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구분할 때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가장 기본적 방법이다. 이 기본적 방법이 사회문화적 의미를 가질 때 상황은 복잡해진다. 남성=지배자⋅우성으로 여성=피지배자⋅열성으로 표현될 때 그 상황은 더욱 꼬인다.

역사는 늘 남성과 여성을 비교해 왔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삶이 고통 받고, 희생당했으며 자신의 삶보다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성이 아니라 ‘엄마’로, 여성이 아니라 ‘아줌마’로, 여성이 아니라 ‘할머니’로 포장돼 교묘하게 남성들에 의해 희생된 삶이 그려져 왔고 지금도 채색되고 있다.

지난 20일 일요일.

아내와 아이들 손잡고 산북작은도서관을 찾았다. 아이들의 경우, 일주일에 두세 번은 작은도서관을 찾는다. 산북면에는 도시만큼 많은 인구가 살지 않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내가 느끼는 행복감은 그래서 아주 크다. 면사무소가 있고 농협과 새마을금고가 있고, 우체국이 있고,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고, 성당이 있고, 작은 미니 인조축구장도 있고, 치킨 집은 무려 3군데나 된다.

행정편의를 위한 것, 문화, 종교, 교육, 음식, 체육시설 등 없을 게 없다. 물론 도시처럼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작고 소박한 것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작은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이 아주 만족스럽다. 장르별로 갖춰져 있는 책은 아이들에게 좋은 계기를 만들어준다. 굳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도서관에서 또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작은 삶을 서로서로 가꿔 나가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정기적으로 각종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역민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것도 아름답다.

아이들에게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자, 놀이공간이자, 삶을 배워나가는,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도서관을 갈 때마다 몇 권의 책을 빌려온다. 나는 주로 소설과 시, 그리고 역사에 대한 책을, 아내는 여행이나 혹은 생활에 관련된 도서를, 아이들은 동화나 문고판을 고른다.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도서카드를 가지고 있어 한꺼번에 열 권 이상을 빌릴 수가 있다.

이번 주에 내 손으로 들어온 책은 전경린의 <풀밭위의 식사>와 백석시선집, 그리고 권여선의 단편 소설집이었다.

<풀밭위의 식사>와 <엄마의 집>

전경린 소설을 모두 읽어 본 것은 아니지만 전경린의 소설 속에는 여성과 음악과 예술이 그려진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은 남성에 비교되는 대상이다. 여성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이 아니라 여성 그 자체의 삶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가장 단순한 이분법에서 여성에 중점을 두고 그들의 삶에 대한 그림 그리기가 전경린 소설의 주된 흐름이다.

전경린의 <풀밭위의 식사>를 먼저 읽어 나갔다. 몇 년 전 <엄마의 집>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몇 장을 읽지 않았는데 <풀밭위의 식사>는 <엄마의 집>의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특별한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여자 주인공들이 모두 예술(풀밭위의 식사에서는 유리공예, 엄마의 집에서는 미술)에 관계되는 묘사도 이어졌다.

상처는 고스란히 들추어 낼 때 아문다. 그런데 그 ‘들추어내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도대체 들추어낸다는 것이 어떤 것이란 말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의 삶과 고통, 그리고 상처...그 속에서 조금씩 꿈틀거리는 희망과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전경린은 풀어나가고 있었다.

소설은 이누경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이누경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 시작도 녹녹치 않다.

“이상하지, 분위기가 이런 식으로 우아해질 때면 내가 속물처럼 느껴져⋯”

우아한 분위기에 있을 때면 ‘속물처럼’ 느껴지는 이누경! 이 한 마디에 누경의 지금까지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누경이 도훈(여성지 기자)과 기현(도훈의 선배), 그리고 친구 상미와 와인바에서 와인을 마시면서 내뱉는 말이다. 그 자리에서 처음 보는 기현은 누경의 이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느낀다. 기현은 누경의 눈빛을 보면 더욱 누경의 묘한 매력(?) 속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남자들은 고독하고 우울하고, 뭔가 상처 있는 듯한 여자에 대한 미련이 있는 것일까.

누경이 ‘우아해질 때면 속물처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경의 열여섯 살에서부터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누경에게 열여섯 나이는 단순한 생물학적 나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열여섯에 자신의 삶 속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일이 한꺼번에 소용돌이 쳐 들어왔기 때문이다.

누경의 먼 친척 되는 서강주.

누경 엄마의 사촌언니가 서강주의 엄마였다. 서강주는 누경의 집에서 고등학교를 보내고 대학을 가고 유학을 다녀온 뒤 교수가 된다. 누경은 그런 서강 주를 사랑한다. 그러나 누경의 나이 열여섯, 서강주는 결혼하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 서강주의 결혼식에 누경은 직접 참석한다.

서강주가 신부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에 누경은 눈물을 흘리지만 아버지가 “너는 왜 우니?”라고 말한다. ‘왜 우는지’ 아버지에게 말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강주의 결혼식이 끝난 그 주 일요일. 열여섯 누경에게 서강주 결혼식 보다 더한 충격적 사건이 일어난다. 누경은 녹색 원피스를 입고 들판 끝까지 걸어간다.

“나는 이제 자라지 못할 거야. 이렇게 들판에 버려져 까맣게 잊힐 거야⋯세월이 흘러도 언제까지나 나는 열여섯 살 소녀로 늙을거야⋯”

서강주의 결혼으로 누경의 마음속에 있던 서강주는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 버렸다는 절망감과 열여섯 소녀의 감수성. 그러니 누경에게 열여섯은 더 이상 자라지 않을 것이고, 이대로 늙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들판에 누워있는 열여섯 누경에게 감당하지 못하는 비극이 찾아온다.

“나는 두 팔을 풀밭 위에 가지런히 펴고 그대로 눈을 감았어요. 내 눈 앞에 깨어진 유리병 주둥이를 쥔 손이 다가왔어요. 그리고 낯선 남자의 손이 원피스 자락을 들어 올렸어요. 두 팔을 꼼짝도 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갔어요.”

열여섯에 그녀의 모든 것이었던 한 남자는 떠나고, ‘이젠 더 자리지 못할 거야.’라며 들판을 배회하던 중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찾아온 것이다. 악몽이었으리라고 생각할 만큼...누경의 열여섯! 이 두 가지 사건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누경은 그런 자신의 삶을 끌어안은 채 대학을 나오고 회사에 취직한다. 8년 만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복학한다. 특별히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공허한 공부의 시간⋯대학원 공부와 함께 유리공예에 관심을 가진다.

그곳에서 서강주를 다시 만난다. 서강주는 누경이 다니는 대학의 교수였다. 그렇게 만난 둘은 산책을 나가게 되고, 산책에서 우연찮은 일로 누경은 서강주에게 기대게 된다. 누경의 한 쪽 신발 뒷굽이 부러지고 만 것. 그것이 그들의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서강주가 누경을 부축하면서 주차장까지 왔고 그들은 뜨거운 포옹으로, 서로를 탐닉하는 사랑으로, 그렇게 상처 입은 둘의 사랑이 시작된다. 서강주는 이미 결혼한 중년의 교수로, 누경은 고스란히 자신의 열여섯 상처를 안은 여자로, 그들의 사랑은 이미 비극을 향해 나아가는 예정된 길이었다.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이런 고통을 안고 있는 누경에게 기현의 접근은 접근 자체가 ‘불허되는’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경의 깊은 눈과 알 수 없는 분위기에 기현은 빠져들지만 누경은 철저하게 차단막을 친다. 누경의 상처는 어느 누가 만져줄 수 없는 그녀만의 상처였다.

<엄마의 집>은 ‘미스 엔’이라 불리는 엄마와 효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스 엔’은 미술을 전공한 뒤 지금은 캐릭터 디자인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엄마는 아버지와 이혼한 뒤 효은과 함께 살고 있다.

아버지는 대학시절 운동권이었고, 지금은 자신의 밥벌이도 변변히 해결 못하는 무능력자로 그려진다. 그런 ‘미스 엔’과 효은의 공간에 이혼한 아버지가 알지 못하는 아이, 승지를 맡겨 놓고 사라져 버린다.

‘미스 엔’은 효은과 함께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 나서고 옛날의 아버지 친구며, 당시의 일들을 떠 올린다.

<엄마의 집>에 나오는 구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대목 하나.

“지금 세상이 군사독재보다 더 무서운 독재래요. 온 국민이 돈에 억눌려 옴짝달싹 못 하는 세상 아니에요. 젊은이들로부터 노인들까지 경제에 얽매여 딴 궁리할 틈이 없어요.”

이런 세상이나 양어장의 물고기 눈을 보면 너무 슬퍼 ‘양어장을 경영할 수 없다.’고 말하는 아버지는 얼마나 무능력한 사람으로 비칠까. 학생 시절 민주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돈의 독재’ 시대에 또 얼마나 쓸모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혔을까.

전경린은 “고통이 머물러 있는 곳이 내 글쓰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라고 작가의 말을 통해 말했다. 고통을 안고 있는 누경에게 역설적인 평온함을 주는 ‘풀밭위의 식사’를 제공해 주고 싶었노라고.

누경과 같은 고통을 간직하고 있는 여성들이 ‘식사’를 끝낸 뒤 풀밭 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며 ‘양떼구름’을 좇았다 어느새 흩어지는 평온함과 공허함을 느낄 수 있을까. 고통의 뿌리를 내려놓고 ‘풀밭위에서’ ‘식사’를 할 수 있을까.

전경린이 <풀밭위의 식사>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이 간직하고 있는 고통이 아니라, 당신도 ‘풀밭위의 식사’를 할 수 있고, 할 수 있으며,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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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