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파트 층간 소음문제로 이웃들 갈등이 심각하다. 석양이 내리쬐는 저녁에 다정히 맥주 한 잔 해야 할 이웃들이 주먹질과 싸움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은 아프다. 위층과 아래층의 입씨름이 드잡이로 발전하고, 드잡이를 넘어 심지어 살인까지 일어나는 비극적 마당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

 

층간 소음문제가 생기게 된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위층에서 밤마다 뛰어 다니는 개념 없는, 철없는 조무래기 때문일까. 또 이상스럽고 괴기스럽게도 새벽마다 세탁기를 돌리고 책상을 질질 끌고 다니는 구제불능의 위층 어른들 때문일까.

 

그들에게 털끝만큼의 잘못도 있다고 치자. 그래도 그것은 근본적 원인은 아니다. 애초부터 이 건물이 잘못 지어진 탓이다. 새 아파트에, 처음 가져보는 내 집으로 이사 온 바로 그날, 위층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는 소리. 이럴 때 위층의 비신사적 행동을 떠올리기 전에 위층의 자유를 돈으로 속박해 버린 건설 회사를 먼저 떠올려야 한다.

 

자본주의 건축주의 농간에 애꿎은 두 가족만이 비극을 만나는 지점에 우리는 지금 서 있는 것이다. 돈 다 내고, 아늑한 공간에서 가족과 안락한 휴식을 맞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적은 돈을 들여 큰 이익을 내는 것이 자본주의 속성. 아파트를 대충 만들어 놓고 눈속임으로 높은 가격으로 건물을 판다. 그 상황에서 층간 소음을 차단하는, 제대로 된 자제가 들어갔을 리 없다.

 

어쩌다 우연히 같은 건물의 위층과 아래층에 살고 있을 뿐인데, 처절하게 층간 소음을 두고 싸워야 한다.

 

이렇게 해보자. 먼저 층간 소음문제로 위층과 아래층이 심각한 갈등관계에 있다면, 먼저 아래층 사람이 위층의 초인종을 눌러보자.

 

(딩동 딩동)

아래층: “아래층 사람입니다. 잠시 우리 생맥주나 한잔 할까요?”

(뜬금없는 아래층 출연에 긴장. 하지만 생맥주라는 말에 솔깃.)

위층: “생맥주요? 좋지요.”

(아래층 부부와 위층 부부가 나란히 나란히 치킨 집으로 간다)

아래층:(호기롭게 생맥주 네 잔을 큰 소리로 시킨다. 그리곤) “위층 애들이 참 쾌활하고 운동신경도 좋은 것 같아요.”

위층:(이거 칭찬이야? 라는 의문을 갖으면서도) “아, 예. 예...”

아래층: “애들이 뛸 때마다 쿵쿵 소리가 너무 커요. 층간 소음 문제가 심각하단 이 말입니다. 이 아파트, 작은 돈 내고 산겁니까? 아니잖아요. 엄청 비싸게 우리 집이라고 샀는데, 건설회사가 속여 먹었단 이 말입니다. 아이들이 실컷 뛰어놀지도 못하고 말이죠.”

위층: (뭔 수작이지?라는 반응.) “아, 예. 예....”

아래층:(더욱 큰 목소리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이 말씀입니다.”

(그때 주문한 생맥주 네 잔이 나온다.)

아래층:(이어서) “위층 아이들이 무슨 죄입니까. 아이들이 뛸 정도의 진동도 흡수해 주지 못하는 이 현실이 문제지 않겠습니까. 우리 뭉칩시다. 이 아파트를 건설한 회사를 상대로 한 번 제대로 맛을 보여주자 이 말씀입니다. 어때요?”

위층: “아, 예. 예...”

아래층: “좋습니다. 그럼, 우리 뭉친 것으로 알고 건배!!”

 

두 가족이 뭉쳐 아파트를 지은 건설 회사를 상대로 싸움을 전개한다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 하는 게 정상이지 않은가.

 

성석제의 위풍 당당 가족

 

강을 사이에 둔 두 가족이 있다.

 

여기 A 가족이 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정자와 난자의 필연적 만남으로 탄생한 가족이 아니다. 드라마 촬영지로 만들어졌다가 지금은 폐허가 된 곳에 ‘아픈 사연’을 가진 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이들의 만남이다.

 

이들은 버려진 ‘상업적 터전’(드라마 터전이었고 관광지로 조성됐지만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폐허의 공간)에 하나 둘씩 우연히 모여든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 인생의 허무에 빠진 남자 등등.

 

이들은 이 폐허의 공간에 모여 ‘또 다른 가족’을 만든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는 엄마가 되고, 인생의 허무에 빠진 남자는 아빠로,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또 다른 ‘아이’로. 그렇게 우연히 결성된 가족은 폐쇄된 공간에서 그들만의 터전을 만들고 있다.

 

여기 B 가족이 있다.

 

이 가족 역시 남녀의 결합이라는 관계로 묶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A 가족과 다르다면 B 가족에는 ‘여성’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B 가족은 ‘주먹’으로 맺어진 가족이다. 조직폭력배들이다. 이들은 주먹으로 뭉치고, 형님과 동생만 있을 뿐 아버지와 어머니, 부모와 아들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다.

 

A와 B 가족의 혈투

 

B 가족의 대장이 탄 외제차가 한적한 시골길을 가고 있다. 그때 A 가족에 포함돼 있던 성숙한 한 여자아이가 동네슈퍼에서 물건을 산 뒤 걸어가고 있다. 여자 아이 뒤를 천천히 외제차가 쫓고 있다. 여자아이는 무섭다. 차 안에서는 저 여자아이를 납치하느냐를 두고 말들이 많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 아이가 사라졌다. 풀숲으로 숨어든 것이다. 이 여자아이를 찾기 위해 B 가족의 똘마니가 차에서 내려 수색한다. 마침내 찾았지만 B 가족의 똘마니는 A 가족의 덩치 큰 또 다른, 잠복해 있던 아이로부터 뒷덜미에 무시무시한 몽둥이 공격을 당해 힘없이 쓰러지고 만다.

 

이를 계기로 B 가족은 A 가족의 근거지를 수색하게 되고 급기야 A 가족과 B 가족의 혈투가 진행된다.

 

A 가족에게서 폭행을 당한 B 가족의 보복 폭행으로 치닫는 싸움이다. 소설 내용은 진지하지 않다. 성석제 특유의 입담으로 이게 싸움인지, 개그콘서트의 연출된 주먹질을 보고 있는지 헷갈린다. 전혀 심각하고 대립적이지 않은, 그냥 A가족과 B가족의 피터지고, 가끔씩은 지저분한 대결이 벌어진다.

 

그 사이에 강 저 편에서 포클레인과 중장비로 무장한 공사가 점점 이 쪽으로 다가온다. 그제야 A 가족과 B 가족은 이렇게 피터지게 싸워봤자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픔 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강이 파헤쳐지고, 무너지고 있는 현실에 공감대를 형성한다.

 

성석제의 <위풍당당>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생물학적이고 유전적인 가족 개념이 아니다. 아픈 사람들이 뭉쳐 있는 가족과 주먹으로 맺어진 가족의 웃지 못 할 해프닝을 담고 있다. 그 사이에 그들의 터전이 되고 있는 강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층간 소음문제로 갈등 관계에 있는 아래층과 위층도 생물학적으로, 혹은 유전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같은 공간에 들어서게 됐고, 위층과 아래층이라는 특별한 관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층간 소음문제로 서로 아프고, 상처만 되는 싸움을 전개할 것인가. 아니면 서로 힘을 합쳐 지금은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울 것인가. 그것은 선택의 몫이다. 층간 소음문제로 다툼의 상황에 있다면 아래층이든 위층이든 먼저 성석제의 <위풍당당>을 권해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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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우리에게 ‘왕’은 필요한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 우선 성석제의 <왕을 찾아서>를 읽는 준비가 될 것 같다. ‘왕’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왕’은 권력의 상징이다. 어느 시대든 간에 왕은 존재해 왔다. 다만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

‘왕’은 여러 종류가 있다. 권력을 쥐기 전까지는 모두 국민들을 위한다는 말을 한다. 국민들이 최고이며, 국민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돼 있으며, 국민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소리 높여 말한다. 그러나, ‘왕’이 된 이후에는 변한다.

얼마 전 미국의 폭로 전문사이트인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한국 대통령에 대한 평가 자료를 내놓았다는 뉴스가 있었다. 주한 미국 대사의 평가 자료를 바탕으로 내놓은 결과인데 그 멘트가 눈길을 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성격이 다혈질이고 보수적인 정치 이념을 갖고 있는데, 대다수 정책 현안에 대해서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

“국제무대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로 외교 정책 모든 부문에서 능숙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고졸 출신의 대통령으로서 국제무대에서는 신인이지만 주관이 뚜렷하고 신념이 확고하다.”

민주주의에서 ‘왕’은 대통령이다. 아직까지 왕이 있는 나라들이 많다. 영국과 일본이 그렇고 아랍의 여러 나라에서도 왕의 혈통이 보존되고 있다.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의 선거를 통해 ‘왕’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무수히 많은 ‘왕’을 모시고(?)사는 꼴이다.

가정에서, 회사에서, 동호회에서, 친목모임에서, 그 이름만 다를 뿐 ‘가장’ ‘사장’ ‘회장’ 등 수많은 ‘왕’을 모시고 살아간다. 그런데 과연 ‘왕같은 왕’을 만나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왕을 찾고 있는가

성석제 작가를 직접 만났던 적이 있다. 1996년이었던 것 같다. 서울신문사에 있으면서 그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당시 촉망받는 30대 작가군이라는 타이틀로 인터뷰를 진행했었는데, 은희경, 차현숙, 박상우, 성석제 이렇게 네 명의 30대 작가들을 만났던 기억이 난다.

그의 소설 <왕을 찾아서>도 성석제 소설가로부터 직접 받았다. 책의 첫 장에 성석제 작가가 직접 사인한 글자도 보인다. 오랫동안 책장에 보관돼 있다 다시 읽게 된 셈이다.

어떤 계기가 <왕을 찾아서>라는 책을 다시 읽게 됐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성석제 작가는 개인적으로 아주 존경해 하는 작가 중 한명이다. 그의 소설은 철저하게 ‘농부형’이다. 누구나, 어떤 이든 한번쯤은 겪어 봤을 만한 평범한 이야기들을 그는 적는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그의 글을 통과하고 나면 진부하지 않고 재치 발랄한 언어로 탈바꿈되면서 재밌는,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탈바꿈된다.

<왕을 찾아서>는 한 조그마한 지역 조직의 ‘왕’ 마사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마사오는 일본 이름으로 한글로 고치자면 ‘정부(正夫)’이다. 마사오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경찰이었는데 아들을 낳자마자 일본 이름을 지었다. 곧이어 해방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한글 이름을 찾았지만 마사오는 그냥 ‘마사오’를 썼다. 그 이유를 두고 많은 궁금증이 일었지만 작가는 다른 엉뚱한 곳에서 이유를 찾는다.

“마사오의 한자어인 ‘정부(正夫)’는 해방이 되면서 대한민국 ‘정부(政府)’의 그것과 발음이 같았고, 남편과 아내가 있으면서도 다른 남자와 여자를 사랑한다는 의미의 ‘정부(情夫, 情婦)’와도 소리가 같아서 마사오는 그냥 마사오를 쓰기로 했다.”

그래서 <왕을 찾아서>에서 ‘왕’인 마사오는 “마사오는 그냥 마사오이다”라는 말로 통칭된다.

<왕을 찾아서>는 작은 지역의 1인자를 둘러싼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마사오를 정점으로 2인자, 그리고 마사오가 병들어 조직에서 퇴출됐을 때 그 후임을 두고 벌어지는 모략과 폭력, 2인자의 끝없는 갈등과 싸움.

폭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왕을 찾아서>는 전혀 무겁지도 않고 잔인하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폭력적이지 않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작가의 ‘입담’과 ‘재담’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잔뜩 호기심만 불어 넣는다.

성석제 작가 특유의 이야기꾼 자질과 술술 넘어가는 평이하면서도 입체적인 소설 쓰기는 <왕을 찾아서>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가령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마사오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마사오는 병원비를 그동안 한 푼도 내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더 이상 치료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병원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인다.

그동안 마사오의 은덕(?)을 어떤 방식으로든 입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지역민들이 병원에서 시위를 하지만 병원은 끄덕도 하지 않는다. 그러자 지역민들을 입을 모아 이렇게 외친다.

“우리는 앞으로 이 병원을 절대 이용하지 말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절대 아프지 말아서 병원에 오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가 병에 걸리지 않으면 이 병원은 마침내 망하고 말 것이다. 앞으로 절대 아프지 말자.”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병원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병원을 망하게 하기 위해” 찾는 방법이 “우리 스스로 건강을 챙기고 절대 병원에 오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한참이나 웃었다. 한참이나 생각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병원은 돈에 환장한 조직인데, 그 조직과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건강 챙기기’라는 결말에 이르는 모습은 읽기도 신나고, 괜히 허허! 허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성석제 소설을 읽는 재미

<왕을 찾아서>에는 성석제 작가의 특유의 재치와 문장 들이 가득하다. 그런 재치와 문장이 띄엄띄엄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의 매 장마다 나오니, 이 소설은 한번 손에 잡으면 계속 읽지 않을 수 없다.

1996년 내가 성석제 작가를 만나러 갔을 때, 아마 그때 장소가 평촌-산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한 쪽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는 한 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나: “아니,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까?”

성석제 작가: “좀 다쳤습니다.”

나: “많이 다치셨습니까?”

성석제 작가: “아닙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데 의사가 깁스를 하라고 하더군요.”

나: “불편하시겠습니다.”

성석제 작가: “조금은 불편하네요.”

뭐, 이런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무의식중에 떠 오른다.

나: “아니,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까?”

성석제 작가: “좀 쉬고 싶어서 몽둥이로 다리를 기절시켰습니다. 하도 찾는 놈들이 많아 깁스를 하고 두문부출하고 있습니다.”

나: “많이 다치셨습니까?”

성석제 작가: “다리 한쪽이 숨을 못 쉬겠다고 시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연필을 집어넣어 가끔 긁어주기도 하는데, 이놈의 다리가 분초를 다퉈 짜증난다고, 숨이 막힌다고 하는군요.”

나: “불편하시겠습니다.”

성석제 작가: “불편은요? 찾는 놈 있으면 이런 꼴이라고 말하면 변명하기 좋지, 어디 가지 않으니 드러누워 잠자기 좋지,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으면 책 읽으면 되지, 다리 한쪽이 계속 시위를 하는 것만 빼고는 전혀 불편함이 없습니다. 천국이 이보다 더 좋을까요?”

성석제 작가의 이야기 ‘꾼 기질’은 그 어느 소설가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특히 그의 소설이 빛이 나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고, 식상하지 않고, 신선하다는 것에 있다.

<왕을 찾아서>는 1인자를 둘러싼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곳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인생이 들어 있다. 삶을 통해 한번쯤은 접할 수 있는 슬픔과 기쁨, 사랑과 배신, 분노와 절망 등 오감각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우리에게 ‘왕’은 어떤 의미인지.....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내가 정말로 인정하고 스스로 따르고 싶은 ‘왕’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성석제의 <왕을 찾아서>를 읽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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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