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처음 들자마자 ‘아!’하는 탄성이자, 안타까움이자, 부끄러움이자, 부러움이자, 연민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정인의 <장미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옭죄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죄에 대한 그의 탐구는 끝없이 펼쳐졌고 그 여정을 따라가기에는 내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집을 읽었다 덮었다, 몇 번인가를 반복했다. 시는 머리와 가슴으로 쏙쏙 파고들지 못했고 계속 그 겉에서 맴돌았다. <장미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가슴으로, 혹은 머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몇 번인가를 더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한마디로 어렵다.

고독의 하느님 곁으로 간 할머니의 삶

그중 내가 이해할 만한 몇 개의 시를 먼저 인용해 보는 것이 좋겠다. 먼저 <문신>이란 시를 보자.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였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

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
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

독거, 아니었다

식탁은 제 몸에 새겨진 문신을
늘 고마워했다

식탁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문신> 전문)

<문신>은 한 할머니의 일상을 담았다. 혼자 살고 있는 독거노인이다. 할머니 곁에는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가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혼자 산 것은 아닐 터인데 할머니의 가족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할머니는 지금 혼자라는 것이 중요하다.

할머니는 고양이와 오랬동안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5년 전에 고양이는 그만 하느님 곁으로 가버렸다. 그녀의 유일했던 살아 움직이는, 꼬물 꼬물 꼬리를 흔들고, “야옹! 야옹!” 소리를 지르며 할머니를 ‘인간이게 한’ 고양이가 죽은 것이다.

고양이가 떠난 뒤 5년 동안 할머니는 혼자서 살았다. 그러나 할머니에게는 고양이의 흔적이 남았다. 고양이는 본능적으로 식탁에 발톱으로 긁은 상처를 남겨 놓았다. 그 긁힌 상처는 할머니에게는 ‘글’이었다. 물론 알아보지 못하는 ‘비문’이었지만 그것조차 할머니에게는 위로받을 수 있는 소중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5년 동안 식탁의 ‘비문’을 최고의 찬사이자, 할머니를 위해 남겨놓은 위로라 생각하고 쓰다듬었다. 5년 동안 할머니는 그 ‘비문’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고독과 함께 생활했다. 그 바람에 무생물이었던 식탁도 생명의 기운을 얻는다.

식탁은 할머니가 그 비문을 쓰다듬을 때마다 늘 고마워한다. 그렇게 할머니는 5년 뒤 역시 고독의 하느님 곁으로 떠난다. 아마도 그 하느님 곁에는 먼저 떠났던 고양이도 만났으리라. 고양이와 할머니가 모두 떠나 버린 그곳에서 식탁은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조정인의 <장미의 내용>은 인간의 원죄에 대한 탐구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사과(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인간은 태어남과 죽음을 맞이하는 고통의 순간으로 떨어진다. 남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뼈빠지게 일해야 하는 고통을, 여자는 생명을 잉태하는 고통을 부여받는다.

<문신>에도 인간의 원죄가 녹아들어 있다. 노년에 혼자가 된 할머니, 고독에 휩싸여 있는 할머니, 누구하나 할머니 곁에 살아있는 생명이라고는 없고, 남겨놓은 흔적만 가득한 텅 빈 집. 그렇게 인간은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 원죄를 용서받기 위해 ‘고독의 하느님’ 곁으로 떠나는 것이다.

따뜻한 묘지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

가볍고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묘지 안으로 들어가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도 조정인은 주목한다. 인간만큼 무자비하고, 인간만큼 혹독하고, 인간만큼 악랄한 생명체도 없다. 지금 인터넷 앞에 있다면 화면을 열고 뉴스 사이트에 접속해 보자. ‘죽이고, 동물을 학대하고, 때리고, 부시고, 멱살잡이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간의 잔인함을 직접 볼 수 있으리라.

<장미의 내용>을 보자.

12월의 장미를 뒤돌아보다가, 그 싸늘한 불꽃에 곁불이
라도
쬘까 하다가

제 무덤을 지키는 적막한 묘지기를 본다 저 얼굴은 죽음
의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므로 겹겹 봉인된 그의 안채는 얼마나
따뜻하겠니

죽음의 내용들이 발끝을 들고 장미를 건너간다 일테면,
골목에서 사라진
영아(嬰兒)와 참새와 비둘기와 새끼고양이와 늙은 개⋯⋯
가볍고 아름다운 그것들은 홀연히 몸을 띄워 대기권 바깥
제 투명한 묘지를 찾아들었다 좀 있으면 흙의 일이 궁금
해진
첫눈이 오고 아이들은 눈이다! 외칠 테지
사슴이다, 하는 것처럼

그런데 나는 왜 심장이 사라지나 흰 늑대가 되어 눈보라
처럼 하늘 복판을 펄럭이나
심장을 쏟았으니 가슴이 다 패어 허공이 된 늑대, 바람이
된 울음을
암청색 밤하늘에 풀어놓나

                       와우우, 운석의 꼬리같은

                         창자처럼 긴 울음을

돌연 천공을 찢고 내려와, 폭설에 푹푹 발이 빠지며 내 하
얀 늑대가 다가오던
기척, 귓가에 붐비던 숨, 더운 혀에 관한 기억들이여 안녕
시절이여 안녕(<장미의 내용> 전문, 원문형태 그대로 인용)

이 시에서는 인간의 원죄에 대한 언급이 직접으로 나온다. 장미의 붉은 기운을 ‘쬘까’하다가 나(시적 화자)는 묘지를 본다. 생명의 기운을 느끼려다가 죽음을 보는 셈이다. 인간의 삶 자체가 생명의 기운과 죽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니, 이는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죽음의 공간조차 나는 ‘얼마나 따뜻하겠니’라며 묘지의 따뜻함을 느낀다.

그러면서 죽어간 이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전한다.

영아와 참새와......생명체들이 죽어 투명한 묘지공간으로 건너갔고 이제 내가 생각해야 할 일은 흙의 일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무 뜻 없이 ‘눈이다!’라고 외치지만 나는 눈보라를 본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눈보라, 인간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고통이자 원죄이다. 그런데 그 원죄속에서 나는 심장이 없는 흰 늑대가 되어 있다. 흰 눈보라 속에서 흰 늑대, 그 존재는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 절망의 순간에서 심장까지 없으니 나는 이제 허공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생명의 순간 느꼈던 모든 감정을 내려 놓는다.

기척-누군가 죽어가는 순간을 지켜보는 이들의 기척.

귓가에 붐비던 숨-죽어가는 이의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갖다대는 마지막 의식.

더운 혀-마지막 임종을 하며 살아있는 자들에게 남기는 더운 혀.

이런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나는 “시절이여 안녕”이라고 말한다.

<장미의 내용>은 붉은, 하얀-더운, 차가운-생명, 죽음-의 대비효과를 뚜렷이 보여준다. <장미의 내용>은 이번 시집에서 대표적인 시라고 할 수 있겠다. 조정인의 <장미의 내용>은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원죄에 대한 깊은 내면적 무질서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다. 그러니 <장미의 내용>을 이해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원죄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모르는 불가사의한 것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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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