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대기업 중 신입연봉이 가장 높은 기업이 어디냐는 기사가 관심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대기업들의 ‘성과급 잔치’ 뉴스가 국민들의 눈과 귀를 붙들어 맨다. 그 성과급이라는 게 웬만한 자영업자들의 연간 소득과 맞먹는다. 이 모든 뉴스 속에는 ‘삶의 잣대가 이제 돈’이 돼 버렸다는 평범한 사실을 일깨워 준다.

아이들에게도 이런 문화는 그대로 교실에서 전해진다. “너네 아버지 뭐 하시니?”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너네 아버지 얼마 벌어?”라는 질문이 나오는 현실이다. 그곳에서 비롯되는 상대적 박탈감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돈’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고, ‘스펙’을 쌓기 위해 젊음을 내던지는 현실이다. 자신의 가슴 속에 뭉쳐 있는 꿈과 희망은 ‘돈과 스펙’ 앞에 설 자리가 부족하다. 아름다운 사회를 고민하고, 함께 사는 공동체를 그리기에는 지금의 현실은 너무 척박하고, 모질다.

서울시장이 된 박원순 작가의 <세상을 바꾸는 천 개의 직업>은 이런 모진 현실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아름다운 가게>와 <희망제작소> 등을 통해 직접 체험하고 깨닫고, 발굴한 그만의 직업관에 대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밥만 벌지 말고 희망을 벌어라”

척박하고 모진 현실을 생각한다면 ‘밥만 벌지 말라’는 소리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미 대한민국은 ‘1%를 위한 나라’가 돼 버렸고, 그것이 고착화되고 있다. 빈부 격차는 사회가 발전할수록 더욱 커져가고, 대물림되는 가난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 지경이다.

‘변호사의 아들이 변호사가 되고 노동자의 아들이 노동자가 되는’ 현실에서 “밥만 벌지 마!”라고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몇이나 될까.

그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희망을 벌어라”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밥만 벌지 말고 희망을 벌어라’는 박원순 작가의 말 속에는 따라서 세상을 쳐다보는 ‘다른 시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밥만 벌다’는 말 속에는 경쟁 사회에서 누군가를 짓밟고-의도됐든 그렇지 않든-일어설 수밖에 없다. ‘적자생존의 세계’를 말한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 스펙을 쌓고, 남보다 더 좋은 조건을 얻기 위해 자신을 투자하는 셈이다. 공동체나 함께 살고자 하는 시각은 여기에 설 자리가 없다.

‘희망을 벌다’는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 박원순 작가는 “사람이 좋아! 너와 내가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직업 BEST 10”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다. ‘너와 내가 살맛나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함께 이 사회를 가꾸고자 하는 마음이며 공동체를 지향하는 새로운 시각이다. ‘함께 공동체를 지향하는 시각’이 사실은 자연스러운 시각인데 척박하고 모진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세상을 바꿀 새로운 전문가의 시대

박원순 작가는 책을 통해 새로운 직업관을 선보이고 있다.

환경을 사랑하는 푸른 청춘이라면 ‘녹색 전문가’를 추천했다. 한국 사회는 ‘부수고 삽질하고 그곳에 건물을 세우는’ 개발 성장이었고 그것이 하나의 공식이 성립됐다. 그러나 그동안 부수고 삽질하는 사이 자연 환경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을 복원하기 위해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쯤은 상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을 보존하고 지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성장일 수 있다는 시각을 강조한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시대에 성큼 다가선 지금, 소통의 도구가 바뀌고 있다. 사람과 소통을 가장 우선시하는 사람이라면 ‘네트워크 전문가’를 꿈꾸라고 박원순 작가는 강조한다. 또 ‘일상이 예술이고 놀이가 된 유쾌한 당신이라면-문화예술 전문가’ ‘몸은 인생의 집, 몸 생각하는 당신이라면-건강 전문가’ 등을 추천했다.

박원순 작가는 특히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 누구도 가지 않겠다고 하는 ‘틈새시장’에 대한 도전을 강하게 요구한다. 농촌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그는 “흙처럼 농부처럼 순박하고 자연스러운 당신이라면 농촌‧농업 전문가가 되는 것도 좋다”고 주문했고 , 비영리ㆍ비정부기관의 정직한 힘을 믿는다면 NGO 전문가로 자신을 위치시켜 보는 것도 좋다”고 추천했다.

<세상을 바꾸는 천 개의 직업>은 지금까지 공식화된 직업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 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직업을 소개하고 있다. 가슴 벅찬 직업을 갖는 것은 ‘연봉이 세고, 연말이면 성과급 잔치’하는 그곳에 있지 않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로 인해 다른 사람이 웃을 수 있고, 그곳에서 촉매된 웃음이 사회를 변화시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가슴 벅찬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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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 사람을 만난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세상이 복잡하다. 서로의 생각이 소통되기에 한계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

이른바 '토크 콘서트'가 인기를 끌고 있다. 예전과 비교해 정보는 넘친다. 서로 교류하는 사례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소통에 어려움을 느낀다. 이 시대, 동시대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소통하고 있을까.

김제동의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다"

한국사에서 가장 극복하기 힘든 게 있다면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일 것이다. 이것은 책이나 이념으로 경험한 게 아니다. 직접 행동으로 체득했기에 한 쪽 편에 선 사람들은 다른 쪽 편을 이해하는 것을 강하게 거부한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에 이르기까지 장편 역사 소설을 쓴 조정래 선생의 말은 그래서 울림이 크다.

"내가 문학을 통해 가장 강력하게 하고 싶었던 말은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 그걸 인정하고 시작하자는 것이지요."

그랬다. 반공이 남한이념의 기조였을 때 이른바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뿔이 달렸고 엉덩이는 빨갛고, 사람의 형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조정래 선생은 자신의 역사 소설을 통해 딱 한 가지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용택 시인도 한반도의 이념 대립에 진저리를 쳤다.

김 시인은 인터뷰를 통해 "낡아빠진 틀을 가지고 싸움질 하고 이념이니, 좌우니 이러고 있는 모습이 넌더리가 난다."며 "아직도 획일화된 이분법적 가치판단을 요구하고 우리 편 아니면 완전히 말살하겠다는 것,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고 지적했다.

아마도 남한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던 날, 한반도의 많은 사람들이 '북한 사람도 사람이구나'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그런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반도에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고 있다. 6·25를 경험한 세대들에게는 아직도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갈등의 골이 깊은 것이 사실이다.

"용이 아니라 송사리 같은 존재도 필요하다"

프랑스 사회학자들이 교육을 통해 계층 간 이동이 가능할 것인지를 두고 연구를 한 적이 있다. 결론은 교육을 통해 계층 간 이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즉 변호사의 아들은 변호사가 되고, 노동자의 아들은 노동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개천에서 용나다'는 말은 전설이 돼 버렸다. 이런 사회를 두고 동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젠 서울시장이 됐지만 희망제작소를 운영해 왔던 박원순 변호사는 김제동과 인터뷰를 통해 "개천에서 용 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송사리로 남아 개천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라고 되묻는다.

용도 필요할 것이다. 어차피 민주주의에서는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을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용의 존재도 필요하다. 그러나 모두 용이 되려고 한다면? 세상은 뜻하지 않는 불협화음에 처하지 않을까.

아름다운재단과 희망제작소를 통해 박원순 변호사는 '공동체 시스템'을 강조했다. 송사리로 남아 곁에 있는 다른 송사리와 함께 자신의 지역에서, 혹은 소공동체를 통해 아름다운 자신의 터전을 가꾸는 일! 그것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과학자 정재승 교수도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관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정 교수는 "(과학은)세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것에 대해 기여하는 학문"이라며 "과학이 권력과 돈에 종속돼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질주하는 과학을 멈출 수는 없으니까 질주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뒤 "권력과 돈에 종속되지 않고 과학이 인간적 가치를 높이는 학문으로 발전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내가 있는 이곳이 아름답다"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는 정치인과 작가는 물론, 연예인과 일반인까지 그 인터뷰 대상이 넓다.

그 중 눈길을 끄는 인터뷰 대상자 중에 연예인 고현정과 제주 해녀 고미자, 그리고 산악인 엄홍길 씨 등이다.

고현정은 보이는 것과 달리 소탈하고 푼수기에, 직설적인 말투의 인물로 그려져 관심을 모았다.

고현정은 인터뷰를 통해 "연예인은 무대에 선 광대고 객석에 앉은 대중은 귀족이지. 우린 돈과 시간을 투자한 관객들을 어루만지고 즐거움을 줘서 보내야 하는 거야."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산악인 엄홍길은 최근 안나푸르나를 등반하다 사고를 당한 박영석 대장을 생각나게 한다. 엄 대장도 첫 등반에서 자신의 동료를 잃은 경험이 있다. 엄 대장은 "절벽을 한참 내려오는데 바위틈에 신발도 벗겨져 있고… 흔적은 많은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비참하고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엄 산악인은 "거대한 산 앞에 서고야 대자연 앞에 인간은 정말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제주해녀 고미자 씨의 인터뷰는 솔직담백하다. 수십 년 동안 '물질'을 해 온 그녀에게는 생활에서 느껴지는 진솔함이 묻어있다.

고미자 씨는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것과 관련해 "평생 일해 왔는데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일도 못할 테고 바다도 오염될 테고 저 바다 좀 봐요. 얼마나 예뻐요. 제발 어머니 같은 바다를 그대로 둘 순 없나요?"라고 말한다.

그녀가 가리키는 그곳에는 '어머니 같은' 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었다.

<김제동이 만나러 갑니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들을 통해 시대정신을 느끼게 해 준다.

장르: 시/에세이/기행
저자: 김제동
출판사: 위즈덤경향
가격: 9천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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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투명성의 시대>는 ‘위키리크스가 불러온 혁명’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21세기 정보와 뉴스가 어떻게 다뤄지고 그 정보가 일반 대중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책은 전 세계적으로 위력을 떨치고 있는 위키리크스에만 주목하지 않고 21세기 투명성 시대가 어떻게 정착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다.

현재 한국 트위터리안들에게 ‘위키리크스 한국 관련 외교문서’ 집단 번역 움직임이 일고 있다. 방대한 분량의 미국 외교문서 중에서 특히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작성한 한국의 정치인과 정치현실을 적시한 내용이 공개되면서 한국 네티즌이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 외교문서에는 남한과 북한의 관계,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등 굵직한 이슈는 물론 이명박‧노무현‧김대중‧김영삼 등 전직 대통령, 박근혜‧이상득‧김문수 등 현재 한국 정치권력을 움직이고 있는 이들에 대한 평가와 내용들이 기록돼 있다.

특히 이런 문서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고 권력층만 이용한다는 점에서 이번 공개는 비상한 관심의 대상들이다.

21세기 미디어는 투명성으로 간다

위키리크스가 불러온 가장 큰 혁명은 ‘투명성’에 있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제1장 ‘위키리크스의 역사적 순간’에서는 줄리언 어산지가 폭로한 내용과 그 의미를 짚어보고 있다. 이런 폭로와 숨겨진 진실의 공개를 통해 미디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한 마디로 21세기 언론의 움직임은 ‘투명성으로의 급격한 변화’에 있다고 지적한다. 기존 언론미디어는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진실보다는 ‘이익’에, 민중과 시민보다는 ‘권력’에 접근해 있음을 각종 자료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제2장에서는 위키리크스 미디어, 즉 ‘중요한 뉴스와 정보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헌신하는 비영리 미디어 조직’으로서의 의미를 짚어보면서 그 배경을 점검하고 있다. 네트워크 정치가 어떻게 구현되고 있고 이를 통한 디지털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분석을 토대로 ‘투명성 사회로의 본격적인 행보’를 짚어본다. ▲인터넷 무료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 ▲정치블로그 데일리코스(DailyKos) ▲미국 조세 저항운동, 티파티(Tea Party)운동의 구체적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시민 디지털 정치 미디어 참여 혁명’과 ‘세계 각국의 디지털 정치 참여도’ 그리고 ‘수동적 미디어에서 능동적 미디어로’ 변화하고 있는 미디어 환경을 진단했다.

비밀주의 종말과 열린 정부의 탄생

오는 10월26일에는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예정돼 있다. 현재 구도로 보면 기존 정치세력인 한나라당의 나경원 후보와 통합야권‧시민후보인 박원순 후보의 양자 구도로 좁혀지고 있다. 기존 정치인과 참여 정치인의 대결로 정리된다.

박원순 후보의 경우 선거자금을 ‘시민펀드’로 조성하는 등 선거 초반부터 ‘참여와 투명성’을 기치로 내걸었다. 비밀주의에 종말을 고하고 열린 정부의 탄생을 알린 것에 다름 아니다.

<투명성의 시대>에서도 제5장 ‘전 세계의 투명성운동’을 통해 이런 흐름을 짚어보고 있다. ▲좌파와 우파를 아우르는 크로아티아의 폴리티카(Pollitika) ▲케냐의 투명성운동 사이트 엠잘렌도(Mzalendo) ▲투명성 프로젝트에 힘을 불어넣은 우샤히디(Ushahidi)를 분석하면서 ‘전 세계로 확산하는 투명성 프로젝트’를 펼쳐 보인다.

<투명성의 시대>는 21세기 큰 흐름의 하나인 정보 혁명을 짚어봄으로써 앞으로 펼쳐질 미디어의 급격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부록으로 ‘위키리크스 한국 관련 비밀문서’를 담고 있어 국내 독자들의 관심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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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추석이다. 명절에는 가족이 모이는 날이다. 떨어져 있던 친족들이 모이고 자연스럽게 이야기꽃이 핀다. 이번 추석에는 어떤 이야기가 중심을 이룰까. 아마도 대한민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민주주의는 정당정치가 기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당들에 실망한 분들이 많다. 대놓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자(者)가 그 자(者)라고.” 여당과 야당이 있지만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노라고. 선거 때만 되면 고민된다고. 찍을 자(者)가 없다고.

그런데 올 추석을 며칠 앞두고 변화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시민단체 대표주자인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안철수 서울대 교수가 불러일으킨 회오리가 크게 불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치권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이 바람은 과연 왜 불고 있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친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윤휴

조선 효종과 현종, 숙종 대를 살았던 윤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덕일의 <윤휴와 침묵의 제국>은 당시 상황을 객관적 사료로 조망하면서 윤휴라는 인물의 종합적 평가에 나섰다. 윤휴는 오랫동안 ‘사문난적(성리학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있던 인물이었다.

과연 그럴까.

윤휴는 효종과 현종이 여러 번 벼슬에 나오라고 강권했지만 한 번도 나선 적이 없었다. 그는 고향에서 책을 읽고 학문에만 매진했다. 여러 책을 편견 없이 독파하다 보니 자신만의 사고 시스템이 생겼다.

윤휴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부분은 ‘백성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다. 윤휴는 먼저 <예기> 42편에 나오는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이라는 문구를 인용했다.

이 한자는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과 친한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이름에 있다.”는 뜻이다.

윤휴는 “<예기> 42편의 ‘백성과 친하다(親民)’를 주자 학자들이 신민(新民)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지적했다. 본래의 의미를 왜곡했다는 주장이었다. ‘신민’은 백성을 교화해 새롭게 한다는 의미이지만 ‘친민’은 백성과 친하다는 뜻으로 백성이 ‘천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백성을 ‘신민’의 관점으로 바라보던 조선의 주자 학자들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다. 신분의 차이가 엄격하며 백성들은 사대부를 위해 존재한다는 우월적 관점이다.

반면 윤휴는 백성은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천하’라고 여겼다. 자신과 백성 사이에 계급적 차별이 없으며 백성은 정성과 신의가 있다고 여겼다.

윤휴의 대개혁…지패법과 호포법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조선의 가장 큰 문제는 민생 파탄이었다. 지금 대한민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가계대출은 폭증하고 있고, 물가는 치솟고, 청년실업은 끝을 보이지 않고 있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폭증하고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큰 전쟁을 겪으면서 백성들이 내야 하는 세금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양란을 겪으면서 돈이 있는 양민들이 돈으로 양반을 사면서 세금을 내는 일반 백성들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세금의 양은 늘고 세금 내는 백성은 줄어들었으니 세금의 몫이 두 배로 증가했다. 세금을 피해 도망가거나 유랑민이 되는 게 오히려 나았다. 아니면 산골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든가. 나라가 있는 게 오히려 더 힘든 폭정의 시대였다.

효종과 현종 때 끝내 벼슬길에 나서기를 거부한 윤휴는 마침내 숙종 1년에 궁궐로 들어간다. 윤휴의 대개혁이 시작됐다.

윤휴가 내놓은 개혁 법안은 지패법과 호포법이었다.

조선은 신분의 차이에 따라 재질이 다른 나무에 신분을 적은 호패법을 쓰고 있었다. 나무 재질에 따라 신분이 확연히 구분됐다. 윤휴는 이 호패법을 없애고 지패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패법은 신분에 구별 없이 종이로 만든 신분증 제도를 실시하자는 것. 지금으로 따진다면 주민등록증과 같은 개념이다.

사대부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했다.

윤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호포법 개혁에도 나섰다. 세금을 내지 않던 양반들에게도 군포(군역에 대한 세금)를 받자는 것이었다. 양반의 인구를 정확히 계산해 세금을 부과하자는 대개혁적인 발상이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윤휴의 개혁 법안은 피폐된 삶을 되살리고 신분의 차별을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민생법안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권력을 쥐고 있던 사대부들은 달랐다.

윤휴의 개혁안에 대해 당시 사관(史官)들 조차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사관은 지금으로 따지면 언론사 기자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이다. 사관들은 기사를 통해 “지패를 만들어 작은 주머니에 차니, 이때 사람들이 ‘소낭패(작은 주머니에 찬 지패)’가 ‘대낭패(아주 난감한 상황)’라고 말했다.”고 이죽거렸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백성이 흉년으로 굶주리는데 주구(관청에서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것)를 더하고 밀속(비밀 단속)을 보태서 백성들의 원성이 길에 가득했지만 윤휴의 당은 이를 ‘기뻐하면서 북치고 춤춘다’고 일컬었다.”라고 비아냥거렸다.

정론직필의 역할을 맡은 사관조차 윤휴의 개혁안에 왜곡된 여론을 이용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덕일 교수는 “숙종 때의 사관들은 서인(노론) 당론을 따르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른바 춘추의 붓을 가졌다는 사관들의 시각이 이 정도였다.”고 분석했다.

지금과 다를 것이 없다. 대한민국의 몇몇 언론사들은 민심과 민의보다는 특정 집단의 이해를 대변하고 심지어 사실을 왜곡해 자신들만의 특권을 맘껏 누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는 국민(백성)은 여전히 ‘신민’, 즉 교화의 대상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덕일 교수는 <윤휴와 침묵의 시대>를 통해 윤휴가 살았던 시대는 “나라보다 당이 중시되는 시대, 군부보다 당수가 중시되는 시대였다.”고 평가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투표에서 참패한 뒤 곧바로 사퇴한 것을 두고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당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당이 우선시되는 시대는 지금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덕일 교수는 개혁가 윤휴의 모습을 두고 “당시 사대부들은 어떤 지탄을 받아도 계급적 특권을 내려놓을 생각은 없었다. 언행일치와 지행합일을 추구하던 윤휴 같은 사대부는 소수였다.”고 지적했다.

시대는 윤휴에게 더욱 안 좋은 상황으로 치달았다.

숙종 6년 윤휴가 속해 있었던 남인 정권이 몰락하고 서인 정권이 재집권한다. 이때부터 청남(남인의 한 파)에 속해 있었던 윤휴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된다. 끝내는 ‘사문난적(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으로 지목돼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역사에서 거론되지 않을 만큼 핍박을 받았다.

윤휴 “백성은 신령하고 신의가 있다

윤휴의 백성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실록 기록들이 많다. 그 중 한 문장을 보자. 윤휴는 숙종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신이 일찍이 생각하기를 지금 사대부들은 그 마음속에 이해가 엇갈리고 보고 들은 것이 지식을 가리기 때문에 의논이나 행동이 본심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민들은 비록 무식해도 하늘이 부여한 성품이 어줍지 않아 지극히 어리석은 듯 하면서도 신령하고 정성을 다하면서 신의가 있습니다.”

윤휴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대부 보다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런 윤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 역사는 그렇게 조금씩 퇴보하고 있었다.

윤휴는 답답한 자신의 마음을 시로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 삼막사 망해루에 올라 시를 읊었다.

“푸른 산에 찬 기운 일어 망해루에 바람이 거세고/강구름이 비를 불러 해는 모래톱으로 사라지네/이때에 높이 올라 바라보는 것도 우연한 충성인데/눈 들어 산하를 보니 시름을 이길 수 없도다.”

바람도 거세고, 해는 사라져 버리고, 시름을 이길 수 없다던 윤휴! 그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다.

윤휴의 개혁안이 좌절되면서 조선 역사는 퇴보하고 ‘침묵의 제국’으로 걸어들어 갔다. 사대부만의 나라, 사대부만의 권력, 사대부만의 정치가 조선후기 사회를 움직였다. 백성은 도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는 과연 얼마나 다를까.

박원순 이사와 안철수 교수가 불러온 회오리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두 사람이 불러일으킨 회오리는 거센 물결로 계속 뻗어나가고 있다.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 있는 해이다.

‘언행일치와 지행합일을 추구하던 윤휴 같은’이라는 책 속의 문구가 계속 귓가에 맴돈다. 박원순과 안철수에게서 국민들은 그런 문구를 떠올렸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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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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