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리본의 시절
우리는 어디에 있었던가
분홍색 꿈을 꾸며
봄이 찾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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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중학생 딸아이가 저녁 식탁에 앉아 학교 이야기를 시작했다. 딸아이가 다니는 중학교는 단출하다. 전교생이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학년 당 1개의 반이 있고 딸아이의 반은 30명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아이들이 그대로 중학교 1학년이 된 것이다. 2명 정도가 전학을 와 새롭게 합류했을 뿐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지만 변화 없는 생활에 지쳐가는 듯 했다.

특히 먹는 것, 급식에 대해 심각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중학생 인원이 많지 않다보니 초등학교 급식을 같이 먹는데, 영 맛이 없고 그저 그런 급식에 불과하다는 불평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 식탁에는 오이와 당근, 양배추, 사과, 콩나물을 비벼 섞은 쫄면과 알맞게 익은 콩나물을 밥에 얹어 달래간장을 살짝 얹은 콩나물 비빔밥이었다.

딸아이는 맛있게 먹었다. 딸아이는 “초등학교 때 먹는 것과 똑같은데 급식이 너무 맛없어!”라며 준비한 쫄면과 콩나물 비빔밥을 넉넉하게 먹었다. 엄마를 보더니 “엄마! 나 도시락 싸 가면 안 돼?”라고 묻는다. 아내는 난감한 표정.

아이의 얼굴에는 욕구불만이 가득 찼다. 중학생 생활이란 게 공부 밖에 더 할 게 없는데 점심시간의 먹거리조차 ‘맛없는 것’에 불과하니 아이에겐 학교생활의 즐거움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느 하나 즐겁지 않는데 “먹는 거라도 맛있게 먹게 해달란 말이야!”라고 아이는 외치고 있었다.

욕구불만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권여선의 <분홍리본의 시절>은 욕구 불만에 대한 단편들을 모았다. 하기야 어느 소설이건 등장인물들이 욕구 불만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권여선의 소설 속 인물들은 그 욕구 불만이 ‘먹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가을이 오면>에는 그렇고 그런 K전문대 아동학과에 다니는 ‘나’가 등장한다. 나는 궁색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왕복 버스 차비를 아껴 점심을 먹어야 하고, 끔찍하게 덥지만 옥탑 방에서 살고 있다. ‘담배를 피운다는(‘담배 피는 애들은 글 좀 쓰잖아.’라는 교수의 말이 웃겼다)’ 이유 하나만으로 출판사 아르바이트를 제안 받지만 손톱만 한 돈만 수중에 들어온다.

뜨거운 여름날, 재래시장을 한 바퀴 도는 버릇이 있는 ‘나’는 ‘뜨거움과 조잡함이 우윳빛으로 뒤엉킨, 이를 테면 순댓국 같은 풍경’의 뜨거운 한낮 재래시장 시멘트 바닥에 기절하고 만다. 그때 한 남자가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남자는 ‘나’를 병원에 데려다 주고 친절을 아끼지 않고 사라졌고, 그와 함께 그날 조교로부터 받은 아르바이트 돈이 든 지갑도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병원에서 돌아온 ‘나’는 아등바등 어긋난 박자를 탓하고 있다. 그때 초인종이 울리고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난다. 남자는 지갑을 그녀에게 건넨다. 그러나 지갑은 비어있다. 남자는 지갑을 시장 통에서 주웠고 안에 있는 카드(학생증 겸용 카드이니 사진이 있었다)를 보고 그녀를 수소문해 찾아 왔다고 했다. 지갑 안에 돈은 없었다면서.

그렇게 무단침입 비슷하게 들어온 남자는 배가 고프다 하고 ‘나’의 궁색한 옥탑 방에는 아무 것도 있는 게 없다. 남자는 밖으로 나가 햇반과 김치를 사온다. 그리고 김치볶음밥을 만들기 시작한다.

한 여름의 ‘순댓국 같은’ 날에 ‘김치볶음밥’ 같은 남자의 출현⋯‘나’는 남자가 만들어 준 음식을 맛나게 먹는다. ‘나’와 남자의 공통점은 이것뿐만 아니었다. 김치볶음밥으로 시작된 만남은 둘 모두 햇배추로 끓인 된장국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분홍리본의 시절>은 분홍리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단편에는 화려한 먹거리가 등장한다. ‘나’는 서울을 떠나 소도시의 오피스텔에 도피하다시피 생활을 하고 있고 그곳에서 옛날의 애인이자 동지이자, 사랑했던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이미 결혼했고 남자의 아내는 교수이다.

남자는 ‘나’를 집으로 자주 초대했고 그때마다 남자와 그의 아내와 ‘나’는 갖은 안주를 만들어 술을 마신다. 남자의 아내는 생선 요리를 아주 잘했다. 그녀의 손을 통하면 비릿한 생선이 어느새 맛나는 것으로 변해 있다.

육류를 좋아하는 ‘나’도 생선으로 관심이 옮겨지고 60마리 조기를 사서 매일매일 조기를 구워 먹는다. 한 달 내내 먹은 생선 비린내가 오피스텔 곳곳에 박혀 있다. 그러던 중 남자의 후배(여자이다)가 찾아오고 이제는 남자와 그의 여자후배와 ‘나’가 같이 술을 마신다. 과음을 한 남자의 여자후배는 ‘나’의 오피스텔에서 자고 간다.

그리고 다음날 남자의 여자후배는 “30만원만 빌려 달라.”고 하고 그 돈으로 산부인과 수술대에 오른다.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

남자가 들려주는 한 가지 이야기가 이 소설에서는 압권이다.

“내 불만은 말이지, 콘돔이 왜 과일 맛이나 바닐라 맛 따위만 있냐는 거야. 우리가 애들이야? 갓 구운 마늘빵 맛이라든가 조개 넣고 끓인 시원한 된장 국 맛이라든가 새우튀김이나 게찜 맛 전복죽 맛, 이런 콘돔 진짜 죽이지 않겠어?”

하기야 남자에게는 ‘나’와 ‘후배여자’와 ‘아내’가 있었으니 어떤 맛이었을 지 궁금하기도 하겠다. 그리고 그 맛이 이젠 지겨워지기도 하니, 다른 맛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남자의 후배여자는 수술을 끝내고 사라지고, 남자의 아내가 ‘내’ 오피스텔을 찾아온다.

남자의 아내와 커피를 마시고 일어서는데 남자의 아내가 똑 떨어지는 반말을 한다.

“내가 그렇게 만만했니, 니들?”

졸지에 ‘니들’이 돼 버린 ‘나’와 ‘후배여자’는 무슨 변명인가를 하려 했지만 목구멍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조여들면서 혀뿌리가 갈라지는 듯한 통증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하반신 마비가 된 교수의 주변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약콩이 끓는 동안>, 한 남자가 성묘를 갔다가 근처 휴양원에 직원으로 채용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솔 숲 사이로>, 사형당한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는 한 여자와 문학 강사의 이야기를 담은 <문상> 등등 권여선의 <분홍리본의 시절>은 욕구불만에 가득 찬 현대인의 모습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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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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