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죽었다.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실린 두 편 소설의 중심 내용은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된다. 이 시대의 엄마는 어떤 존재인지 묻게 된다. 김도연의 <왜 옆집 부부는 늘 건강하고 행복할까요>와 김이설의 <부고>는 ‘아내의 죽음’과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김도연의 <왜 옆집 부부는 늘 건강하고 행복할까요>는 반어법적 목소리를 낸다. 아내가 죽어간 빈 아파트에 앉아 있는 나는 옆집에서 들려오는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콩쾅콩쾅 거실을 뛰어다니는 옆집 아이의 발자국 소리, 그리고 뒤이어 귀로 전달되는 싸움 뒤에 사랑을 나누는 옆집 부부의 달콤한 소리를 듣는다.

아내는 아파트의 화장실에서 목을 매 죽었다. 아내는 강릉에서 미용실을 하고 있었고 나는 대관령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아내는 계속 나에게 돈을 투자해 줄 것을 요구한다. 몇 십 년만의 수해로 정성스럽게 심은 모든 농작물이 휩쓸려 가던 날에도,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그 날에도 아내는 전화를 걸어 “내가 이렇게 살아야 겠어? 나 잘 할 수 있어. 이번에는.”라며 미용실 확장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


마침내 나는 아내에게 투자를 하고 초라한 밭떼기만 남는다. 아내는 마지막으로 건네는 나의 돈을 받으면서 “고마워. 이번에는 진짜 잘해 볼게. 이 동네 미용실을 내가 다 정리해 버리겠어.”라며 달뜬 목소리를 보내지만 조만간 나에게 다시 돈을 달라고 요구할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내는 예뻤다. 면소재지 미용실에서 처음 미용기술을 배워 나의 머리를 대상으로 실험을 할 때 무엇보다 행복했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러던 아내였는데 조그마한 동네에 미용실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경쟁이 치열해 진다. 아내의 미용실은 급속도로 뒤처지게 된다.

아내의 우울증이 심각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화장실에 들어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 날이면 딸에게서 다급하면서도 울음이 섞인 전화를 받는다.

“아빠! 엄마가 이상해.”

“아빠, 엄마가 이상해.”

그때마다 나는 딸에게 엄마 친구에게 전화하라고 할 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매번 고정적으로 있는 연례행사처럼 아내의 화장실 행은 벌어졌다. 다급하게 들려오는 딸아이의 전화 목소리는 그저 평범한 한 일상으로 나는 취급해 버린다.

그날도 다급한 딸아이의 전화에 “엄마 친구에게 전화해.”라는 말을 했고 딸아이는 “아빠, 정말 엄마 남편 맞아?”라는 힐난을 받는다. 그날은 너무나 오랫동안 아내가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고 결과는 ‘아내의 죽음’으로 끝을 맺고 만다.

아내가, 엄마가 떠나버린 빈 집 아파트에서 우두커니 앉아 춤추는 토끼 인형을 쳐다보는 중간에도 옆집에서는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뒤이어 서로 사랑을 나누는 달뜬 고음의 소리가 그대로 전달된다.

나는 “왜 옆집 부부는 늘 건강하고 행복할까요”라고 생각한다. 싸움을 하고 옆집 아이가 쿵쾅쿵쾅 뛰어 다니는 소리, 그리고 늘 그 뒤에 들려오는 그들 부부의 사랑을 나누는 소리...나는 아내와 진정으로 사랑을 나눴던 기억이라도 있는가. 춤추는 토끼 인형은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즐거운 듯 기계 동작에 맞춰 춤만 춘다.

“엄마가 죽었다.”

김이설의 <부고>는 엄마가 엄마의 죽음을 알려주는 곳에서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나를 낳아준 엄마의 죽음을 나를 키워준 엄마가 담담하게 부고를 전달해 주는 시작점이다.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다. 나를 떠난 지 삼십 여년이 지나 당뇨병 합병증으로 다리를 잃고 시력을 잃은 뒤 찾아온 생모! 과연 나는 그녀를 엄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한 미국인 입양아와 동거하고 있다. 그도 엄마가 두 명이다. 낳아준 엄마를 찾아 나섰지만 이미 그녀는 다른 가정을 이뤄 잘 살고 있다. 그를 만날 생각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도대체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기 위해 한국에 머물기를 작정한다. 그렇게 엄마가 두 명인 나와 그는 동거를 시작한다.

나중에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나의 생모는 아버지의 외도를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 나는 오빠가 한명 있다. 오빠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면서 학교를 다녔고 지금은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다. 지긋지긋한 한국이 오빠에게는 도망갈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여고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던 어느 날, 나의 아버지를 알고 있는 한 학생에게 강제로 폐가로 끌려간다. 몇 명의 남학생들이 나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 남학생 중에는 아버지가 몰래 낳은 자식이 있었다. 아버지의 자식에게서 능욕을 당한 나는 그러나 아버지에 의해 신고도 하지 못하고 “누구나 불행은 있는 법이다. 잊고 살아라.”는 아버지의 말만 들을 수밖에 없다.

엄마가 죽고 난 뒤 발인을 하지만 여전히 생모는 나에게 그 어떤 의미도 없다. 나에게 세 달치 분량의 돈을 남겨줬지만 나는 그것을 받을 생각이 없다. 나의 새 엄마는 어떤 존재였을까. 생모의 죽음이후 아버지는 새 엄마와 헤어지기로 했다는 사실을 나에게 말한다.

왜?

아버지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원래 그 사람도 가정이 있었다. 내가 양육비를 주는 조건으로 그 사람이 나와 같이 살기로 한 것이다.”

나는 분노한다. 새 엄마의 세심한 배려와 새 엄마의 지나친 친절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존대를 쓰면서, 아버지 앞에서는 더없이 활짝 웃었던 것도 ‘자기 자식’을 키우기 위한 목적이었을 뿐이었다. 모두 자기자식을 키우기 위해 내놓은 거짓된 행동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격분한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생 자기 마음대로 산, 그리고 내 인생 한 복판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던 사람, 나의 불운을 만든 건 바로 아버지였다고 나는 격분한다.

마침내 내 입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는 질문까지 터져 나온다.

“그럼 빌어먹을 그 새끼는요? 나한테 그 짓을 한, 아버지가 싸질러놓은 그 새끼는요!”

“작년에......사고로......죽었다.”

“하, 잘됐네요. 그럼, 이제 아무 문제없네요!”

“평생 자식만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도 자식 셋 모두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남은 건 이제 너 하나다. 그 사람 처리까지 내가 다 끝냈으니, 남길 빚은 없다.”

그리고 얼마 뒤 아버지는 싸늘한 시체로, 죽은 지 닷새 만에 새 엄마에 의해 발견된다. 새 엄마는 울면서 내가 자주 찾아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나에게 말하지만 나는 “괜찮아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엄마와 아버지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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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통속과 본격 문학을 두고 나는 구분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나름대로의 영역에서 나름대로의 독자를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입니다. 나도 통속소설이든, 만화든, 본격 문학이든 구분을 두지 않고 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통속 문학에 속하면서도 자신은 본격 문학을 하고 있다고 나대는, 잘난 체 하는 작가들입니다.”

문학 평론가 가와타니 고진의 말이다. 황시운의 <컴백홈>을 말하기 이전에 이 말을 인용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황시운의 <컴백홈>은 창작과비평사의 제4회 장편소설상을 받은 작품이다. 그런데 지나친 우연과 선입견이 위험해 보인다.

먼저 소설 내용을 보자.

소설은 ‘슈퍼울트라 개량돼지(0.1t의 몸무게)’ 박유미와 이른바 일진회의 ‘짱’으로 이름을 남긴 이지은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유미와 지은은 초등학교에서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다. 초등학교 때는 둘 다 이른바 ‘왕따’를 당한다. 그래서 둘은 늘 같이 붙어 다녔고 둘은 친구로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박유미는 여전히 0.1t의 거구로 그야말로 ‘따’의 전형이다. 뚱뚱한 것 자체가 ‘따’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러나 지은은 달랐다. 초등학교의 ‘따’를 벗어나, 그녀는 일진회의 짱이 되고 모든 학생들을 통제한다. 소설 속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삥’ 뜯고 ‘좆나’ 까대고, 다른 아이들을 깔아뭉개는 존재.

지은은 일진회 멤버들은 데리고 자신의 친구인 박유미를 괴롭히기도 한다. 초등학교에서는 서로 친구로 남아있었지만 중학교와 고등학생이 되면서 유미와 지은은 ‘친구’관계이면서도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와 괴롭히는 아이의 주종관계가 추가된다. 다음 말에서 이들의 관계가 분명해 진다. 박유미가 달라진 지은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다.

“어차피 맞을 거라면 다른 아이가 아니라, 지은에게 맞는 것이 더 낫고, 지은이도 이왕 때릴 거라면 자신이 때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맞을 바에야 ‘친구’인 지은에게 맞는 것이 낫고, 때릴 바에야 다른 사람이 아닌 지은이 자신을 때리는 것이 낫다는 관계. 이를 두고 다른 친구들은 둘의 관계가 ‘맞고 때리는’ 그러면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변태’ 아니냐는 해석도 곁들인다. 이것도 진정한 친구 관계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들의 관계는 이렇게 변한다.

‘우연’이 지나치게 많이 등장하는 소설

소설은 우연과 필연이 복합적으로 작용될 수밖에 없는 장르이다. 그런데 <컴백홈>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우연이 개입되면서 소설의 깊이를 차단하고 만다. 그중에 이 소설의 주요 테마를 이루는 ‘우연’이 서태지의 등장이다.

서태지는 최근 다시 이슈의 한 가운데로 부상했다. 그가 한 여자와 결혼했고 이혼 소송중이라는 사살이 보도되면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세상에! 서태지가 결혼을 했어?”라는 말에서부터 “정말?” “아닐 꺼야. 그럴 리가 없어.”라는 아쉬움과 실망, 좌절과 놀라움이 뒤섞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박유미는 서태지를 좋아한다. 그 이유를 굳이 찾는 다면 서태지가 데뷔할 때 자신이 태어났고 서태지가 대한민국의 매체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을 때, 유미는 ‘따’를 당했으며, 서태지가 은퇴하고 난 뒤 복귀할 때도 자신의 상황과 맞닿아 떨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박유미는 그러면서 하나의 다짐을 한다. 살을 빼서 서태지와 함께 ‘달의 뒷면’을 가고 싶다는 것. ‘달의 뒷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도록 하자.

여기서 서태지와 박유미의 관계가 상당히 도식적이라는 것이다. 서태지를 좋아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40대 후반의 한 사람도 요즈음에도 노래방에 가면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 ‘난 알아요’를 즐겨 부른다. 당시 서태지는 시대의 반항아, 시대의 혁명아로 통했다.

황시운의 <컴백홈>에서도 서태지의 등장과 비난, 은퇴와 복귀, 새로운 앨범 출시 등에 대한 이야기가 시기적으로 등장한다. 문제는 이 서태지에 대해서 간단한 언급만 있을 뿐 박유미가 왜 서태지에 대해 집착하는지, 그리고 서태지와 박유미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에 대한 묘사와 서술이 부족하다. 서태지가 갖고 있었던 아이콘이, 그것이 좋든 싫든, 시대적 배경에서 어떤 의미로 작용했는지 등. 서태지의 등장과 은퇴, 복귀에 대한 단순한 언급만 있다. <컴백홈>이란 소설 제목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등장시켰을까.

달의 뒷면은 어떤 의미일까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지은은 일진회 멤버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동네 공고생인 ‘깔(행동대장)’인 한 남자 고등학생을 만난다. 급기야 임신한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지은은 유미에게 자신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 뒤 사라져 버린다.

지은이 사라진 뒤 학교에는 온갖 소문들이 나돌았지만 어느 것 하나 사실로 확인된 것은 없다. 다만 유미만이 유일하게 지은과 연락이 닿는 존재로 남아 있다. 물론 그때까지도 유미는 ‘따’의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후 학교에 혼자 남게 된 박유미는 갖은 고초를 당한다. ‘짱’인 지은이 떠난 뒤 학교는 2인자였던 ‘영화년(영화라는 이름뒤에는 항상 ‘년’이라는 호칭이 붙는다. 아마도 작가 스스로 ‘영화’에 대한 안좋은 기억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이 ‘짱’으로 나선다. ‘영화년’은 유미를 괴롭힌다. 마침내 ‘영화년’은 지은의 ‘깔’이었던 공고생까지 불러 들이고 지은의 행방을 묻는다. 끝내 입을 열지 않은 박유미는 지은의 ‘깔’인 공고생으로부터 강간을 당하고 그 모습은 ‘영화년’의 휴대폰을 통해 촬영된다. 협박의 무기로 작용된다.

0.1t의 거구인 박유미는 ‘뚱뚱한’ 이유 하나만으로 ‘따’를 당하고, 집안에서는 어머니의 구박을 받고, 친구 지은과 관계로 인해 강간당하고, 온갖 핍박을 받는다. 반지를 훔쳐 일진회 멤버에 상납하게 된 것을 알게 된 어머니로부터 ‘호스 매타작’을 당할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의 어머니에 대들고 심지어 어머니를 짓밟아 버린다.

거실 한 귀퉁이에서 딸에게 처참한 ‘하극상’을 당한 유미의 어머니는 충격에 쓰러져 버린다. 그 상황에서 유미는 어머니의 지갑과 비상금을 털어 가출해 버린다. 그녀가 갈 곳은 뻔하다. 바로 지은이 있는 곳이다.

그렇게 유미는 지은이 있는 쉼터인 ‘둥지’에 도착한다. ‘둥지’에는 미혼모들이 거처하는 안식처이다. 여기서 이미영이라는 30대 중반의 한 여자도 임신을 한 채 같이 살고 있는데, 나중에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이미영은 지은의 아버지의 내연녀였다. 이것 또한 우연치고는 아주 지나친 우연이다.

방송에서 흔히 보는 ‘막장 드라마’의 가장 큰 기법 중의 하나가 우연이다. 우연히 사장이었던 사람이 내 아버지가 되고, 우연히 호텔 종업원이 내 아들이 되고, 그야말로 앞뒤 가리지 않고 충격과 충격적 우연으로 시선을 끌면서 극을 이끄는 것이 ‘막장 드라마’의 전형이다.

황시운의 <컴백홈>은 이런 면에서 우연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 소설 중의 하나이다. 우연이 많은 소설은 ‘통속적’일 수밖에 없다. 2007년 서울신문을 통해 등단한 황시운은 “등단작에 대한 주변의 평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그렇게까지 청탁이 없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한동안은 당황스러웠고, 그 다음에는 화가 났고, 나중에는 이런저런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2007년에서 2011년의 4년 동안 황시운 소설가가 겪었을 마음 고생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마음 고생이 지나친 것일까. <컴백홈>에서 작가의 절박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도 한 몫하고 있는 것 같다.

황시운은 <컴백홈>에서 ‘달의 뒷면’을 강조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달의 뒷면’을 무엇인지 직접 들어보자.

“아폴로11호의 사령선 조종사였던 마이클 콜린스는 아폴로계획에 참여한 우주비행사 중 달 표면을 밟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올드린이 달에 착륙해 달 표면을 탐사하는 동안 사령선인 컬럼비아호를 타고 달 궤도를 비행했다. 아폴로계획의 99퍼쎈트를 함께하고도 달 표면을 밟지 못했다는 이유로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그 대신 그는 달의 뒤편으로 간 최초의 인류가 되었다.”

박유미의 말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황시운의 ‘달의 뒷면’에 대한 인식이다. 아무도 가보지 못했던 그곳, 그곳은 바로 박유미의 이상향이자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꿈의 궁전이다. 과연 ‘달의 뒷면’은 황시운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상향으로 남아 있을까. 아무 고통도 없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오아시스를 볼 수 있는 곳일까.

여기서 우리는 또 한명의 작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가 한강이다.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도 ‘달의 뒷면’이 중요한 주제로 나온다. <바람이 분다, 가라>도 상처투성이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한강의 ‘달의 뒷면’은 그러나 황시운의 그것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한강은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달의 뒷면’을 순수한 상처로 표현한다. 그곳은 이상향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보여지지 않은 순수한 상처의 그곳이다.

달은 언제나 지구를 돌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달의 뒷면을 영원히 볼 수 없다. 어떻게 생겼는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한강에게 있어 ‘달의 뒷면’은 우주의 온갖 돌들이 떨어져 상처가 나고, 우주의 모든 아픔들이 떨어져 고스란히 머물고 있는 ‘순수한 상처’의 공간이다. 근원적 상처가 있는 그곳, 그곳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황시운의 ‘달의 뒷면’은 이상향이다. 누구도 보지 못했던 그곳을 보기 위한 소망일 뿐이다. 그곳에 더 깊은 근원적 상처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아니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황시운의 <컴백홈>은 선입견이 짙게 깔린 위험한 소설일 수도 있다. ‘뚱뚱한 여자’에 대한 지나친 선입견이 숨어 있다. ‘뚱뚱녀’는 온갖 고통과 더러운 꼴을 당해야 한다는 편견을 심어준다.

나는 요즈음 지하철이나 길거리를 걸어갈 때 지나가는 여성들을 보면서 놀란다. 하나같이 몸매가 날씬한 여성이, 하나같이 잘 차려입은 여성들이 도처에 걸어 다닌다. 모두 모델 뺨치는 모습이다. 화사한 모습으로 걸어 다닌다.

언뜻 보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 녀가 저 녀 같고, 저 녀가 이 녀 같은...걸어가는 여성은 모두 다를 것인데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개성과 생김새에 구분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들은 그랬을까.

절대 아니다. 자본주의는 철저하게 그녀들에게 태어날 때부터 주입시켰다.

“뚱뚱한 것은 죄악이다.”

“날씬해야 한다.”

“철저하게 성형을 하라.”

“생김새가 경쟁력이다.”

“여자는 잘 생기고 예쁘고 날씬해야 한다.”

교육을 강제 받았다. 자본주의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 자본주의 교육 덕분에, 돈을 투자한 것 덕분에, 지금 이 길거리에는 ‘예쁘고 날씬하고 잘 차려 입은’ 여자들만 넘쳐난다. 그러는 사이 개성은 사라졌다. 개성이 없는 사회? 그것은 죽음의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황시운의 <컴백홈>을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를 자신의 소설에 그대로 녹여버렸다는 것⋯‘따’ 당하고, 스스로 ‘포기하고’, 강간당하고⋯모질게 개성을 짓밟아 버렸다는 데 있다.

황시운의 <컴백홈>은 우연과 선입견이 짙게 깔려있는 통속 소설이다. 이야기에 속도감은 있다. 그러나 그 속도감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황시운 작가는 인터뷰에서 “소설은 우선 재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재밌는 것에만 매몰된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문학은 읽고 난 뒤 깊은 사색을 하게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상식에 대해 다시 한번 자신을 되새기게 하는 매력을 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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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종종 걸음을 치는 여자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흐느적흐느적 걷는 남자
책가방을 둘러메고 신호등을 건너는 남자 아이
붐비는 지하철 속으로 사람을 쑤셔 넣는 역무원
내 앞에서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20대 젊은 여자
빈 틈 없는 사이를 꿰뚫고 선반에 있는 무가지를 집어 드는 할아버지
앞 사람 무릎을 툭툭 치며 DMB를 보며 혼자 실실 웃는, 앉아 있는 30대 남자
무가지란 무가지는 모두 챙겨 지하로 빠져드는 50대 남자
초록불이 들어오면 쏜살같이 튀어 나가는 10대 아이
도시에는 온갖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이런 글을 썼다고 하자. 도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하자. 이 글에 대해 조선의 현명한 군주 중의 한 명이었던 정조는 어떤 평가를 할까. 정조에게 위와 같은 글을 ‘패관소품(稗官小品)’에 불과한 글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도시에 사람이 많다라고 한 줄만 쓰면 되는 것을”이라고 평했을 것이다.

패관소품이란 말 그대로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말한다. 패관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①옛날 임금이 민간(民間)의 풍속(風俗)이나 정사(政事)를 살피기 위(爲)해 가설항담을 모아 기록(記錄)시키던 벼슬아치 ②이야기를 짓는 사람을 말한다. ‘稗’는 벼에서 자라는 ‘피’를 말한다. 일종의 기생충이다.

소품은 말 그대로 ‘소설’이다.

구멍을 통해 바라본 관찰자의 시선, 이옥

설흔의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라는 책은 조선후기 문인이었던 이옥과 김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여기서 우선 검색의 도움을 받아보자.

이옥(李鈺)

1760(영조 36)~1812(순조 12).

조선 후기의 문인.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려 억압받고 불우하게 지냈다. 그러나 이단적인 문학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 한문단편에서는 박지원과 맞먹는 경지에 이르고, 민요시 개척에서는 정약용과 함께 가장 앞선 성과를 보여주어 한문학 혁신의 2가지 방향을 주도했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기상(其相), 호는 문무자(文無子)·매사(梅史)·매암(梅庵)·경금자(絅錦子)·화석자.

김려(金鑢)

1766(영조 42)~1822(순조 22).

조선 후기의 문인.

악부시의 대가였으며, 전이라고 빙자한 단편소설을 지어 불우한 인물의 행적을 서술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정(士精), 호는 담정(潭庭). 노론계 명문인 재칠(載七)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이천(姜彝天)의 비어사건(飛語事件)에 연좌되어 부령으로 유배당했고,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진해로 유배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만년에 아들의 노력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함양군수로 있다가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젊은 시절에 이옥(李鈺)·이안중(李安中) 등 진보적인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소품체(小品體) 문장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혔다. 10여 년 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이를 시로 표현했다

검색에 나타난 이옥과 김려를 보면 ‘패관소품’이란 글을 사랑한 나머지, 정조의 눈에 가시처럼 밟혀 제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한 이들이다. 설흔의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에는 이러한 정황에 그대로 나타난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라는 책은 이옥과 김려의 우정과 그들의 문학에 대한 집착, 사랑을 담고 있다. 철저한 관찰자의 입장과 세밀한 묘사가 이들 둘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다. ‘구멍을 통해 바라본 세상’에 대한 이옥의 관찰자 입장을 강조한다.

모름지기 소설은 ‘묘사의 맛’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는 듯,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 소설의 기본이다. 이런 ‘묘사’는 내가 직접 경험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 사물에 대한 세밀한 관찰에서 나온다.

1799년 이옥이 지은 <시기(市記)>라는 글을 인용해 본다.

소와 강아지를 몰고 오는 자, 두 마리 소를 끌고 오는 자, 닭을 안고 오는 자, 문어를 끌고 오는 자, 돼지의 네 다리를 묶어서 메고 오는 자, 청어를 묶어서 오는 자, 청어를 엮어서 늘어뜨려 가져오는 자, 북어를 안고 오는 자, 대구를 가져오는 자, 북어를 안고 대구나 혹 문어를 가지고 오는 자, 담배풀을 끼고 오는 자, 땔나무와 섶을 메고 오는 자, 누룩을 짊어지거나 혹 이고 오는 자, 쌀 주머니를 메고 오는 자, 곶감을 끼고 오는 자, 한 권의 종이를 끼고 오는 자, 접은 종이를 손에 들고 오는 자, 짚신을 늘어뜨려 들고 오는 자, 대광주리에 순무를 담아 오는 자, 새끼로 꼰 신발을 들고 오는 자, 큰 베를 끌고 오는 자, 목면포를 묶어서 휘두르며 오는 자, 자기를 끌어안고 오는 자, 분과 시루를 짊어지고 오는 자, 자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오는 자, 나무로 돼지고기를 꿰어 가지고 오는 자, 오른손으로 엿과 떡을 움켜쥐고 먹는 아이를 업고 오는 자....

자신의 집 문간방에서 구멍으로 바라본 시장 사람들에 대한 이옥의 묘사가 담겨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똑같은 인물은 하나도 없다. 지독한 관찰력과 세밀하면서도 세심한 묘사가 드러난다. 이 글을 만약 정조가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옥의 절친한 친구인 김려는 정조가 이옥의 <시기>를 읽었다면 다음과 같이 반응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임금이 읽었으면 분기탱천했을 발칙한 글이었다. 임금이 그토록 싫어했던 소설 문체가 제대로 발휘된 글이었다. 임금은 벌컥 화를 내며 종이를 집어 던지고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시장에 사람이 많다고 한 줄만 쓰면 그만인 것을. 쓸데없는 묘사에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다니, 글도 형편없지만 종이와 먹과 붓이 참으로 아깝구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서두에 적은 ‘남자, 아이, 여자’ 등등에서도 “도시에 사람이 참 많다”라고 적으면 될 것을, 종이와 붓이 아깝다라는 정조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이처럼 정조는 이옥에게 ‘패관소품’체의 문체를 고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옥은 따르지 않았고 정조는 끝내 이옥을 내팽개쳐 버린다.

정조에게 ‘구멍을 통해 바라보는 시선’은 소인배나 하는 짓거리로 치부됐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예전부터 사람들에게 가장 감명 깊고 피부 깊숙이 파고들었던 문학의 제일은 ‘패관소품’이었던 것을. 중세시대 민중들의 글 읽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먹고 살기 빠듯했고, 자유가 아닌 누군가에게 속박돼 있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에도 문학과 이야기는 있었다. 저녁에 두른 두른 둘러앉아 소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이 시대를 살고 위안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권력자의 신임보다는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나누었던 두 남자

이옥은 자신의 ‘패관소품’에 대한 집착 때문에 벗인 김려가 고초를 당했다고 자책한다. 김려는 위의 약력에서 보듯 ‘패관소품’의 빌미로 부령과 진해로 유배생활을 한다. 벗이 고통에 처하자 이옥은 김려 몰래 유배지인 부령과 진해로 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김려의 글을 모은다.

후에 이옥이 죽고 그의 아들 우태에 의해 이런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옥과 김려의 글은 조선후기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글들로 가득 차 있다. 이옥은 김려의 글 중에서 <방주의 노래>를 가장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총은 귀 기울려 이 말을 듣고
고개 들고 껄껄껄 웃어 보였네.
귀한 자는 조상 덕을 물려받고
천한 사람 복을 못 타 가난하지만
공평하고 변함없는 세상 이치야
모든 사람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
하건만 공연히 등급을 갈라
이 세상은 지옥처럼 되었소그려.
불행히도 주인님은 백정이 되어
저자에서 짐승 고기 각을 뜨지만
착한 분은 제 위치에 만족해하고
소인들은 요행수로 빠져나가지요.
어찌 알리까 지금의 푸줏간 일이
벼슬 사는 우리보다 저 좋을는지.
이 늙은이 천성이 고지식하여
시속에 휩쓸릴까 저어한다오.
저 싫으면 이웃 간 원수로 되고
마음 맞으면 딴 나라 사이도 혼사하오니
우리들 사이좋은 사돈 맺자면
말 몇 마디 약속하면 그만이지요.
가난한가 부유한가 물을 것 없고
양반이다 상민이다 따질 것 없소.
잘되는가 못되는가 앞날의 일은
저희들의 팔자에 매인 것이지
백 가지 중 사람 하나 똑똑하다면
그 나머지 탁할 일 무엇 있겠소.

김려가 진해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겪었던 일을 적은 글이다. 내용인즉슨 백정의 딸이 군관의 아들과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하물며 백정의 딸과 군관의 아들이 결혼한다는 내용 자체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옥이나 김려는 정조의 신임을 버리는 대신, 사람이 사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조선의 백성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았다. 이들이 있어 조선시대의 정확한 실상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자신들의 글을 통해 시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그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다.

그들에게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라는 말은 그래서 한낱 빈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멋진 곳에 그들이 있었고, 멋지기 때문에 글을 쓰고, 멋진 곳에 놀러가고, 멋진 글을 통해 서로 교우했던 ‘멋진 친구’들이었다.

성석제 작가는 이 책의 서평을 통해 “김려가 있어서 이옥 또한 자신의 문학 세계를 더 그윽하고 높은 경지로 만들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친교 또한 이옥의 작품처럼 우리 문학에 내려진 축복이다.”라고 썼다.

김려가 없었다면 이옥의 글을 담은 <담정총서>는 물론, 이옥의 글이 후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려가 없었다면 그의 ‘멋진 글’이 사라졌을 것이다. 친구가 있어 아름답고, 친구가 있어 그의 글이 그윽한 향기로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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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과연 그가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어느 날, 굿리치라는 의사가 변호사 네이션을 찾아온다. 그는 네이션을 데리고 어느 빌딩 전망대를 찾아간다. 굿리치는 한 젊은이를 가리키며 “곧 저 젊은이가 죽을 것”이라고 네이션에게 말한다. 굿리치가 지목한 젊은이는 전망대에서 권총 자살을 한다. 굿리치는 이번에는 한 카페에서 일하는 여성을 지목한다. 이 여성도 은행 강도 사건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굿리치는 죽음을 예언하는 ‘메신저’였다.

네이션은 굿리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면서 ‘이제 내 차례구나’라고 생각한다. 곧 죽을 것임을 안 네이션은 이혼한 아내 말로리와 다시 합치고자 한다. 딸 보니를 데리고 장인 댁인 제프리를 찾는다.

장인 댁에 며칠 머무는 동안, 장인은 네이션의 차를 몰고 나갔다 음주사고를 저지른다. 아이를 친 것이다. 아이는 의식불명이다. 네이션은 장인 대신 자신이 죄를 덮어 쓰기로 마음먹는다. 이제 죽을 몸인 자신이 죄를 덮어쓰는 게 좋겠다는 판단. 자신이 죽고 나서도 아내 말로리와 딸 보니에게 더 없는 선물일 것이라고 판단한다.

아버지인 제프리로부터 네이션의 모든 일을 전해들은 말로리는 네이션과 뜨거운 포옹을 하고 다시 사랑하게 된다. 재결합하고 달콤한 사랑을 나눈 다음 날 아침, 팬케이크가 익어가는 냄새와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평온한 아침, 네이션은 잠옷을 입고 침실에서 부엌으로 내려간다. 네이션은 아직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그런데 팬케이크를 만든 뒤 뒤를 돌아보는 말로리의 해맑은 표정과 머리 위에 하얀 빛이 서려 있다. 사라지지 않고. 네이션은 놀란다. 굿리치로부터 “죽을 사람은 머리 위에 하얀 빛이 서린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 네이션은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또 다른 메신저가 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죽는 사람은 사랑하는 아내, 다시 찾은 아내 말로리였던 것.

기용 뮈소의 <그 후에>의 소설 줄거리는 간단하다. 죽음을 예고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이 세상이 있고, 그 메신저로부터 죽음을 전달받은 한 남자의 자시 독백과 고백, 그리고 죽음을 앞둔 한 남자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담았다.

말로리는 전형적으로 있는 집안의 딸이었다. 말로리 아버지는 하버드 출신의 변호사, 어머니는 보스턴의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 반면 네이션은 그런 말로리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어머니를 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죽음에 이르는 길, 누구나 갈 수밖에 없다

네이션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주인집 딸 말로리와 결혼도 하고 변호사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둘째 아들 션의 죽음으로 말로리와 멀어지게 된다. 급기야 이혼에 이르고 만다.

그런 와중에 ‘메신저’라고 자신을 밝힌 굿리치가 네이션을 찾아온 것이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길이다.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 다만 그 시간이 상대적으로 빨리 오느냐, 아니면 늦게 오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누구나 갈 수밖에 없는 죽음의 길이라면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명확해 보인다. 어떻게 죽음의 길에 이를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네이션은 죽음의 길에 다다랐다는 스스로의 인식으로 헤어진 말로리와 다시 결합하고, 그동안 자신이 관심가지지 못했던 소소한 일상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다. 자신이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버렸던 모든 것이 사실은 너무나 소중했던 것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소설은 반전이 있다. 네이션은 굿리치의 등장으로 자신이 죽는다는 것에 무게를 둔 나머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예언하는 또 다른 메신저일 뿐이고 죽는 사람은 헤어졌다 다시 사랑으로 뭉친 자신의 연인, 말로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여기서 한 영화가 겹쳐 떠오른다. 2004년, 닉 카사베츠 감독의 <노트북(The Notebook)>이다. 노아(라이언 고슬링)와 엘리(레이첼 맥아덤즈)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영화의 시작은 아름다운 석양이 지는 사이로 긴 날갯짓을 슬로 모션으로 이동하는 철새를 창문으로 바라보는 늙은 엘리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엘리는 치매로 병원에 요양중이다.

노아는 엘리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자신들이 그동안 겪어온 사랑 이야기를 담은 내용을 끝없이 반복해 읽어준다. 며칠 동안 이야기를 읽어 주다보면 엘리가 짧게는 5분 정도 기억이 되돌아온다. 그때만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노아를 알아본다. 그러나 5분이 지나면 다시 기억을 잃어버리고 전혀 낯선 사람으로 돌아가 버린다.

<노트북>은 기용 뮈소의 <그 후에>와 상당히 많은 부분 비슷한 부분을 담고 있다.

부잣집 여자 집안과 가난한 남자 집안. 부잣집 여자집안은 당연히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딸을 반대하고, 그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이르는 험난한 과정, 이런 측면에서 꼭 닮았다.

또 하나, 서로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잃지 않고 영혼히 간직한다는 것. 이런 점에서 영화 <노트북>과 소설 <그 후에>는 많이 겹쳐진다.

<노트북>의 마지막 장면은 조그마한 침대였다. 심장발작으로 잠시 병원 신세를 지고 돌아온 노아가 밤늦게, 병원 규칙도 어기면서, 엘리의 병실로 간다. 이때 엘리는 노아를 알아본다. 그리고 좁은 1인용 침대에 ‘잘자, 내일 봐.’라고 서로 인사를 나눈 뒤 두 손을 마주잡고 잠에 든다. 그러나 다음 날, 해가 뜨고 간호사가 엘리의 병실에 들어 왔을 때 두 사람은 너무나 평온한 표정으로 두 손을 꼭 잡고 죽어 있다. <노트북>은 곳곳에 아름답고 화려한 영상미로 눈길을 끌었다.

<그 후에>는 술술 읽힌다. 어려운 단어도, 깊게 생각할 문장도 없다. 해석에 어려움이 없이 마치 만화를 읽듯 넘어간다. 무척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소설이다. <그 후에>는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영상이 떠오른다. 시나리오를 읽는 느낌, 영화관에 앉아 영상을 보고 있는 듯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기욤 뮈소의 문체는 평이하며, 문체의 독특한 기법보다는 물이 흐르듯이 감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강조한다. 또 복잡하고 거친 형식보다는 편안하고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해 보고 생각해 봤을 만한 내용을 그리고 있다.

죽음을 예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메신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런 현실에서 나의 죽음, 혹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알았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이 소설은 묻고 있다.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의 길!

<그 후에>는 죽음과 이를 둘러싼 우리들의 고민을 한 번 더 성숙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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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소설을 읽을 때는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생소한 단어와 지명,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먼저 알고 읽어야 하는 선원형(Sailor) 소설이 있고, 두 번째는 생소하지는 않지만 깊게 그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농부형(Farmer) 소설이다.

정미경의 <아프리카의 별>은 전자에 속한다. 전형적인 선원형 소설로, 소설 속에 나오는 지명과 그 의미하는 바를 미리 알아놓지 않고 읽으면 맛이 떨어진다. 소설이란 때론 이렇게 독자에게 공부를 시키는 경우도 있다.

<아프리카의 별>을 읽기 전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낯선 단어와 의미하는 것을 나열해 본다.

자마 알프나: 죽은 자들의 광장

술탄: 이슬람교국의 군주

모스크: 이슬람교의 사원. 모스크는 특유의 둥근 지붕과 건물을 둘러싼 미나렛이라 불리는 첨탑이 특징.

미나렛: 첨탑

메디나: 사우디아라비아 서부 헤자즈 지방에 있는 이슬람교 제2의 성지. 미로처럼 연결돼 있는 도시. 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아프리카인들 특유의 장치.

카스바: 아랍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술탄이 있는 성 또는 건물

인샬라: '알라가 뜻하는 대로'

사하라: ‘아무 것도 없는’

메르주가: 사하라 사막의 끝에 위치. 이곳에는 아무 것도 없고 밤이 되면 쏟아지는 별빛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테너리: 가죽 염색장. 양가죽을 주로 염색하는 곳으로 냄새가 지독하다.

헤나: 식물성 헤나를 가루내 피부에 그리는 것. 문신과 비교된다. 일주일 정도 지속됨.

파티마: ‘페르시아에서 온 파티마’라고 하면 창녀의 대명사. 모하메트의 딸의 의미도 있으며 이 경우 성녀(聖女)로 불림.

그리고...

탕헤르: 아프리카 북서쪽 끝 지브롤터 해협에 면하여 있는 모로코의 항구 도시. 상업 물자의 집산지이고, 자본의 도피장으로 유명하며, 관광·피한지로도 알려져 있다.

링반데룽: 등산에서, 짙은 안개나 폭풍우를 만났을 때나 밤중에 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지점을 맴도는 일.

이 정도의 낯선 낱말을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프리카의 별>이 어떤 소설인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뭔가 음울하고⋯ 뭔가 불안하고⋯ 왠지 외롭고⋯ 왠지 자신을 유기할 것 같고⋯심지어 방향감각을 잃고 계속 같은 곳을 맴도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아무 것도 없는’ ‘죽은 자들의 광장’ ‘냄새가 지독한 양가죽 염색’ ‘창녀’⋯.

왜 아프리카인가

소설은 승과 보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보라는 승의 딸이다. 소설의 첫 머리는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과 모래, 미로로 얽혀 있는 메디나, 그곳에서 삶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진다. 왜 그들이 아프리카로 올 수밖에 없었는지는 한참을 읽어야 나온다.

“배와 K와 아내는 사라졌다. 흔적 없이.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그 셋은 동시에, 같이 사라졌다.”

승은 아프리카에 생필품을 파는 사업에 투자했다. 모든 법인명의는 승의 이름으로. 그렇게 세 번째 배가 떠나고 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배 뿐만이 아니었다. 아내도, 친구였던 K도 함께 사라졌다. 아니,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해야 한다. 채권자들이 몰려들고 승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그렇게 승은 딸 보라의 손을 잡고 아프리카로 무작정 날아든다. K와 아내를 찾기 위해. 도착한 아프리카는 그들에게 다큐멘터리로 펼쳐진다. 아주 고통스러운 ‘삶의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될까.

“요란한 원색의 모자를 쓴 물장수들이 물통을 지고⋯열에 들뜬 사람들에게 달콤한 물을 파는 곳⋯생의 열기로 가득 찬 이 장소에 왜 그런 이름을 붙여주었을까? ‘자마 알프나’라고⋯.”

승이 아프리카에 도착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K와 아내를 찾는 일. 그런데 먹고 살아야 한다. 이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은 ‘가이드’가 최고이다. 승은 곳곳에 관광객들의 가이드 노릇을 하면서 K와 아내의 사진을 보여 주며 “이들을 보게 되면 연락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속절없는 아프리카 생활은 시작되고 ‘어떤 한 물건’으로 현지인(무스타파, 로랑)과 승, 보라와 현지인(바바)의 관계가 형성된다. 승은 ‘어떤 그 물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게으른 장인이 마지못해 눈과 코를 새기고 맨 마지막에 귀찮아하며 귀를 하나 붙여놓은 듯한 기이한 얼굴. 아무리 봐도 즉각적인 미감은 없지만 설명할 수 없는 매혹을 품은 형상.”

승은 이 물건을 메디나에서 골동품 가게를 하는 단골주인 무스타파에게 맡겨둔다. ‘역사적 무게가 대단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무스타파는 이 ‘역사적 무게가 대단한 물건’을 골동품 수집가인 로랑에게 되팔아 버리고, 로랑은 다시 이 ‘역사적 무게가 대단한 물건’을 과일을 파는 어린 아이인 바바에게 잠시 보관해 둔다. 바바는 무스타파의 아들이다.

‘아무 것도 없는’ 사하라 사막에서 ‘역사적 무게가 대단한 물건’이 승에서부터 시작해 무스타파, 로랑, 바바로 이어지는 미로를 형성한다. 이들은 이 미로 속에서 길을 찾아 나올 수 있을까.

보라의 사막은?

승은 가이드 일을 맡게 되면서 몇날 며칠이고 집을 비운다. 딸 보라가 혼자 집을 지킬 수밖에 없다. 승은 자신이 없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말하고 집에 콕 박혀 있으라고 보라에게 이야기하지만 보라는 시장통에 나가 헤라를 칠해 주며 돈을 번다. 왜? 돈을 벌어야지만 다시 떡볶이와 김치찌개를 먹을 수 있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 그 시장통에서 과일을 팔며 매일 아버지 무스타파에게 매를 맞는 바바를 만난다.

바바는 보라가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 궁금해하지만 보라는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곳 아프리카에 왜 왔는지 바바가 보라에게 묻는다. 보라와 바바의 인생관을 보여주는 한 마디.

보라: “아빠 따라 온 거야. 아빠는 누군가를 찾으러 온 거고,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야.”

바바: “왜 오고 싶지 않았는데?”

보라: “바보야. 저녁마다 모래를 한 삽씩 쓸어내야 하는 곳에 누가 오고 싶어 하겠어.”

바바: “모래를 왜 쓸어내는데? 어차피 또 쌓이는걸.”

열여섯, 풋풋한 사랑이 느껴진다. 매일매일 모래바람이 불어 창문을 비 오듯이 쓸어내리는 모래를 매일매일 쓸어내야 하는 보라, 그것을 두고 ‘어차피 또 쌓이는 걸 무엇하러 쓸어내?’라고 반문하는 바바⋯‘한국 소녀’와 ‘아프리카 소년’의 풋풋한 사랑의 시작이다.

소설 곳곳에서 아프리카 특유의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관광객들과 함께 승은 메르주가에 도착한다. 메르주가는 어떤 곳일까. 승은 이 장면은 두고 이렇게 묘사한다.

“승이 무서워하는 밤이다. 메르주가에 오면 사람들은 별빛 아래서 약간은 이상해진다. 완전히 어두워지면 이곳은 별들의 우주이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별들은 강한 인력으로 사람을 허공으로 둥실 들어올린다. 가차없이 쏟아져내리는 별빛의 폭포 아래서 누구는 살짝 미치기도 하고 간혹 울기도 한다.”

‘아무 것도 없는’ 사막의 한 가운데, 끝없이 펼쳐지는 깊은 밤, 지평선도 보이지 않고, 텐트 몇 개만 덩그렇게 놓여있는, 하늘엔 무수히 많은 별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보고 미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그것을 보고 울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하지 않을까.

며칠을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둔 보라, 매를 맞으며 과일을 팔고 쇠구슬 마술을 하며 돈을 벌어야 하는 바바, 젊은 ‘한국 소녀’와 ‘아프리카 소년’은 아프리카 곳곳을 쏘다닌다. 양가죽 염색장도 돌아다니고, 로랑의 집에까지 초대받고 그곳에 전시돼 있는 갖가지 골동품들을 구경한다.

‘역사적 무게가 대단한 물건’으로 벌어지는 일

‘역사적 무게가 대단한 물건’으로 인해 마침내 일은 벌어지고 만다. 그것을 무스타파로부터 구입한 로랑이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된 것. 정체불명의 사람이 보라를 찾아와 “아빠에게 그 물건을 가지고 오라고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가 사라질거야.”라고 협박하고⋯.

무스타파와 승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알지 못하는 세력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만 깨달을 뿐. 심지어 무스타파는 “친구, 메디나엔 비밀이 깃들일 구석이 없다네.”라며 승이 로랑을 죽인 것으로 의심까지 한다. 승은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 속에서 자신이 지금 왜 여기 있는지 의심스럽다.

“승은 이제 주저앉을 것만 같다. 자신은 누군가를 좇는 사람이었지, 쫓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역사적 무게가 대단한 물건’을 들고 사라진 바바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발각되고, 사막 한 가운데서 찬란한 빛에 자신의 목숨이 위태위태지는 상황에 처한다. 승과 무스타파, 보라는 바바를 찾아 나서지만, 흔적도 없다.

바바를 찾아 나서는 중간에 먼 곳에서 리조트를 하는 사람으로부터 승에게 연락이 온다.

“찾았어.”

마침내 K를 찾았다는 소식. 사막 한가운데에서 승은 차를 몰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래바람이 덮치고 차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지만 계속 같은 곳을 맴도는 ‘링반데룽’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앞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뭔가를 발견하지만 때는 늦었다. 승의 차와 그것은 굉장히 강하게 충돌한다. 무언가가 갈비뼈를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 승은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살아남기 위해 K를 찾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너무도 두려워지는 것 보니. 갑자기 눈을 감은 것처럼 아주 캄캄해지네.”

아프리카는 어떤 곳일까. 정미경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검은 황홀의 땅.

일정과 기후와 낯선 음식. 그 모두가 나의 육체적 한계를 요구하는 시간이었다. 막바지에는 말을 잃었다.

아름다움에 매혹된 자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주관 속에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는 자들이 아닌가.“

‘겁나 먼’ 아프리카 사막을 고통스럽게 우리는 왜 굳이 찾아가려고 할까. 스스로에게 던져 볼만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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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중학생 딸아이가 저녁 식탁에 앉아 학교 이야기를 시작했다. 딸아이가 다니는 중학교는 단출하다. 전교생이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학년 당 1개의 반이 있고 딸아이의 반은 30명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아이들이 그대로 중학교 1학년이 된 것이다. 2명 정도가 전학을 와 새롭게 합류했을 뿐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지만 변화 없는 생활에 지쳐가는 듯 했다.

특히 먹는 것, 급식에 대해 심각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중학생 인원이 많지 않다보니 초등학교 급식을 같이 먹는데, 영 맛이 없고 그저 그런 급식에 불과하다는 불평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 식탁에는 오이와 당근, 양배추, 사과, 콩나물을 비벼 섞은 쫄면과 알맞게 익은 콩나물을 밥에 얹어 달래간장을 살짝 얹은 콩나물 비빔밥이었다.

딸아이는 맛있게 먹었다. 딸아이는 “초등학교 때 먹는 것과 똑같은데 급식이 너무 맛없어!”라며 준비한 쫄면과 콩나물 비빔밥을 넉넉하게 먹었다. 엄마를 보더니 “엄마! 나 도시락 싸 가면 안 돼?”라고 묻는다. 아내는 난감한 표정.

아이의 얼굴에는 욕구불만이 가득 찼다. 중학생 생활이란 게 공부 밖에 더 할 게 없는데 점심시간의 먹거리조차 ‘맛없는 것’에 불과하니 아이에겐 학교생활의 즐거움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느 하나 즐겁지 않는데 “먹는 거라도 맛있게 먹게 해달란 말이야!”라고 아이는 외치고 있었다.

욕구불만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권여선의 <분홍리본의 시절>은 욕구 불만에 대한 단편들을 모았다. 하기야 어느 소설이건 등장인물들이 욕구 불만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권여선의 소설 속 인물들은 그 욕구 불만이 ‘먹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가을이 오면>에는 그렇고 그런 K전문대 아동학과에 다니는 ‘나’가 등장한다. 나는 궁색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왕복 버스 차비를 아껴 점심을 먹어야 하고, 끔찍하게 덥지만 옥탑 방에서 살고 있다. ‘담배를 피운다는(‘담배 피는 애들은 글 좀 쓰잖아.’라는 교수의 말이 웃겼다)’ 이유 하나만으로 출판사 아르바이트를 제안 받지만 손톱만 한 돈만 수중에 들어온다.

뜨거운 여름날, 재래시장을 한 바퀴 도는 버릇이 있는 ‘나’는 ‘뜨거움과 조잡함이 우윳빛으로 뒤엉킨, 이를 테면 순댓국 같은 풍경’의 뜨거운 한낮 재래시장 시멘트 바닥에 기절하고 만다. 그때 한 남자가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남자는 ‘나’를 병원에 데려다 주고 친절을 아끼지 않고 사라졌고, 그와 함께 그날 조교로부터 받은 아르바이트 돈이 든 지갑도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병원에서 돌아온 ‘나’는 아등바등 어긋난 박자를 탓하고 있다. 그때 초인종이 울리고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난다. 남자는 지갑을 그녀에게 건넨다. 그러나 지갑은 비어있다. 남자는 지갑을 시장 통에서 주웠고 안에 있는 카드(학생증 겸용 카드이니 사진이 있었다)를 보고 그녀를 수소문해 찾아 왔다고 했다. 지갑 안에 돈은 없었다면서.

그렇게 무단침입 비슷하게 들어온 남자는 배가 고프다 하고 ‘나’의 궁색한 옥탑 방에는 아무 것도 있는 게 없다. 남자는 밖으로 나가 햇반과 김치를 사온다. 그리고 김치볶음밥을 만들기 시작한다.

한 여름의 ‘순댓국 같은’ 날에 ‘김치볶음밥’ 같은 남자의 출현⋯‘나’는 남자가 만들어 준 음식을 맛나게 먹는다. ‘나’와 남자의 공통점은 이것뿐만 아니었다. 김치볶음밥으로 시작된 만남은 둘 모두 햇배추로 끓인 된장국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분홍리본의 시절>은 분홍리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단편에는 화려한 먹거리가 등장한다. ‘나’는 서울을 떠나 소도시의 오피스텔에 도피하다시피 생활을 하고 있고 그곳에서 옛날의 애인이자 동지이자, 사랑했던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이미 결혼했고 남자의 아내는 교수이다.

남자는 ‘나’를 집으로 자주 초대했고 그때마다 남자와 그의 아내와 ‘나’는 갖은 안주를 만들어 술을 마신다. 남자의 아내는 생선 요리를 아주 잘했다. 그녀의 손을 통하면 비릿한 생선이 어느새 맛나는 것으로 변해 있다.

육류를 좋아하는 ‘나’도 생선으로 관심이 옮겨지고 60마리 조기를 사서 매일매일 조기를 구워 먹는다. 한 달 내내 먹은 생선 비린내가 오피스텔 곳곳에 박혀 있다. 그러던 중 남자의 후배(여자이다)가 찾아오고 이제는 남자와 그의 여자후배와 ‘나’가 같이 술을 마신다. 과음을 한 남자의 여자후배는 ‘나’의 오피스텔에서 자고 간다.

그리고 다음날 남자의 여자후배는 “30만원만 빌려 달라.”고 하고 그 돈으로 산부인과 수술대에 오른다.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

남자가 들려주는 한 가지 이야기가 이 소설에서는 압권이다.

“내 불만은 말이지, 콘돔이 왜 과일 맛이나 바닐라 맛 따위만 있냐는 거야. 우리가 애들이야? 갓 구운 마늘빵 맛이라든가 조개 넣고 끓인 시원한 된장 국 맛이라든가 새우튀김이나 게찜 맛 전복죽 맛, 이런 콘돔 진짜 죽이지 않겠어?”

하기야 남자에게는 ‘나’와 ‘후배여자’와 ‘아내’가 있었으니 어떤 맛이었을 지 궁금하기도 하겠다. 그리고 그 맛이 이젠 지겨워지기도 하니, 다른 맛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남자의 후배여자는 수술을 끝내고 사라지고, 남자의 아내가 ‘내’ 오피스텔을 찾아온다.

남자의 아내와 커피를 마시고 일어서는데 남자의 아내가 똑 떨어지는 반말을 한다.

“내가 그렇게 만만했니, 니들?”

졸지에 ‘니들’이 돼 버린 ‘나’와 ‘후배여자’는 무슨 변명인가를 하려 했지만 목구멍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조여들면서 혀뿌리가 갈라지는 듯한 통증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하반신 마비가 된 교수의 주변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약콩이 끓는 동안>, 한 남자가 성묘를 갔다가 근처 휴양원에 직원으로 채용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솔 숲 사이로>, 사형당한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한 여자와 문학 강사의 이야기를 담은 <문상> 등등 권여선의 <분홍리본의 시절>은 욕구불만에 가득 찬 현대인의 모습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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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3월의 눈이 내린다. 그녀는 강변역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사람들은 줄을 서지 않는다. 버스가 도착하면 우르르 몰려든다. 노인과 아이, 임산부와 처녀의 구분이 없다. 밀치고 거친 몸싸움을 한다. 가까스로 버스에 올랐다. 딱 하나 자리가 비었다. 쏜살같이 달려가 앉는다. 옆자리에는 회사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다. 아이패드를 꺼내 영화를 보고 있다. 기웃기웃 엿보는 그녀의 눈에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라는 영화 제목이 스쳐 지나간다.

사람들을 가득 싣고 버스는 출발한다. 창밖으로 함박눈이 쏟아진다. 그녀는 창밖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창밖을 향하는 그녀의 시선은 남자를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다. 남자는 신경이 쓰이는 눈치이다. 몇 번이나 그녀를 곁눈질로 흘끔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계속 창밖에 머물자 남자가 어렵게 말을 꺼낸다.

"영화......같이......보시겠어요?"

남자가 한 쪽 이어폰을 그녀에게 건넨다. 그녀는 순간 당황한다. 그녀가 말한다.

"저......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는 이미 봤는데요. 눈 내리는 모습이 더 좋아요."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남자가 들고 있는 이어폰 한 쪽이 심하게 흔들린다. 남자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향했다. 함박눈은 함박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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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사람을 구분할 때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가장 기본적 방법이다. 이 기본적 방법이 사회문화적 의미를 가질 때 상황은 복잡해진다. 남성=지배자⋅우성으로 여성=피지배자⋅열성으로 표현될 때 그 상황은 더욱 꼬인다.

역사는 늘 남성과 여성을 비교해 왔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삶이 고통 받고, 희생당했으며 자신의 삶보다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성이 아니라 ‘엄마’로, 여성이 아니라 ‘아줌마’로, 여성이 아니라 ‘할머니’로 포장돼 교묘하게 남성들에 의해 희생된 삶이 그려져 왔고 지금도 채색되고 있다.

지난 20일 일요일.

아내와 아이들 손잡고 산북작은도서관을 찾았다. 아이들의 경우, 일주일에 두세 번은 작은도서관을 찾는다. 산북면에는 도시만큼 많은 인구가 살지 않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내가 느끼는 행복감은 그래서 아주 크다. 면사무소가 있고 농협과 새마을금고가 있고, 우체국이 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고, 성당이 있고, 작은 미니 인조축구장도 있고, 치킨 집은 무려 3군데나 된다.

행정편의를 위한 것, 문화, 종교, 교육, 음식, 체육시설 등 없을 게 없다. 물론 도시처럼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작고 소박한 것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작은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이 아주 만족스럽다. 장르별로 갖춰져 있는 책은 아이들에게 좋은 계기를 만들어준다. 굳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도서관에서 또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작은 삶을 서로서로 가꿔 나가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정기적으로 각종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역민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것도 아름답다.

아이들에게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자, 놀이공간이자, 삶을 배워나가는,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도서관을 갈 때마다 몇 권의 책을 빌려온다. 나는 주로 소설과 시, 그리고 역사에 대한 책을, 아내는 여행이나 혹은 생활에 관련된 도서를, 아이들은 동화나 문고판을 고른다.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도서카드를 가지고 있어 한꺼번에 열 권 이상을 빌릴 수가 있다.

이번 주에 내 손으로 들어온 책은 전경린의 <풀밭위의 식사>와 백석시선집, 그리고 권여선의 단편 소설집이었다.

<풀밭위의 식사>와 <엄마의 집>

전경린 소설을 모두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 전경린의 소설 속에는 여성과 음악과 예술이 그려진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은 남성에 비교되는 대상이다. 여성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이 아니라 여성 그 자체의 삶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가장 단순한 이분법에서 여성에 중점을 두고 그들의 삶에 대한 그림 그리기가 전경린 소설의 주된 흐름이다.

전경린의 <풀밭위의 식사>를 먼저 읽어 나갔다. 몇 년 전 <엄마의 집>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몇 장을 읽지 않았는데 <풀밭위의 식사>는 <엄마의 집>의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특별한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여자 주인공들이 모두 예술(풀밭위의 식사에서는 유리공예, 엄마의 집에서는 미술)에 관계되는 묘사도 이어졌다.

상처는 고스란히 들추어 낼 때 아문다. 그런데 그 ‘들추어내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도대체 들추어낸다는 것이 어떤 것이란 말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의 삶과 고통, 그리고 상처...그 속에서 조금씩 꿈틀거리는 희망과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전경린은 풀어나가고 있었다.

소설은 이누경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이누경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 시작도 녹녹치 않다.

“이상하지, 분위기가 이런 식으로 우아해질 때면 내가 속물처럼 느껴져⋯”

우아한 분위기에 있을 때면 ‘속물처럼’ 느껴지는 이누경! 이 한 마디에 누경의 지금까지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누경이 도훈(여성지 기자)과 기현(도훈의 선배), 그리고 친구 상미와 와인바에서 와인을 마시면서 내뱉는 말이다. 그 자리에서 처음 보는 기현은 누경의 이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느낀다. 기현은 누경의 눈빛을 보면 더욱 누경의 묘한 매력(?) 속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남자들은 고독하고 우울하고, 뭔가 상처 있는 듯한 여자에 대한 미련이 있는 것일까.

누경이 ‘우아해질 때면 속물처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경의 열여섯 살에서부터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누경에게 열여섯 나이는 단순한 생물학적 나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열여섯에 자신의 삶 속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일이 한꺼번에 소용돌이 쳐 들어왔기 때문이다.

누경의 먼 친척 되는 서강주.

누경 엄마의 사촌언니가 서강주의 엄마였다. 서강주는 누경의 집에서 고등학교를 보내고 대학을 가고 유학을 다녀온 뒤 교수가 된다. 누경은 그런 서강 주를 사랑한다. 그러나 누경의 나이 열여섯, 서강주는 결혼하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 서강주의 결혼식에 누경은 직접 참석한다.

서강주가 신부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에 누경은 눈물을 흘리지만 아버지가 “너는 왜 우니?”라고 말한다. ‘왜 우는지’ 아버지에게 말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강주의 결혼식이 끝난 그 주 일요일. 열여섯 누경에게 서강주 결혼식 보다 더한 충격적 사건이 일어난다. 누경은 녹색 원피스를 입고 들판 끝까지 걸어간다.

“나는 이제 자라지 못할 거야. 이렇게 들판에 버려져 까맣게 잊힐 거야⋯세월이 흘러도 언제까지나 나는 열여섯 살 소녀로 늙을거야⋯”

서강주의 결혼으로 누경의 마음속에 있던 서강주는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 버렸다는 절망감과 열여섯 소녀의 감수성. 그러니 누경에게 열여섯은 더 이상 자라지 않을 것이고, 이대로 늙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들판에 누워있는 열여섯 누경에게 감당하지 못하는 비극이 찾아온다.

“나는 두 팔을 풀밭 위에 가지런히 펴고 그대로 눈을 감았어요. 내 눈 앞에 깨어진 유리병 주둥이를 쥔 손이 다가왔어요. 그리고 낯선 남자의 손이 원피스 자락을 들어 올렸어요. 두 팔을 꼼짝도 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갔어요.”

열여섯에 그녀의 모든 것이었던 한 남자는 떠나고, ‘이젠 더 자리지 못할 거야.’라며 들판을 배회하던 중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찾아온 것이다. 악몽이었으리라고 생각할 만큼...누경의 열여섯! 이 두 가지 사건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누경은 그런 자신의 삶을 끌어안은 채 대학을 나오고 회사에 취직한다. 8년 만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복학한다. 특별히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공허한 공부의 시간⋯대학원 공부와 함께 유리공예에 관심을 가진다.

그곳에서 서강주를 다시 만난다. 서강주는 누경이 다니는 대학의 교수였다. 그렇게 만난 둘은 산책을 나가게 되고, 산책에서 우연찮은 일로 누경은 서강주에게 기대게 된다. 누경의 한 쪽 신발 뒷굽이 부러지고 만 것. 그것이 그들의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서강주가 누경을 부축하면서 주차장까지 왔고 그들은 뜨거운 포옹으로, 서로를 탐닉하는 사랑으로, 그렇게 상처 입은 둘의 사랑이 시작된다. 서강주는 이미 결혼한 중년의 교수로, 누경은 고스란히 자신의 열여섯 상처를 안은 여자로, 그들의 사랑은 이미 비극을 향해 나아가는 예정된 길이었다.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이런 고통을 안고 있는 누경에게 기현의 접근은 접근 자체가 ‘불허되는’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경의 깊은 눈과 알 수 없는 분위기에 기현은 빠져들지만 누경은 철저하게 차단막을 친다. 누경의 상처는 어느 누가 만져줄 수 없는 그녀만의 상처였다.

<엄마의 집>은 ‘미스 엔’이라 불리는 엄마와 효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스 엔’은 미술을 전공한 뒤 지금은 캐릭터 디자인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엄마는 아버지와 이혼한 뒤 효은과 함께 살고 있다.

아버지는 대학시절 운동권이었고, 지금은 자신의 밥벌이도 변변히 해결 못하는 무능력자로 그려진다. 그런 ‘미스 엔’과 효은의 공간에 이혼한 아버지가 알지 못하는 아이, 승지를 맡겨 놓고 사라져 버린다.

‘미스 엔’은 효은과 함께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 나서고 옛날의 아버지 친구며, 당시의 일들을 떠 올린다.

<엄마의 집>에 나오는 구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대목 하나.

“지금 세상이 군사독재보다 더 무서운 독재래요. 온 국민이 돈에 억눌려 옴짝달싹 못 하는 세상 아니에요. 젊은이들로부터 노인들까지 경제에 얽매여 딴 궁리할 틈이 없어요.”

이런 세상이나 양어장의 물고기 눈을 보면 너무 슬퍼 ‘양어장을 경영할 수 없다.’고 말하는 아버지는 얼마나 무능력한 사람으로 비칠까. 학생 시절 민주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돈의 독재’ 시대에 또 얼마나 쓸모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혔을까.

전경린은 “고통이 머물러 있는 곳이 내 글쓰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작가의 말을 통해 말했다. 고통을 안고 있는 누경에게 역설적인 평온함을 주는 ‘풀밭위의 식사’를 제공해 주고 싶었노라고.

누경과 같은 고통을 간직하고 있는 여성들이 ‘식사’를 끝낸 뒤 풀밭 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며 ‘양떼구름’을 좇았다 어느새 흩어지는 평온함과 공허함을 느낄 수 있을까. 고통의 뿌리를 내려놓고 ‘풀밭위에서’ ‘식사’를 할 수 있을까.

전경린이 <풀밭위의 식사>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이 간직하고 있는 고통이 아니라, 당신도 ‘풀밭위의 식사’를 할 수 있고, 할 수 있으며,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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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펜과 컴퓨터 자판기를 통해 표현되는 글을 통해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하는 것일까.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나의 의미로, 딱 꼬집어 이게 정답이다는 게 없다. 무수히 많은 정의가 나올 수 있다.

① 글을 쓰는 게 좋다. 세상과 호흡하고 싶다. (나의)존재감을 느낀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

② 돈을 위해, 생계를 위해서 글을 쓴다.

③ 글을 쓰면 명예도 얻고, 보람도 있고, 돈도 벌고, 그 모든 것이 좋다.

크게 이 세 가지의 범주에서 작가에게 글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글의 의미’를 짚어 보면 이제 “작가란 무엇인가, 누구인가?” 혹은 “작가란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①의 경우에 작가란 광범위한 사람들로 구성될 수 있다. 블로그를 통해 글을 쓰는 사람, 트위터에 글을 올리는 사람, 일기를 쓰는 사람…펜이나 연필, 혹은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며 어떤 글자든 적어 내고,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모든 사람들이 ①의 작가군(群)에 포함될 수 있다.

②의 경우는 ①에 비해 범위가 좁아진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사람, 트위터로 소통하는 사람, 일기를 쓰는 사람 등등은 “돈과 생계를 위해”서만 글을 쓰지는 않는다. ②의 경우는 아마도 우리가 소위 말하는 ‘전업 작가’라고 표현해야 할 듯 하다.


전업 작가가 되는 경우는 여러 가지이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등단을 하거나, 혹은 단행본을 직접 발간해 문단계의 주목을 받아 프로작가로 인정을 받든가…②의 경우에는 자신의 생계-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경제활동을 한다(아니 할 수밖에 없다)-를 위해 글을 쓰는 ‘직업 작가’로 규정할 수 있다.

③의 경우가 사실 가장 어려운 ‘작가군(群)’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①과②의 경우에 해당되는 작가들을 우리는 현실에서 쉽게 보고 만날 수 있다. 그만큼 많다. 그러나 ①에도 해당되고 ②에도 포함되면서 ③에 해당되는 작가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③에 해당되는 작가는 ②와 ①의 교집합이면서도 사실 모든 부러움을 받는, 조금은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해석한다면 지나친 평가인지는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누구누구 작가”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 그 작가!”라는 감탄사가 나오게 만드는 작가들이 ③에 해당된다.

김영하에게 작가와 글의 의미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문학과 작가란 무엇인가.’를 두고 김영하 작가와 조영일 비평가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김영하가 생각하는 ‘문학과 작가’는 어떤 의미일까.

김영하는 “작가란 외부의 인정이 없어도 작가일 수 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꾸준히 쓰고 있다면…”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예술가 개인은 시장의 규모도, 진입장벽의 높이도, 정치 제도도 바꾸지 못한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당분간 오직 우리 자신뿐”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김영하에게 있어 작가와 글의 의미는 ①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굳이 “당신을 작가로 인정합니다!”는 등단이나 혹은 문단계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면, 외부의 인정 없이도 작가일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에 반해 조영일 비평가의 생각은 다르다.

조영일은 “모든 작가는 프로(생계수단으로 삼거나 혹은 그러려고 노력해야)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굳이 정의하자면 ②의 정의에 가깝다. 나아가 조영일은 “자신을 바꾸는 것은 힘들다. 왜냐하면 나는 세계가 바뀌는 만큼만 바뀌기 때문”이라고 말해 자신을 바꾸는 싸움이 아닌 ‘세상의 틀을 바꾸는, 혹은 세상과 소통하는 장소’로 작가는 나서야 한다고 분석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이런 논쟁을 보고 듣고 보다가 최근 김영하의 소설집을 만나게 됐다. 2004년 <오빠가 돌아왔다>이후 6년 만에 나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라는 단편 소설집이었다.

김영하가 논쟁을 벌인 ‘작가는 인정을 받든 아니든 글을 쓰면 작가이다.’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 뿐’이라는 그의 말이 그대로 표현된 소설집이 아닐까 싶다.

소설의 내용이야 읽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내용도 다양하게 해석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분명 이 소설집은 김영하의 펜을 통해 탄생된 만큼 작가가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고 싶었는지는 ‘작가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영하는 ‘작가의 말’을 통해 “청탁 없이 내킬 때 쓴 소설들이 대부분이어서일까. 모아 읽는 호흡이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고 막힘이 없었다.”라고 적었다. ‘청탁 없이 내킬 때’라는 그의 외침 속에서 “작가는 언제든 글을 쓰고 있을 때 작가”라는 그의 말이 되살아났다.

또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그의 주장도 소설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이 소설집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사건은 일어나고 “나는(소설속의 주인공들) 그 사건으로 인해 변화되고 깨닫게 된다.”는 메시지를 소설 곳곳에 깔고 있다.

이런 소설이 대부분이다 보니 김영하 자신에게는 이번 소설집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연스럽고 막힘이 없었다.”로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읽는 독자인 나에게는 뭔가 답답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소설의 뿌리가 뻗어나가지 못하고 성긴 뿌리에 머문 느낌이랄까. 철저히 자기 자신 안에서 모든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사회적으로 확대되거나 혹은 뻗어나가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가 곳곳에서 엿보였다.

이번 소설집의 대표적 소설, <로봇>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첫 번째,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두 번째,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단 이러한 명령들이 첫 번째 법칙에 위배될 때는 예외로 한다.

세 번째, 로봇은 자신을 보호해야만 하고 단 그러한 보호가 첫 번째와 두 번째 법칙에 위배될 때는 예외로 한다.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대형빌딩 사무실에 출근하는 수경. 여행사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사장의 ‘애인(육체적)’ 노릇까지 감당한다. 그런 그녀에게 비 오는 지하철 어느 출근길, 한 남자가 다가온다. 그의 이름은 이문상.

이문상은 로봇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문상의 꼬리뼈 부분에 버튼이 있고 누르면 멈추고 다시 작동한다. 그런 이문상과 수경은 격렬한 사랑을 나눈다. 수경이 버튼을 누르는 만큼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수경은 점점 이문상에게 빠져 든다. 수경이 이문상에게 빠져들자 이번엔 이문상이 수경을 떠난다. 이문상이 말하는 ‘이별의 변(辨)’.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순간, 내 머릿속의 프로그램이 이제 당신을 떠나야 할 때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열정적 사랑은 인간인 당신을 해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로봇의 3원칙 중 “인간에게 해가 가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원칙 때문에 그는 수경을 떠난다. 문상이 떠나고 난 뒤 수경은 백과사전에 기록돼 있는 ‘로봇 3원칙’을 정서한 뒤 찬찬히 읽어 본다.

<로봇>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로봇>은 ‘연애소설’ ‘사랑에 대한 정의는 무엇인가’ ‘자신을 감추고 표피만 강조하는 현 시대의 우울한 에피소드’ 등등. 그러나 이상하게 나에게는 ‘멍한’ 느낌이었다.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관계’ 설정에 대한 우연과 필연을 통한 비극을 담은 <여행>, 잘 나가던 한 가수의 인생 추락을 보여준 <악어>, 아이스크림에 얽힌 소박한 이야기를 담은 <아이스크림> 등이 이번 소설집에 수록돼 있다.

또 <명예살인>과 <약속>은 짧은 이야기를 통한 소설적 구성을 담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김영하의 소설쓰기가 앞으로 어떤 과정을 걸어갈 지는 지켜보아야 할 것이 분명하다. 이번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는 김영하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쓰기와 자기 내면을 보여주는 ‘작가는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며 자신을 바꾸는 일을 하는’ 명제를 확인시켜 주는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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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어제 우리 어머니가 분노하셨다. 퇴근해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TV를 보고 계시던 어머니가 안방에서 갑자기 나오셨다. 그러더니 “세상에! 세상에!”를 연달아 내놓으신다. 우리 어머니는 자주 분노하신다. TV에 나오는 세상 소식에 특히 분노의 진동파이 크다.

가락시장에서 폐식자재가 고스란히 다시 유통되고 있다는 소식이 방송을 통해 보도됐다. 폐기처분해야 할 음식물 쓰레기와 유통기한이 지난 식자재가 대형 음식점과 대중식당에 팔려나가고 있다는 뉴스.

당근! 어머니는 분노하셨다.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바깥에서 뭐 하나 사 먹을 수나 있겠나?” 어머니의 분노는 고스란히 내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직장 생활하다보니 당연히 바깥에서 음식을 사 먹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니.

‘추한’ 것으로 치자면 인간만큼 더 ‘추한’ 생명체도 없을 것이다. 어둑어둑한 숲길을 혼자 걷고 있을 때 가장 무서운 존재는 호랑이도 아니며 그렇다고 사자, 곰도 아니고…저 멀리 뚜벅뚜벅 그림자만 보이며 다가오는 인간의 발자국 소리라고 하지 않았든가.

먹이사슬의 영역에서도 인간은 무척이나 이기적 생명체이다. 최후 포식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편의를 위해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쯤은 대수롭지도 않게 여긴다. 여기에 더해 인간을 포악스럽고 ‘추하게’ 만드는 매개체가 있다. 다른 생명체에게는 전혀 없는 그 무엇이 인간을 추하게 만든다. ‘돈’이다.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추한 일과 악한 행동…모든 추악한 것에 그 원인을 파고들어가 보면 궁극적으로 ‘돈’에 맞닿는다. 최후 포식자인 인간을 옴짝달싹 못하게 옥죄여 오는 것이 바로 ‘돈’이다. ‘돈’으로 아름다움을 사고, ‘돈’으로 명예를 구입하고, ‘돈’으로 사랑까지 살 수 있다니…무서운 세상 아닌가.

여기 ‘못생긴’ 여자와 ‘그저 그런’ 한 남자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못생긴 여자’를 두고 ‘추녀’라고 말한다. ‘추녀’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공포이다.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생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추녀’.

그 ‘추녀’를 사랑하게 되는 남자가 있다. 바로 나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백화점 주차 아르바이트를 통해 만나게 되는 ‘나와 추녀’의 이야기를 장편에 담았다. 뻔 한 주제를 이렇게 많은 글자 속에 녹여낼 수 있는 박민규의 글쓰기에 감탄했다. ‘나와 추녀’ 사이에서 매개체 역할을 하는 요한의 인물 또한 입체적으로 그려놓았다.

‘못 생긴’ 추녀와 ‘그저 그런’ 나, 그리고 ‘자유롭게 삶을 사는’ 요한의 젊은 시절. 지하 주차장에서 주차하는 청춘들이지만 ‘그들만의 공간’이 있어 행복하다. 그들을 자연스럽게 묶이게 하는 것은 틀린 영어 단어가 가득한 맥주 집.

허름한 맥주 집에 자주 드나드는 그들에게 입구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Bear’와 ‘Hope’는 틀린 영어로 다가오지 않는다. ‘Bear’와 ‘Hope’는 분명 영어 단어에 있다. ‘Beer’와 ‘Hop’가 어울리지 않는 그곳에서 그들은 큰 곰을 이야기하고 희망에 대한 토론도 이어간다.

그러나 ‘추녀’의 자격지심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의 관심 자체가 ‘추녀’에게는 동정심으로 다가오고 끝내 ‘추녀’는 ‘나’를 떠난다. ‘나’는 ‘추녀’를 찾기 위해 그녀의 주소록을 입수하고…떠난 추녀는 어디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다행히 그녀는 포장지 회사의 경리사원으로 입사해 잘 근무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추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장이 왜 날 채용했는지 알았어요. 전에 근무하던 경리사원은 얼굴이 아주 예뻤대요. 그 사원은 회사 공금을 가지고 한 남자와 도망치고 말았죠. 사장이 어느 날, 전화 통화하는 것을 들었어요. 사장은 ‘못 생긴 애들도 다 제 몫을 한다니까. 누가 건드리겠어? 누가 쳐다나 보겠어? 경리사원은 아주 못생긴 애로 뽑아야 해!’”

‘추녀’에게 이 세상의 모든 눈빛과 모든 말들은 고스란히 상처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말에 그녀는 놀랄 수밖에 없고, “왜 나를 사랑하시죠? 동정인가요?”라는 말만이 그녀의 머릿속에 감돌뿐이다. 그 깊은 상처를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그녀는 철저히 자신만의 세상에 존재하고 다른 사람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생존 방법이다.




그렇게 그녀는 한국을 버리고 독일로 떠난다. 뒤늦게 작가로 성공한 ‘나’는 독일에 가는 길에 그녀를 만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눈(雪)으로 시작해 눈(雪)으로 끝난다. 그녀를 안았을 때도 눈이 왔고 독일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도 눈이 왔다.

박민규의 소설은 이제 완전히 상징계로 넘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통속 문학인가 본격 문학인가에 대한 논의는 비평가들의 몫으로 남겨두자. 이상문학상까지 수상했으니 본격 문학이라고 평해도 되지 않을까.

통속과 본격을 두고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부분이다.

“통속과 본격 문학을 두고 나는 구분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나름대로의 영역에서 나름대로의 독자를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입니다. 나도 통속소설이든, 만화든, 본격 문학이든 구분을 두지 않고 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통속 문학에 속하면서도 자신은 본격 문학을 하고 있다고 나대는, 잘난 체 하는 작가들입니다.”

문학 평론가 가와타니 고진의 말이다.

박민규는 분명 최근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아 왔다고 생각한다.

그는 <카스테라>를 통해 냉장고로 들어갔고, <대왕오징어>를 통해 바다속 깊은 심연을 휘젓고 다녔으며,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켰어요>에서는 아예 화성까지 갔다 오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의 상상력은 그가 쓰고 있는 큰 안경만큼이나 다양하고 컸다. 온갖 상상의 세계에서 외로움을 느꼈던 것일까.

2010년 이상문학수상작인 <아침의 문>을 통해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진다. 동반 자살을 결심한 나는 실패로 돌아가 눈을 뜰 수밖에 없었고, 저 건너편 옥상에서 아이를 낳고 있는 미혼모와 눈이 마주친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위에서 따뜻한 온기를 품은 아이가 태어났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와 <아침의 문>은 현실에 바탕을 둔 상징계의 소설적 목적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소설 자체가 현실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다. 왜 작가가 우주에서 어느 순간 뿅!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 작가도 ‘응애응애’ 울음을 울고, 젖을 먹거나 분유를 먹었으며,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등 교육을 받았고, 작가도 술을 마시고, 뉴스를 보며 분노하고, 변비에 걸리지 않았다면 ‘응가’를 하기 때문이다.

현실에 살고 있는 작가의 상상력이란 게 그래서 터무니없는 상상일 수는 없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조금씩 발을 옮긴 박민규는 이제 자신의 현실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2011년 봄호 <창작과 비평>에서 박민규는 이른바 ‘386세대’에게 이런 말을 전한다.

“이른바 ‘386 세대’는 각오만 있었지 각성은 없었다.”

1968년생인 자신 스스로 ‘386세대’이기 때문에 이 말은 자신에게 던진 비판적 목소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각오만 있었지 각성이 없었던 386’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으로 인해 현실은 또 어떻게 됐을까. 앞으로 나올 박민규 소설이 중심적으로 다룰 주제가 아닌가 싶다. 박민규의 각성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각오(覺悟)

-품사 : 명사

-앞으로 해야 할 일이나 겪을 일에 대한 마음의 준비.

-(예문)비장한 각오

*각성[覺醒]

-품사 : 명사

-깨어 정신을 차림.

-(예문)어려움을 헤쳐 나가려는 지혜와 현실에 대한 각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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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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