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억수로 왔다. 서울은 곳곳이 진흙탕으로 변해 버렸고 소중한 생명이 졸지에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누구하나 책임을 지려는 정치인과 관리들은 볼 수가 없다. 서울시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100년 만에 온 큰 비”라는 곳으로 책임을 돌려버린다. 하늘 탓이라는 게다.

매년 되풀이되는 이 쳇바퀴를 두고 어찌해야 되겠는가. 대비책은 고사하고, 사고와 문제 앞에 책임만 떠넘기는 정치인과 관리들을 보면 분노가 치민다. 그들에게 백성, 시민은 단지 그들이 존재하기 위해 있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셈이다. 표를 찍는 존재로 보고 있다. 그러니 큰 사고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사죄하기 보다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하늘이 구멍 났는데, 난들 어떻게 하라고.”라며 오히려 역정이다.

과연 이 시대, 아니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백성을 뼈에 새기는 정치인들이 몇이나 될까.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 백성이 있기에 내가 있고, 백성이 있기에 내 존재가 빛나고, 백성이 있기에 내가 먹고 살고, 백성이 있기에 내가 머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이나 관리들, 존재할까.

오세영의 역사소설 <북벌>을 읽으면서 내내 든 생각이 이것이었다. 백성을 각골하는 정치인이 있기나 할까. <북벌>은 조선 효종 때의 일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효종은 봉림대군시절,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는 수모를 당한 주인공이다.

물론 그 아비인 인조는 지금의 석촌호수에서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의 치욕을 겪었다. 이런 아픔을 가지고 있는 효종이었으니 청이라는 나라 이름만 들어도 복수의 칼날이 춤을 췄을 것이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개인이기 이전에 국왕이었다. 국제 정세와 여러 가지 변수를 살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복수의 시대에 옛 영토를 회복하고 청나라에 되갚음 하자는 것이 <북벌>의 주요 내용이다.

군병을 직접 지휘하는 북벌의 선두주자, 효종

모든 역사소설이 그렇듯이, 혹은 텔레비전의 사극도 마찬가지 이지만 그 첫 번째 시작점은 조선왕조실록이다. 실록은 날짜별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오세영의 <북벌>도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의 기사에서부터 소설이 출발한다.

소설로 들어가지 전에 효종실록에 주목할 만한 몇 가지 기록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효종은 복수의 칼을 겨누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는 데 주목했다. 당연한 일. 그래서 직접 자신이 군병을 지휘하는 등 손수 나섰다. 그러나 청나라의 감시가 집요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군사훈력을 하지 못하고 비공식적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행사를 핑계삼아 군사훈련을 했다.

가령 다음과 같은 효종실록의 내용을 보자.

효종 6년(1655년) 9월29일

장릉으로부터 환궁하면서 군사 훈련의 모습을 보다

상(주:효종)이 장릉(章陵 주: 효종의 할아버지인 원종의 묘)으로부터 환궁(還宮)하면서 노량의 나루 어귀에 어가를 멈추고는 내려서 언덕 위에 앉아,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이 위아래의 강산을 보라. 우리나라의 수도로는 한양(漢陽)만한 곳이 없다. 중외의 조운(漕運)이 이곳으로 폭주한다. 어찌 다시 이와 같은 형세를 지닌 곳이 있겠는가.”

하고, 또 세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일찍이 이와 같은 강산을 보았느냐?”

하였다. 상이 강을 건널 때, 어영 도제조 이시백, 총융사 구인기가 양주의 군병과 어영군을 인솔하여 이미 도성으로부터 와서 모래사장에 진을 쳐놓고 있다가 어가를 따르는 군병이 먼저 건너자 합하여 한 진으로 만드니, 모두 1만 3천여 명이었다. 먼저 장단(將壇)을 진 안의 동쪽에 설치하고 또 동서로 군문(軍門)을 설치하였다.

상이 서문을 따라 말을 타고 달려 들어가면서 시종하던 신하들에게는 곧바로 남문을 따라 들어갈 것을 명하였는데, 동부승지 이상진(李尙眞)이 ‘홀로 편한 길을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하며 극력 사양하고, 이에 서문으로부터 걸어서 수행했다. 상이 들어가 단상에 앉을 때 여러 신하들은 다 미처 이르지 못했는데 이상진만은 먼저 당도하여 단 아래에 엎드려 있으니,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그대의 다리 힘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걸어서 따르겠다고 극력 주장한 것이구나.”

하였다. 이시백 및 훈련대장 이완 등을 명소하여, 군병을 지휘하면서 한참이 지날 때까지 훈련을 하니, 서울의 남녀들이 와서 구경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공식적인 훈련이 아니라 할아버지 묘에 성묘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군사들이 임금을 맞이하는 형식으로 노량진에서 훈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효종은 흐뭇한 웃음을 머금는다. 아들(세자)에게 “우리나라의 수도로는 한양만한 곳이 없다”고 하고, 신하에게는 “그대의 다리가 튼튼하다.”는 등 덕담을 허물없이 나눈다. 군사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던 것이다.

1만3천 명의 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훈련을 하는 모습에 효종은 감개무량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이완 훈련도감 대장(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8a0098b)에 주목해 보자. 이완은 오세영의 <북벌>에서 중심인물이다.

이완 대장은 효종의 북벌을 직접 손과 발이 돼 전두지휘하는 인물이다. 실제로 효종실록에는 이완이 여러 차례 사간원과 사헌부로부터 공격을 받지만 효종은 그때마다 “그만하라. 이완은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적극 옹호하는 기사가 많다. 효종에게 있어 이완 대장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인물이었다.

다음에 실린 효종실록의 한 기사를 보더라도 효종이 얼마만큼 이완을 중요시했는지 알고도 남는다.

효종 9년(1658년) 4월18일

훈련 대장 이완에게 내려준 말이 야위고 안 좋자 담당 관리를 문책하다

상(주:효종)이 춘당대에 나아가 관무제(觀武才)를 하고 이어서 문신 당상 이하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였는데, 이지백(李知白)이 장원을 하여 즉시 첨지를 제수하고 이 이하의 관원들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무예(武藝) 입격자에게는 가자(加資)하거나 또는 직부(直赴)시키고 그 이하에게는 호피(虎皮)·궁시(弓矢)·면포(綿布) 등을 차등을 두어 내려주었다.

상이 훈련대장 이완(李浣)과 어영대장 유혁연(柳赫然)을 특별히 불러서 내구마(內廐馬) 한 필씩을 내려주었는데, 이완이 받은 말이 야위고 안 좋자 상이 크게 노하여 태복시 첨정 이문주(李文柱)를 앞으로 끌어내어 당장 금부로 내려 보내고, 또 두 제조에게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를 책하였는데, 좌의정 원두표가 허겁지겁 뛰어나가 직접 말고삐를 잡으니,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완 대장에게 말을 주라고 했는데 그 말이 야위고 상태가 안 좋은 것을 보고 관련되는 관리들을 직접 효종이 문책하고 나선 것이다. 이 정도이니 이완 대장이 효종에게 어떤 사람인지는 파악하고도 남겠다.

그리고 위 기사에 나오는 또 한 사람의 인물. 유혁연도 주목해야 한다. 유혁연은 어영대장으로 효종의 최측근 친위부대인 어영대장의 직함을 가지고 있다. 이완과 같은 레벨의 무장으로서 효종의 최측근이다. 역시 북벌의 한 축이다. 그러나 오세영의 <북벌>에서는 유혁연은 비중있게 나오지 않는다.

이렇듯 효종은 훈련도감과 어영대, 두 친위부대를 직접 통솔하면서 이완과 유혁연 두 무장을 심복으로 삼고 북벌을 준비한다.

조선시대 비극적 인물, 소현세자

소현세자(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73063)는 조선시대 역사상 가장 비운의 인물 중 한명이다. 조선시대의 비극적인 세자를 지목하라면 당연 소현세자와 사도세자가 꼽힌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이 있은 뒤 청나라로 볼모로 끌려갔다.

소현세자는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청나라에 끌려갔지만 그곳에서 그는 조선의 대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비밀스럽게 빼내 자신이 조선으로 돌아가면 더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마음속으로 다지고 또 다졌다. 청나라의 볼모로 있는 이상 그들 나라에 밉보여서는 안될 일.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고개를 숙이는 척 하면서 와신상담했다.

이런 소현세자의 모습은 아버지 인조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청나라와 친한 소현세자가 자신을 몰아내고 왕이 될 것이라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다. 조선의 왕 중에 중종(연산군을 몰아내고)과 인조(광해군을 몰아내고)는 반정(쿠데타)으로 왕이 된 인물이다. 이들은 그래서인지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밀어내고 왕이 될 것이란 피해의식에 빠져 있었다. 인조는 특히 그 정도가 심해 심지어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까지 의심하고 나섰다.

오랜 기간 동안 볼모로 갔다가 풀려난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인조는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니었다.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정치적인 적이었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효를 가장 중요시하는 조선에서 아들이 아비를 죽일 수는 없는 일, 아비인 인조가 아들을 죽일 수밖에. 소현세자는 그렇게 말라갔고 끝내 죽어갔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현세자의 아내인 강빈도 사약을 받아 죽었다. 인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손자들인 소현세자의 아들 셋을 모두 유배 보내버렸고, 유배지에서 그 중 한명은 죽고 만다. 아들을 죽이고,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를 유배 보낸 인조! 과연 그를 아버지와 시아버지와 할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세영의 <북벌>에는 소현세자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또 하나의 중심축으로 등장한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있었을 당시 친분을 쌓았던 성명욱! 성명욱은 조선 최대의 상단을 이끄는 단주이다. 성명욱과 함께 소현세자의 후궁인 최 씨를 모셨던 묘선이라는 궁녀도 등장한다.

묘선은 최 씨가 소현세자의 아들을 낳으면서 급사하자, 소현세자의 서자를 몰래 빼돌린다. 그 서자가 박석주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또 효종이 북벌의 시기로 잡은 몇 달 전 청나라에서 칙사가 도착했다. ‘파부내’라는 이름의 칙사인데, 성명욱은 이 칙사와 손을 잡고 효종을 몰아내고 소현세자의 서자를 왕으로 만들 책략을 꾸민다.

성명욱 단주는 효종이 추진하고 있는 북벌이야 말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자존심만 내세우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단정한다. 청은 뜨는 태양이지만 명은 지는 태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당에 청에 복수할 생각만 하는 비현실적인 군주, 그가 효종이라는 판단이다. 성명욱은 그러면서 “소현세자만 있었더라도 조선은 이렇게 쇠약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가짜 임금(효종)을 몰아내고 소현세자의 핏줄에게 진짜 임금 직을 물려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벌을 추진하는 효종파와 현실적인 상황을 기초로 소현세자를 다시 부활시키자는 소현세자파의 갈등! 과연 조선시대에는 이들 뿐이었든가. 절대 아니다. 또 하나의 권력, 사대부가 있었다.

송시열의 나라, 조선

효종파와 소현세자 파의 갈등 속에 또 하나의 갈등 축이 등장하는데 바로 서인의 영수 송시열(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43203) 파이다. 송시열은 효종의 스승이자 효종을 왕으로 등극시킨 일등공신이다. 조선시대의 강력한 윤리 중 하나,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같다는 것. 그러니 송시열이 효종에게 어떤 인물인지 불을 보듯 뻔하다.

송시열은 자신의 제자이자 자신이 직접 앉힌 왕인만큼 효종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효종은 조선을 다스리지만 효종을 다스리는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송시열인 만큼 무엇이 두려웠겠는가. 무엇이 무서웠겠는가.

효종이 승하하기 전까지 송시열은 이조판서를 맡고 있었다. 이조판서는 그야말로 인사권을 쥐고 있는 핵심 판서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청와대 민정수석과 인사수석을 겸하고 있는 직책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효종이 북벌을 추진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효종실록의 기사로 돌아가 본다.

효종 10년(1659년) 5월 4일

대조전에서 승하하다

상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약방 도제조 원두표(元斗杓), 제조 홍명하(洪命夏), 도승지 조형(趙珩) 등이 대조전의 영외(楹外)에 입시하고 의관 유후성(柳後聖)·신가귀(申可貴) 등은【이때 신가귀는 병으로 집에 있었는데 이날 병을 무릅쓰고 궐문(闕門) 밖에 나아가니, 드디어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먼저 탑전에 나아가 있었다. 상이 침을 맞는 것의 여부를 신가귀에게 하문하니 가귀가 대답하기를,

“종기의 독이 얼굴로 흘러내리면서 또한 농증(膿症)을 이루려 하고 있으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연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하고, 유후성은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왕세자가 수라를 들고 난 뒤에 다시 침을 맞을 것을 의논하자고 극력 청하였으나 상이 물리쳤다. 신가귀에게 침을 잡으라고 명하고 이어 제조 한 사람을 입시하게 하라고 하니, 도제조 원두표가 먼저 전내(殿內)로 들어가고 제조 홍명하, 도승지 조형이 뒤따라 곧바로 들어갔다.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침구멍으로 피가 나오니 상이 이르기를,

“가귀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

하였다.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솟아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血絡)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제조 이하에게 물러나가라고 명하고 나서 빨리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을 바르게 하였는데도 피가 그치지 않으니, 제조와 의관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의 증후가 점점 위급한 상황으로 치달으니, 약방에서 청심원(淸心元)과 독삼탕(獨參湯)을 올렸다.

백관들은 놀라서 황급하게 모두 합문(閤門) 밖에 모였는데, 이윽고 상이 삼공(三公)과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약방 제조를 부르라고 명하였다. 승지·사관(史官)과 제신(諸臣)들도 뒤따라 들어가 어상(御床) 아래 부복하였는데, 상은 이미 승하하였고 왕세자가 영외(楹外)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승하한 시간은 사시(巳時)에서 오시(午時) 사이였다.

훈련대장 이완(李浣)이 도감(都監)의 군병을 거느리고 궁성(宮城)을 호위하였다.

그렇다면 송시열은 과연 북벌에 찬성했을까. 당연히 찬성했다. 왜냐하면 조선의 사대부는 주자학이 근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랑캐인 청나라를 섬기는 일 따위는 아예 맞지 않는 처신이다. 무력으로는 이기지 못하지만 정신적으로 까지 청나라를 섬기는 것은 아니었다.

또 다시 질문 하나. 그렇다면 송시열은 진짜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었을까. 여기서 오세영의 <북벌>에서는 서인정권의 경우 북벌은 주장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전혀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라고 설명한다.

그 이유로 명분상으로는 북벌이 서인들에게 걸맞는 말이지만 현실적으로 전쟁을 해서 자신들이 이득을 볼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인들은 북벌을 주장하면서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적극 반대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 효종이 적극 추진하는 북벌이 실행에 옮겨지면 왕권이 절대적으로 강화돼 서인이 집권하고 있는 신권은 무너질 것이란 판단을 하고 있었다.

조선은 효종의 나라도 아니요, 그렇다고 백성의 나라는 더욱 아니며 송시열에게는 그의 나라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서인들은 효종 말기, 북벌이 가시화되자 효종을 버리고 소현세자 파와 손을 잡은 뒤 효종을 폐하고 소현세자의 서자에게(후궁의 아들)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정치공작에도 나선다. 정작 소현세자를 죽인 서인들이었지만 효종의 현실적 불벌에 적극 반대하기 위해 적과 손을 잡는 형국이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 어떤 가치보다도 현실적인 권력에 집착한 세력! 그들이 바로 서인들이었으며 그 우두머리가 바로 송시열이었다.

백성을 뼈에 새기는 정치인, 있다? 없다?

오세영의 <북벌> 내용은 간단하다.

청에 복수하기 위해 북벌을 주장하는 ①효종파

친청을 내세우며 가짜 임금을 패하고 소현세자의 핏줄에게 왕위를 물려주자는 ②소현세자파

북벌이든 친청이든 상관없이 서인을 배제하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③송시열파.

효종파 든, 소현세자파 든, 송시열파 든 그 속에 백성을 뼈에 새긴 집단은 그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 자신의 이해와 자신의 포부를 위해 싸우는 정치집단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가뭄이 조선을 심각하게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복수를 위해 북벌을 주장한 비현실적인 효종!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 비극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복수의 칼날을 켜는 소현세자 세력들!

왕이든, 청나라든 서인들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송시열!

이들 중에 그 어느 곳에서 백성은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끼어줄 생각도 없어 보인다. 이런 역사가 비단 조선시대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역사는 지금, 이 나라 대한민국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안타까움이지 비극이다.

다시 백성들의 시대가 오고 있다. 내년 2012년은 총선과 대통령선거가 이어진다. 정치인들은 다시 ‘백성’을 들고 나올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백성은 ‘표를 찍어주는 존재’일 때만 의미가 있다. 그 이후에는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지극히 이기적인 동물이다.

인류 진화의 역사상 가장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동물이 정치인이지 않을까. 그렇더라도 표를 찍을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면 정말 잘 찍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아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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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