봄비를 맞으며>가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실렸다. 신경림 시인이야 말해 뭤하겠는가. <농무>라는 시로 잘 알려진 시인이지 않는가. 그 스스로 힘겨웠던 현대사를 살아왔던 시인 중의 한 명이다. 그의 <시인을 찾아서>라는 책을 무척이나 재밌고 감명깊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봄비는 오는데 정작 봄은 오지 않고, 죽어간 아들을 살려내라는 찢어지는 고통, 가슴 속에 피맺힌 절규가 쏟아져 나오는 지금의 대한민국! 과연 우리는 달라진 이곳에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 여자가 하는 소리는 늘 같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 내 아들을 살려내라.
움막집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구멍가게들 대신 대형 마트가 들어섰는데도
그 여자는 옷매무새도 머리 모양도 같다.
공중전화 부스 앞에 줄을 서는 대신
모두들 제 휴대폰에 분주하고
힘들게 비탈길을 엉금엉금 기는 대신
전철로 땅속을 달리는데도,
장바닥을 누비는 걸음걸이도 목소리도 늘 같다
용서하지 않을 테다 결코 용서하지 않을 테다.

세상이 달라졌어요 할머니 세상이,
이렇게 하려던 내 말은 그러나 늘 목에서 걸린다.
어쩌면 지금 저 소리는 바로
내가 하고 있는 소리가 아닐까, 두려워서,
두려워서 속으로만 하고 있는 소리가 아닐까.
시적시적 내리는 봄비를 맞으면서
아무도 듣지 않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올해도 죽지 않고 또 온 그 여자의
각설이타령을 들으며 걷는
달라진 옛날의 그 길이 오늘따라 서럽다.(<봄비를 맞으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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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새벽 3시에 눈이 떠졌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정말 저절로 눈이 스스로, 능동적으로 열렸다.

달콤한 잠 속에서 뭔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일어났다. 이후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리맡에 있는 아이패드로 트위터에 접속해 본다. 4월1일 만우절이라 그런지 여러 가지 재밌는 ‘거짓말’들이 타임라인을 물들이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거짓말로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내 ‘행복한 거짓말’ ‘재밌는 거짓말’로 세상을 가볍게 웃고 지나가기에는 현실이 너무 버겁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때 타임라인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기사를 접했다.

"내 자식 살려내, 삼성 입사 얼마나 좋아했는데"

기사를 읽는 내내 잠이 오지 않는 새벽만큼 답답하고 가슴이 먹먹했다. 여전히 삼성이라는 공간에서, 삼성이라는 터전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나를 발견한다.

새벽잠을 아침까지 설치고 이른 아침 출근길에 올랐다. 출근길에도 피곤함 보다는 우울함이 먼저 몰려 왔다. 삼성을 둘러싼 유쾌하지 못한 일들과 비극적 경험 들이 하나 둘씩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염무웅 선생의 <문학과 시대현실>이란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책을 펼쳐 들었다. 읽을 차례를 보니 신경림 시인 편이다. 신경림 시인의 시부터 읽어보자.

장에 간 큰아버지는 좀체로 돌아오지 않고

감도 다 떨어진 감나무에는

어둡도록 가마귀가 날아와 운다(<시골 큰집> 부분)


그리하여 산 일번지에 밤이 오면

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

뒷산에 와 부딪혀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산1번지> 부분)


그리하여 증언하는 자 아무도 없는가.

이 더러운 역사를, 모두 흙 속에서

영원히 원통한 귀신이 되어 우는가.(<1950년의 총살) 부분)


바람은 복대기를 몰아다가 문을 때리고

낙반으로 깔려죽은 내 친구들의 아버지

그 목소리를 흉내내며 울었다,(<폐광> 부분)


저 밤새는 슬프게 운다

상여 뒤에 애처롭게 매달려

그 소년도 슬프게 운다(<밤새> 부분)


메밀꽃이 피어 눈부시던 들길

숨죽인 욕지거리로 술렁대던 강변

절망과 분노에 함께 울던 산바람(<해후> 부분)

위에 언급된 시 모두 우리 현대사의 질곡과 아픔, 학대받는 자들의 울음과 분노,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경림 시인의 시를 엿보면서 삼성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삼성과 관련돼 많은 증언을 했던 사람들은 조금씩 잊혀가고 이젠 ‘증언하는 자 아무도 없는가’라고 신경림 시인의 시가 다르게 읽힌다. 그래서 ‘이 더러운 역사를, 모두 흙 속에서 영원히 원통한 귀신이 되어 우는가’라고 분노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게 ‘더러운 역사’와 ‘흙 속에서 영원히 원통한 귀신이 되어 울 때’ 밤새도 슬프게 울었고 ‘상여 뒤에 애처롭게 매달려 그 소년도 슬프게 운다’고 해석하는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 몇 해 전 ‘삼성공화국’과 관련된 책들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권력에 예의 바르고 ‘외롭고 힘없는 자’에게 무뢰(無賴)한 삼성

삼성을 공화국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경제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삼성이 미치는 영향력은 가히 폭발적이면서도 공포스럽다. 정치, 문화, 사회, 학계 등 삼성이 내미는 권력에 주저 없이 손을 잡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삼성과 손을 잡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 늘려 있다.

삼성(Samsung)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 물음은 단순하지 않다. 하나의 기업집단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은 대한민국에서 정치, 사회, 문화 영역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다. 삼성을 기업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왕국’으로 판단하게 된다.

무엇보다 ‘삼성왕국’이 우리 사회에 미치고 있는 가장 큰 테제는 ‘선(善)과 악(惡)조차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헤게모니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선과 악은 보편적인 개념이다. 누구나 ‘저것은 선’ ‘이것은 악’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개념이 있다.

그렇지만 이 개념이 삼성으로 넘어오면 완전히 뒤틀리고 만다. 삼성에게 있어 선(善)의 개념은 “삼성에 유리하면 모든 것이 선”이며 악은 “삼성에게 해를 끼치면 악(惡)”이 된다. 무소불위의 헤게모니를 지니게 된다는 의미이다.

보편적 상식 개념인 ‘선과 악’의 개념과 정의조차 바꿀 수 있는 집단이 삼성이라는 존재이

다. 과연 그 속에는 어떤 시스템이 흐르고 있을까. 그런 삼성에 끌려가는(?) 사람들-판검사, 변호사, 기자, 회계사 등등-은 왜 자처해서 ‘삼성 왕국’으로 걸어 들어가고 그것을 영광으로 삼을까.


삼성반도체 젊은 청춘들의 비극은 아직 진행 중 <삼성반도체와 백혈병>

반올림에서 발간한 <삼성반도체와 백혈병>은 삼성반도체 공장에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했거나 혹은 투병을 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성반도체 공장에 근무한 몇 년 뒤 백혈병에 걸려 죽어간 이들⋯그들은 모두 젊은 청춘들이었다.

황유미, 박지연 씨 등의 죽음⋯꽃다운 나이에 그들은 위대한(?) 삼성에 입사해 처절하게 죽어갔다. <삼성반도체와 백혈병>은 황유미 씨의 죽음이 남긴 것을 시작으로 반도체 공장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짚어본다.

백혈병이 삼성 직원들에게 발병하면서 대책위를 꾸리게 되고 산재 신청에 얽힌 잘못된 점과 역학조사를 둘러싼 공방 등을 탐사 보도 형식으로 담았다. 산재 승인이 되지 않은 현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규명하고 또 다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다뤘다.

<삼성반도체와 백혈병>은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라고 그들의 운동을 규정하고 계속 ‘싸워나갈 것’을 천명하고 있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변호사에 대해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워낙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당사자이며 삼성과 관련돼 가장 객관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검사 출신으로 삼성 법무팀에 근무하다 양심선언을 하게 되고 몇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이슈와 논쟁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통해 ‘삼성의 참 모습’에 접근하고 이다.

차명계좌를 이용한 비자금 조성과 검찰과 법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삼성의 인맥구조와 조직체계 등을 체험적으로 기록했다. 삼성 구조본의 역할과 그들의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의 활동, 그리고 삼성을 둘러싼 모든 문제점을 해결하는 그들만의 노하우 등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한다.

삼성에 맞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함께 맞서 싸워 나갔던 과정을 그렸고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용을 통해 “삼성이 변하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프레시안 편집부의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편집부에서 엮은 <삼성왕국의 게릴라들>은 거대한 ‘삼성 공화국’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모습을 직접 취재하고 인터뷰한 내용을 담았다.

삼성을 향해 칼을 뽑은 변호사-김용철

삼성에 시선 맞춘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경제 민주화 꿈꾸는 금산 분리 파수꾼-김상조 교수

'떡값 검사' 공개한 촌철살인의 비평가-노회찬 국회의원

삼성왕국과 전쟁 선포한 '심삼성' - 심상정 전국회의원

비정한 사회와 자본을 고발한 저널리스트-이상호 기자

무노조 신화에 맞선 다윗의 투쟁 - 김성환 삼성일반노동조합 위원장

이들 7인의 ‘게릴라’들이 삼성 공화국에 맞서 어떤 투쟁과 싸움을 전개했고 그동안의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 등을 살폈다.

끝나지 않은 외침과 울음⋯어찌 해야 하는가

신경림 시인의 시들 속에 삼성으로 인해 죽고, 삼성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이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새벽잠에서 일어나 기사를 접하고, 출근길에 읽는 시가 무척이나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5.18 광주민중항쟁의 희생자들에게 바친 <씻김굿> 또한 시대만 달라졌을 뿐 삼성에 대입하면 그대로 읽혀진다.

염무웅 선생은 신경림 시인의 시를 해석하면서 “삶과 문학의 길을 오로지 꼿꼿하게 걸으면서 자신과 같이 외롭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빌려주고 그들의 꿈과 희망을 우리 문학세계의 한복판에 깃발처럼 우뚝 심어놓은”이라고 신경림 시인을 평가했다.

‘외롭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빌려주는 존재⋯그러나 삼성은 위에서 언급된 책을 통해 살펴보고 분석해 보면 ‘외롭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무뢰하고 권력에 예의바른’ 존재로 다가온다.

삼성반도체 공장에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죽어간 꽃다운 그들과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는 故 김주현 씨의 명복을 빈다.

편히 가라네 날더러 편히 가라네

꺽인 목 잘린 팔다리 끌고 안고

밤도 낮도 없는 저승길 천리 만리

편히 가라네 날더러 편히 가라네

잠들라네 날더러 고이 잠들라네

보리밭 풀밭 모래밭에 엎드려

피멍든 두 눈 억겁년 뜨지 말고

잠들라네 날더러 고이 감들라네

잡으라네 갈가리 찢긴 이 손으로

피묻은 저 손 따뜻이 잡으라네

햇빛 밝게 빛나고 새들 지저귀는

바람 다스운 새 날 찾아왔으니

잡으라네 찢긴 이 손으로 잡으라네

꺽인 목 잘린 팔다리로는 나는 못가,

피멍든 두 눈 고이는 못 감아,

못 잡아, 이 찢긴 손으로는 못 잡아,

피묻는 저 손을 나는 못 잡아

되돌아왔네, 피멍든 눈 부릅뜨고 되돌아왔네

꺽인 목 잘린 팔다리 끌고 안고

하늘에 된서리 내리라 부드득 이빨 갈면서

이 갈가리 찢긴 손으로는 못 잡아,

피묻은 저 손 나는 못 잡아,

골목길 장바닥 공장마당 도선장에

줄기찬 먹구름 되어 되돌아왔네

사나운 아우성 되어 되돌아왔네(<씻김굿>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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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시란 무엇일까. 시는 정직한 말이다.

시란 무엇인가. 시란 있는 그대로를 말하되 가슴속 깊은 곳에 가 닿는 말이다.

시란 무엇인가. 시란 '뜨거운 아스팔트 위의 아이스크림' 같은 말이다. 달콤한 맛을 느끼기 전에 녹아 버린다. 하지만 그 맛은 깊고 혀끝에 한없이 감돈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는 정직하고 가슴 깊이 푸른 우물을 만들고, 달콤한 맛을 느끼게 해 주는 정감이 느껴진다. 시인이 직접 시인들의 고향을 찾고 시인들의 추억이 녹기 전의 맛을 선물한다. 22명의 시인은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에서 다시 태어나고 다시 느끼게 해 준다. 시인들의 기행과 시인들의 인간적 면을 담고 있어 어린이나 어른에 이르기까지 쉽게 읽히고 큰 감동을 준다.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책보다 소중한 이유이다.



3월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삼동네 얼었다 나온 나를/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리.../" 정지용의 <종달새>는 노래한다. 올해 우리는 얼어 있었다. 이제 언 땅을 박차고 나와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며"(향수) 뛰어놀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선비의 자질을 갖고 있는 조지훈 시인은 박목월 시인에게 <완화삼>이란 시를 보낸다.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강 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부안 변산에서 태어난 신석정의 <대춘부>는 짧은 시이지만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무 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한눈에 깨닫는다. 그 러나 한참이나 뒷장을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한다. "...나무는 나무끼리/짐승은 짐승끼리/우리는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우리 끼리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짐승과 끼리끼 리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곁에 있는 누군가를 존중할 자세가 돼 있는가. 시 인의 시속으로 걸어들어 가면 꼬리에 꼬리 를 무는 질문이 계속 샘솟는다.

시인과 술은 어떤 관계일까. 술은 시인과 밀 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술에 얽힌 시인 들의 기행과 술로 인해 벌어지는 에피소드 는 <시인을 찾아서>의 한 테마를 이룬다. 술 한 잔 걸치고 시를 읽고, 시를 쓰기 전에 술 한 잔을 권해야 할 듯한 의무감까지 든다.

그중 김종삼 시인은 단연 독보적이다. 동아방송국을 다녔던 시인은 귀가 크고 코가 무척 컸다. 베레모를 쓰고 인상적인 얼굴로 친구들에게 술 사는 것을, 권하는 것을 좋아했다. "...가난한 아희에게 온/서양나라에서 온/아름다운 크라스마스카드처럼/..."이라고 시인은 <북치는 소년>에서 노래하고 있다.

술이라고 하면 천상병 시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막걸리 한잔에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졌다며 즐거워하는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막걸리 한 사발에 해장국까지 배부르게 먹고 주머니에 버스 차비가 아직 남았다는 것에 무척이나 행복해하는 시인의 자족(自足)을 과연 이 시대 사람들은 이해할까. 그런 시인이었던지라 <귀천>을 통해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노래하지 않았는가.

서울은 한국의 상징이지만 온갖 비극적 사건과 사고가 일어났던 근현대사의 블랙홀이었다. 서울과 분단을 읊고 있는 시인들의 말 속에서 그 비극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던져진다.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박봉우의 <휴전선>은 남과 북의 믿음이 없는 얼굴로 극한 갈등과 대치를 하고 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니 이제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같은 이야기도 없는가"라고 시인은 한탄한다. 박봉우 시인은 결혼식을 민족적 정기가 서려있는 파고다공원에서 할 만큼 민족과 나라를 사랑했던 시인이었다.

서울은 임화에 이르면 싸늘하면서도 연민을 느끼는 도시로 다가온다. <네거리 순이>에서 시인 임화는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속에서도/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긴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라고 묘사한다. 서글프고 가난한 서울이지만 희망을 놓지 않았던 우리의 현대사를 보는 듯 하다.

그런 서울이 오장환의 원고지에는 <병든 서울>로 묘사된다. 오장환 시인은 "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우리네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

새 나라를 만들기 위해 나섰지만 새 나라는 커녕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병든 서울로 바뀌어 버린 현실 앞에서 시인은 큰 목소리로 미칠 것 같다고 소리친다. 서울은 근현대사를 통틀어 시인들에게 가장 많은 소재와 이야기,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그 온갖 인간의 감성을 느끼게 해 준 '시인들의 요람과 무덤'이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가슴이 시원해지고 맑은 기운이 끓어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 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을 벗 삼은 시인들의 등장도 읽기에 좋다.

김영랑의 <오~매 단풍 들것네>는 누이의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감잎이 떨어지는 모습에 누이의 붉은 얼굴과 설레는 감정을 그대로 전해준다. 마치 읽는 내가 그 모습을 지금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감자꽃>은 권태응 시인의 간단명료한 의미를 전달받는다.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는 동시. "자주꽃 핀 건 자주 감자/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하얀 꽃 피는 건 하얀 감자/파 보나 마다 하얀 감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자주 감자를 굳이 하얀 감자라고 우기는 정치꾼들이 이 시를 보고 좀 배워야 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자주 감자를 하얀 감자라고 우기는 것이 정치인들의 특기라고 한다면 이것 또한 견강부회가 되는 것인가.

자신을 되돌아 보거나 독려하는 시인들의 시도 눈을 즐겁게 한다. 그중 가장 추천하고 싶은 시는 신동문의 <내 노동으로>이다.

"내 노동으로/오늘을 살자고/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제 맛도 모르면서/밤새워 마시는/이 술버릇은/다 무엇인가/..." 과연 우리는 내 노동으로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을까. 내 노동의 대가는 정직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일까. 신동문 시인은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던 시인이다. 그 시인이 내 노동으로 살자 했는데 그것조차 허락치 않는 현실...술 맛도 모르면서 밤새 마시는 짙은 고독이 느껴진다.

윤동주는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오늘도...내일도.../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라고 <새로운 길>에서 다짐했고 박인환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라며 아름다웠던 사랑의 기억을 <세월이 가면>에서 끄집어낸다.

한용운과 김수영을 만나면 시대의 아픔을 만난다.

그동안 ‘복종만 할 수 있는 리더(지도자)’를 우리는 만난 적이 있었던가. 한용운운 <복종>에서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라고.

근현대사를 살아온 우리는 조직이든, 사회든, 국가든 정말 복종만 하고 싶은 그 어떤 존재를 만날 수 있었던가. 굴욕적인 복종이 아니라 무한히 존경하고 뒤따를 수 있는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한 시민에게는 축복이다. 아직 그런 존재를 만나지 못했다는 현실이 한용운의 <복종>에서 가슴을 짓누른다.

김수영의 <풀>은 흔들리는 바람에도, 수없이 내리치는 그 어떤 고난에도 끝내 스러지지 않고 우뚝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끈기와 생명력을 선보인다. <풀>같은 민중과 국민이 있었기에 우리나라의 지금이 있는 것은 아닐까.

“.../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는 이 시대 메마른 감정의 대지에 단비를 내리게 하는 시로 가득하다. 감정의 늪에 단비를 맞고 싶은 이들에게 <시인을 찾아서>를 권해본다.

이 밖에도 이육사의 <절정>, 백석의 <나의 나타샤와 흰 당나귀>, 유치환의 <그리움>, 박목월의 <고향에서> 등의 시가 시인의 고향에서 펼쳐진다.

시는 무엇인가.

시(詩)는 시(時)를 만나는 시간이다. 시(時)를 만날 때 시(試)는 내 가슴속으로 들어와 단비가 되고 세상을 호흡하는 신선한 산소가 된다.

P.S>>전자책(epub) 파일을 첨부합니다.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에서 내려받아 ibooks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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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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