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한 소설이다.

이순원의 <첫눈>은 재밌다, 아득하다, 로맨스가 있다. 있을 건 다 있다, 소설의 모든 것을 담았다.

<첫눈>의 주제는 고래다. 바다를 터전 삼아 유유히 물을 뿜으며 살아가는 고래가 주제이다. 큰 고래일 수도, 돌고래일 수도, 돌고래보다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는 고래일 수도, 아무튼 <첫눈>에는 주구장창 고래 이야기만 나온다.

그렇게 고래로 시작해 고래로 이야기를 끝맺으면서도 정작 소설 속에 살아있는 고래는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 속 시점에서는. 뭔 과거에 자신이 먹었던 고래, 신혼여행 때 마라도에서 봤던 고래, <백경> <그랑블루> <프리윌리> 등 영화에서 본 고래만 나온다. 살아있는 고래는 한 마리도 등장하지 않는다.

고래는 도대체 왜?

그런데 이게 또 <첫눈>의 맛이다. 프리랜서 PD로 일하고 있는 ‘그’가 있다. 성은 최 씨이다. 울산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두 사람이 소설 속 주요 인물을 이루고 있는데, 정치・경제를 가르치는 ‘윤’ 선생과 음악을 담당하는 ‘김, 현, 아’라는 여선생이 등장한다.

최 씨는 서울 문화재단의 정기 행사의 하나로 매년 열리는 문화초청 강연의 강사로 울산을 방문한다. 수능을 끝낸 고3을 대상으로 하는 1시간짜리 강연. 그날 행사를 마치고 곧바로 서울로 돌아오려 했지만 ‘윤’ 선생이 뜻밖의 제안을 하면서 하루를 머물게 된다. ‘윤’ 선생의 제안은?

“오늘 바쁘시지 않으면 고래를 한번 보고 가시죠. 지금 바다에 들어와 있거든요.”

‘윤’ 선생은 7m 짜리 밍크고래 한 마리가 그물이 걸려 죽은 채로 방어진 바닷가로 떠밀려 왔다는 것. 오늘까지 바닷가에 전시한다는 것. 자신이 울산에 몇 년 째 살아봤지만 흔하지 않은 기회라는 것. 그래서 최 씨에게 제안한다. 물론 더 정확한 이유는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렇게 둘은 고래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중간에 ‘윤’ 선생이 최 씨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한다. 카페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자 ‘윤’ 선생이 한 여자와 함께 나타났다. ‘윤’ 선생은 학교 음악선생이라고 그녀를 최 씨에게 소개한다.

그렇게 셋은 택시를 타고 방어진으로 향한다. 택시 조수석에는 ‘윤’ 선생이 앉고 뒷자리에는 최 씨와 여선생이 앉았다. 택시가 출발하자마자 여 선생이 최 씨에게 말을 건넨다.

“첫눈에 멀리서 오신 분 표가 나는데요?”

날씨가 싸늘해 서울에서 머플러를 하고 온 최 씨를 두고 여선생은 “여기서는 아직 머플러를 한 하거든요.”라며 첫눈에 멀리서 오신 분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다.

First Sight!

여 선생에게 최 씨의 첫 인상은 ‘멀리서 오신 분’이다. 반면 최 씨에게 여선생의 첫 인상은 ‘인중에 어떤 그늘 같은 것이 언뜻 비쳤다가 사라졌다’로 소설에는 표현돼 있다.

그렇게 세 명은 방어진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곳에 거꾸로 매달려 있어야 할 밍크고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윤’ 선생은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본다. 해체됐다는 것.

오늘 아침까지 전시했다가 더 이상 두면 상할 것 같아 고래를 잘기잘기 먹기 좋게 해체해 지금 한 부분은 부산으로 이미 출발했다는 것. 이렇게 되면 세 사람의 목적은 뜬금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고래를 보기 위해 어렵게 시간을 맞춘 그들의 목적이 사라져 버렸다.

고래가 사라진 곳에 그들의 인생이 물을 뿜는다

고래가 사라져 버렸으니 그들은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뻔 하지 않겠는가. 근처 음식점에 들어가 회와 소주라도 마시는 수밖에. 고래를 해체했다는 사내는 “이 근처 식당에도 해체된 고래 고기가 뿌려졌다”고 말한다. 그 말도 그들이 음식점으로 향하게 하는 한 배경이 된다.

소주잔과 고래 고기, 모듬회 안주가 나오고 그들은 잔을 부딪치며 술을 마신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그런데 이런저런 흘려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중심된 주제는 ‘고래’로 통일됐다는 것. 고래를 보러 왔다가 정작 고래는 보지 못한 이들 세 명이 해체된 고래 고기를 앞에 두고 이제 ‘고래 이야기’를 시작한다.

PD인 최 씨는 자신의 고향이 강릉이며 어릴 적 작은할아버지가 부산에서부터 가마니에 백 근이나 되는 고래 고기를 가지고 와 한 겨울 내내 눈 속에 파묻어 놓고 먹었던 기억을 꺼내놓고, ‘윤’ 선생은 자신의 잘못으로 고래를 보지 못했다는 듯 최 씨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다.

압권은 여선생인 ‘김, 현, 아’의 고래 이야기이다.

여 선생은 마라도로 가는 배 위에서 고래를 보았다는 것, 본 것뿐만 아니라 거리가 너무 가까워 고래의 눈까지 볼 수 있었다는 것. 여 선생의 말을 그대로 옮겨 보자.

“유월이었어요. 초여름, 지금도 저는 고래 하면 그때 배에서 본 고래 모습부터 생각나요. 물 위로 솟아오를 때 고래의 새까만 눈까지 도요. 오늘도 그래서 윤 선생님을 따라온 거예요.”

그런데 여 선생의 말을 듣고 있던 최 씨는 마치 당시 그 현장에 자신도 같이 있었던 기분이 계속 든다. 술기운 탓이었을까. 아니면 음악을 전공한 여 선생이 바로 앞에서 미성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최 씨는 이렇게 맞장구친다.

“김 선생, 그때 그 고래 나하고 같이 가다가 본 것 맞지요?"

김현아 선생은 섬뜩 놀란다.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농담 삼아 던진 최 씨의 말이 여 선생을 당황하게 만든 셈이다. 왜 일까. 충분히 술자리에서의 농담으로 받아넘길 수 있었을 터인데 왜 여 선생은 깜짝 놀란 것일까.

First Sight가 First Snow가 되는 순간

김현아 선생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유월초 배위에서 고래를 보고 있을 때 그녀 곁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김현아 선생이 대학생 때 만난 미대 조교생으로 둘은 당시 결혼해 신혼여행중이었다. 마라도로 가는 배 위에서 둘은 고래를 보았고, 그때 남편은 김 선생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너, 이거 나하고 같이 가다가 본 거야. 여기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가다가 본 게 아니라 나하고 둘만 같이 가다가 본 거라고.”

고래를 봤던 그때 남편과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들만의 고래’로 정확히 가슴 속에 쟁여 놓았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뜬금없이 최 씨가 “그때 그 고래 나하고 같이 가다가 본 것 맞지요?”라고 말했으니 김현아 선생이 놀라고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

술자리는 김현아 선생이 먼저 일어나고, 최 씨와 ‘윤’ 선생 둘만 남아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서 ‘윤’ 선생이 최 씨를 끌고 방어진으로 온 이유가 나온다. 자신은 학생 시절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는 것, 그러니 지금 PD로 일하고 있는 최 씨와 무작정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는 것.

그렇게 방어진의 밤이 흘러가고 술자리는 아홉시 무렵에 끝이 난다. 최 씨는 ‘윤’ 선생과 헤어지고 호텔에 숙박한다. 그때 한 통의 전화가 최 씨에게 걸려온다. 여선생이 전화를 건 것. 여선생은 당돌하게.

“제가 그쪽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낯선 곳에서의 고래 이야기와 낯선 시간대에 여선생이 걸어온 전화.

다시 만난 최 씨와 여선생은 호텔 바에서 진 토닉을 마시며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러면서 여선생은 최 씨에게 남편과의 경험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에서 (남편은) 자기하고 둘 만 같이 가다가 본 고래라고 여러 번 말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그래, 그건 우리 고래야. 우리 둘만의 고래니까 다른 사람이 나하고 같이 가다가 봤다고 말하지 않게 잘 지켜, 하고요.”

그러면서 다음 말을 잇는다.

“정말 같이 가다가 본 것처럼 (최 선생님에게) 나눠드리고 싶어요. 그 말씀을 드리고 싶어 다시 온 거예요.”

그러니까 남편과 같이 본 고래를 이제 최 씨와 같이 본 고래로 나눠드리고 싶다는 것. 그렇다면 남편과의 약속은? 소설은 이제 김현아 선생의 남편에 대해 짧게 언급한다.

남편은 결혼한 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는 것. 그리고 유학 간 지 이태 만에 죽어서 발견됐다는 것. 그것도 파리가 아니라 프랑스 남부인 리옹에서. 여기서 그치면 소설은 밋밋해 지는 것. 남편이 숨진 차 안의 조수석에 한 여자가 타고 있었다는 것. 그 여자는 유학생이었다는 것.

이쯤 되면 김현아 선생이 왜 마라도 배위에서 본 고래를 최 씨에게 굳이 나눠드리고 싶다고 했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다시 최 씨가 숙박하고 있는 호텔에 까지 직접 찾아왔는지.

아이러니 한 것은 김현아 선생이 대학시절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리스트의 곡 <탄식>때문이었다는 것. 곡을 받고 자신의 곡으로 만들기 위해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쳐지지가 않더라는 것. 밤늦게 3층 연습실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고 있다 언뜻 창문을 봤는데 옆 건물 미대 건물의 한 곳에 불이 켜지더라는 것. 그곳에 남편이 있었다는 것.

삶은 인간관계의 축척이다. 그러나 첫눈이다

그렇다면 최 씨는 결혼하지 않았고 도대체 그에 대해서는 왜 아무 것도 없을까. 없지 않다. 있다. 최 씨의 아내는 미국에 아이와 같이 유학(?)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최 씨는 기러기 아빠라는 것. 아무 의미 없는 통화를 하면서 뉴욕에 있는 아내가 최 씨에게 이렇게 말한다.

“...첫눈이라는 게 그렇잖아. 그냥 봐선 온지도 안 온지도 잘 모르고, 그렇지만 사람 마음 들뜨게 하고, 길은 미끄럽고...”

최 씨에게 김현아 선생은 첫눈이었다.

윤 선생에게 김현아 선생은 첫눈이었다.

김현아 선생의 남편은 김현아 선생에게 첫눈이었다.

최 씨의 아내는 최 씨에게 첫눈이었다.

삶이라는 것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라 한다면 삶은 한 마디로 인간관계의 축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축척하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죽음의 순간으로 걸어간다. 이순원 소설가는 <첫눈>의 마지막을 최 씨의 말을 빌려 이렇게 장식한다.

“그래, 찍으면 발자국 자리도 안 나게 내렸는지 안 내렸는지도 모르게 왔다 가는 것, 혹은 그렇게 왔다 가는 사람, 그 모든 것이 첫눈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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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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