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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2.10 삼성이 만든 '백혈병 망각의 늪'에 빠진 언론 (2)

2010년 3월31일 당시.

언론사들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故 박지연 씨가 사망하자 ‘삼성전자 백혈병 소녀 숨지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경제지와 종합 일간지에서 이 기사가 삭제되기 시작했다. 기사가 잘못됐거나 오보가 아니었는데도 하나, 둘씩 기사는 사라졌고 마침내 남아있던 기사는 몇몇 매체에 불과했다.

지금도 포털을 통해 검색 기간을 ‘2010년3월31일~2010년4월02일’로 설정해 ‘박지연’으로 검색하면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종합일간지에서는 한겨레가, 시사주간지에서는 시사인, 인터넷매체에서는 아이뉴스24, 오마이뉴스, 민중의 소리, 레디앙, 참세상 등에서 관련 기사를 보도했다. 

국내 유명(?) 경제일간지인 매일경제, 한국경제 등에도, 국내 영향력이 막강한(?) 종합일간지인 조선, 동아, 중앙일보에서는 해당 기사는 한 줄도 확인할 수 없다. 물론 각 매체마다 기사의 중요성과 지면에 싣는 가치기준이 있겠지만, 당시 박지연 씨의 죽음은 상당한 파급력이 있는 기사 비중이었고 사건사고 가치 기준에서도 의미 있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기사였다.

당시 나는 아이뉴스24 경제시사부장을 맡고 있었다. 소식을 접하자마자 두 개의 기사를 먼저 내보냈다. [백혈병 삼성반도체 ‘소녀’ 끝내 숨져…지금까지 8명]이라는 스트레이트 기사와 [홍희덕 “백혈병 소녀사망, 삼성은 문상도 안오나”]라는 장례식장 모습의 기사였다.

이어 나는 칼럼을 썼다. [한 소녀의 죽음과 이건희]였다. 아래는 당시 내가 쓴 2010년 3월31일자의 칼럼 전문.

3월24일.

‘삼성공화국’의 총수, 이건희 씨가 돌아왔다. 그룹 대표회사인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했다. 이 회장은 징역 3년·집행유예 5년·벌금 1천100억원을 선고받았던 인물이다. 복귀하면서 이건희 회장은 이런 말을 한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이 무너진다. 삼성이 어찌 될지 모른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일주일 뒤인 3월 마지막날.

한 소녀(故 박지연)가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 쉬었다. 23세의 꽃다운 나이를 뒤로 하고 세상을 떠났다.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삼성에 근무했던 소녀였다. 소녀는 활기넘치고 꿈많던 열아홉 고3 때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들어갔다. 3년 뒤 백혈병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해 왔다. 소녀는 온양공장에 입사해 ‘1일 2교대’ ‘1일 3교대’로 일을 했다. 한달에 100만~130여만원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지 2년7개월 만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 이라는 희귀병을 얻었다. 대전성모병원을 거쳐 도착한 여의도성모병원 의사가 소녀에게 제일 처음 물었던 말은 “화학약품 만지다 왔느냐”였다고 한다. 박지연 씨의 사망으로 ‘또 하나의 가족’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직원은 8명으로 늘어났다.

故 황유미, 故 이숙영, 故 황민웅 씨 등…

삼성전자는 지금까지 이들 직원들에 대해 단 한명도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공장 근무로 인해 생긴 병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8명의 죽음 앞에 산업재해를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면 삼성은 ‘돈을 목적으로 억지를 부린다’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4월1일.

소녀의 죽음 앞에 ‘이런 기사’로 위로해 본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복귀한 뒤 첫 공식활동으로 故 박지연 씨의 장례식장을 찾았다. 박 씨는 삼성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 판정을 받고 투병 중 지난달 31일 숨졌다. 이 회장은 박 씨를 조문한 뒤 유족을 위로했다. 이 회장은 박 씨의 가족에게 산업재해뿐만 아니라 앞으로 삼성반도체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의 건강검진을 강화하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이 회장이 일반 직원의 빈소를 찾은 것은 처음있는 일이다.”

故 박지연 씨의 추모 페이지에 “하늘나라에서는 삼성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길 바란다”는 글이 보인다. 삼성이 있는 현실을 버리고, 삼성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이 현실…삼성은 지금 위기이며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또 하나의 가족’이었던 한 소녀의 죽음앞에 책임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앞으로 ‘삼성이 어찌 될 지’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삼성 쪽으로 우리 회사 영업국과 편집국장에게 전화가 왔다. 기사를 삭제해 달라는 요구였다. 다행히 스트레이트와 장례식 현장 기사는 팩트에 의한 것으로 삭제되지 않았고 내가 쓴 칼럼도 삭제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도 포털 검색을 하면 당시 우리 매체의 기사는 남아 있다. 기사가 세상을 바꾼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박지연 씨의 죽음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삼성과 박지연의 관계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등에 대해 매체라면 접근하는 것이 당시의 판단 기준이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내 언론사들은 당시 그런 기본적 개념조차 스스로 버리고 말았다.

물론 이후 다른 매체들도 관심이 줄어들었고 또 다시 ‘삼성이 던지는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었지만. 기사는 시대를 반영하고, 당시의 있는 그대로를 알려주는 역할도 있다. 그것조차 하지 못한다면, 혹은 스스로 다른 배경으로 포기한다면 이제 이 시대, 언론의 역할은 사라진 셈이다. 삼성이 만든 ‘백혈병 망각의 늪’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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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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