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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11 해바라기와 산딸기, 그리고 아이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는 농사꾼이었다. 아침이 빨랐다. 늘 새벽에 일어났다. 해가 뜨기 전에 사랑방에서 일어나 조용히 지게를 짊어지고 말없이 으스름 새벽길을 밟으며 들로 나갔다. 해가 뜰 때쯤 지게 위엔 무엇인가 가득 담긴 채 돌아왔다. 꼴(소가 먹는 풀)이든, 나무든, 깔비(솔가리)든 한가득.

해가 뜰 때쯤 집으로 다시 돌아온 아버지는 아침을 먹기 전에 쇠죽을 끓였다. 잘 익은 쇠죽이 여물통에 놓이고 소가 맛있게 먹을 때쯤 아침상이 차려졌다.

그날은 아마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었을 것이다. 주말이라 집에 내려와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인근 도시로 전학을 가 주말이면 집에 내려왔다. 나는 아침이 늦었다. 문지방에 해가 스며들고 어머니가 '아침 묵자.'라는 소리가 들릴 때 이불에서 기어 나왔다. 언제나 특별 대우였다.

그날, 아버지는 늘 일찍 일어나 지게를 지고 들로 나갔고 가득 채우고 돌아왔다. 그리곤 이제 막 눈을 뜨고 밥상 앞에 앉은 나에게 너무나 선명한 붉은 열매를 내놓았다. 이슬이 똑딱똑딱 밥상위에 싱그럽게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밥상위에 너무나 선명한 동심원을 만들었다. 진한 선홍색의 큼지막한 산딸기가 밥상 위에 가득했다.


소가 먹을 꼴(풀)을 뜯으러 갔던 아버지는 잘 익은 산딸기를 다칠세라 아주 조심조심 꺾어 온 것이었다. 멀리 유학을 하고 있던 나는 주말을 이용해 잠시 내려와 있었다. 나에게 말없이 그것을 내밀었다. 아직도 그 선명한 붉은 색과 밥상 위의 싱그러운 냄새를 느낄 수 있다.

그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나는 시골의 정취와 시골의 여유와 시골의 새벽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 시골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가능한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싶고 아이들 스스로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자연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자에게 축복을 주기 때문이다.

여름을 지나 가을 문턱에 계절이 서 있던 2010년 8월말쯤이다. 아버지가 된 나는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탔다. 물론 아내도 함께였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작은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고 그 곁으로 뚝방길이 구불구불 뻗어 있다. 자전거 타기에 더없이 좋은 길이다.

길 양 옆으로 노란 해바라기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크고 작은 동그란 꽃들이 아직 여물지 않은 씨를 키우느라 햇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노란 해바라기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아이들의 바람소리에 후들후들 다리는 떨고 아직 완전히 익지 않은 자신의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신나게 자전거를 탔다. 잠시 해바라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에게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경험이다. 미술을 전공한 아내가 그 사진을 그림으로 옮겼다.

엄마가 직접 그린 '해바라기와 우리 아이들, 그리고 자전거길'을 보면서 아이들은 나중에 어떤 생각을 할까. 나이를 먹고 아이들의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내가 그때 그렇게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스스로 느끼는 경험과 기억은 영원히 한 귀퉁이에 저장돼 있다.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첫째인 딸과 둘째인 아들.

아침 이슬을 잔뜩 머금은 산딸기를 말없이 내 밥상 위에 놓아 주었던 내 아버지…이제 나이를 먹어 내 아이들이 달리고 있는 해바라기 자전거 길…….

산딸기를 따주셨던 나의 아버지는 여든하나의 연세로 몇 년 전 돌아가셨다.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기억속에는 '아버지의 산딸기'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아버지는 없지만 예전 그 경험으로 산딸기를 보면 늘 아버지를 떠올린다.

나의 아이들은 '해바라기 자전거길'을 기억하면서 내 모습과 아내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아마 내가 찍은 사진보다는 아내가 그린 그림이 아이들에게 더 좋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

해바라기와 산딸기

가을이 오고 있는 소리는
시간만이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가을이 오는 소리는
바람에도
네 꼭 잡은 손의 땀에서도
달려가는 자전거의 바퀴 속에서도
가을이 오는 소리는 들린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소리는
눈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리워하는 소리는
기억에서도
내 외로운 마음속에서도
점점 먹어가는 나이테 속에서도
그리워하는 소리는 들린다.


이슬 머금은 붉은 산딸기는
내 아버지 선물
해바라기가 가득한 자전거 길은
너희들 선물


아버지의 아버지가
아버지와 아이들이
그리워하는 소리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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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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