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마다 행복이라는 한 조각에 젖어든다.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 녀석은 저녁 9시만 되면 꾸벅꾸벅 졸음에 빠진다. 분명히 자기 방에서 자기 시작한 녀석이 새벽이면 잠자리를 옮긴다. (거의 매일)화장실에 들렀다 자기 방으로 가지 않고 우리 방으로 살포시 기어들어 온다. 아마 새벽 4~5시 사이가 아닐까 싶다. 5시50분에 알람이 맞춰져 있는 휴대폰 소리에 일어나 보면 아들 녀석이 아내와 내 사이를 확연하게(?) 가로질러 누워 있는 모습을 본다.

얼굴 방향이 늘 엄마 쪽이란 게 좀 서글프지만. 살짝 손으로 얼굴을 내 쪽으로 돌릴 냥 치면 곧바로 엄마 쪽으로 향해 버린다. 자동이다. 모유를 오랫동안 먹었던 탓일까, 엄마를 향한 얼굴 표정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런 아이를 볼 때마다 희미한 웃음과 행복감이 밀려드는 새벽이 좋다. 커가면서 점점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아직도 새벽에 부모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아이가 사랑스럽다.

신채호 선생의 ‘내 사랑, 내 조국’

1928년 중국 북경.

한 줄기 찬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책상 앞에 앉아 앞으로 무정부주의 활동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우리나라 역사를 재정립하는 작업에도 몰두하고 있었다. 시대는 암울했다. 일제의 교묘한 식민지 정책은 한반도를 넘어 이곳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책을 앞에 둔 신채호 선생은 순간 자신의 눈을 비볐다. 바로 눈앞에 놓여 있는 글자가 가물가물해지더니 희뿌연 안개가 뒤덮이고 마침내 보이지 않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이러다 실명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신채호 선생은 고국의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최근 갈수록 눈이 침침한 것이 이러다 실명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소. 큰 아이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으니 사진 한 장 동봉해 보내주기 바라오.”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지만 아이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편지를 접한 아내는 만사를 제쳐두고 사진을 보내는 대신, 아이를 업고 북경으로 직접 달려갔다. 아내와 아이를 마주한 신채호 선생은 기쁨과 함께 슬픔이 몰려들었다. 한 달 동안의 달콤한 가족생활도 잠시, 신채호 선생은 다시 아내와 아이를 고국으로 돌려보낸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단란한 가족과 함께 있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헤어졌고 1929년 신채호 선생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대련 감옥에 수감된다. 이어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가족생활은 더욱 어려워진다. 감옥에서 아내가 풀장수로 겨우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신채호 선생. 그는 부인에게 비통한 심정의 편지를 보낸다.

“내 걱정은 말고 잘 지내시오. 정 할 수 없거든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시오.”

염무웅 선생의 <문학과 시대현실> 중에 나오는 내용이다. 염무웅 선생은 “단재 선생의 전기와 연보에 기록된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나는 솟구치는 감동에 눈물이 도는 것을 억누르지 못한다.”고 적었다.

종로에 길 잃는 아이 찾기, 팔봉의 ‘자기만의 사랑’

1932년 서울 종로.

네 살배기 아이와 한 살 아래인 조무래기가 엿장수를 따라가고 있다. 무작정 엿장수 가위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두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한 스님이 아이들을 근처 종로파출소에 데려다 주였다. 순사들이 아이들에게 집 주소며, 어디 사는지 물었지만 네 살, 세 살의 아이들에게는 어려운 질문이었다. 아이들은 겁도 나고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그때 어떤 할머니가 나타나 부모가 찾을 때까지 자신이 아이들을 돌보겠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아이들은 알지도 못하는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근처 할머니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즐겁게 지냈다. 이때 할머니의 대문을 박차고 아이의 아버지가 들이 닥쳤다. 팔봉 김기진이었다.

팔봉은 아이들을 보자 양팔에 한 명씩 끌어안고 할머니 집을 나와 인력거에 아이들을 태웠다. 그리고 자신은 인력거 뒤를 따라 가면서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회사에서 부리나케 뛰어 온 팔봉이 곧바로 아이를 찾은 것이다.

팔봉은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맡고 있었다.

염무웅 선생이 <문학과 시대현실>에서 단재와 팔봉의 ‘내 사랑, 아이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에피소드 때문이다. 1995년에 염무웅 선생이 발간한 비평집이 <단재상>과 <팔봉비평문학상> 등 두 상을 한꺼번에 받게 됐다.

염무웅 선생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단재와 팔봉의 한 단편을 묘사했다. 그리고 나지막이 “단재와 팔봉은 그 성격상 너무나 다른 인물인데...”라며 이 이야기를 전해준다.

단재의 올곧은 자주와 민족정신에 비해 팔봉은 친일 행적으로 후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은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런 두 인물을 기리는 상은 동시에 받게 됐으니 참 난감했다고 회고했다.

<문학과 시대현실>은 읽는 중에 있는 나에게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말 그대로 문학은 ‘시대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참혹하고 잔인했던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두 인물의 편린을 살짝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피붙이를 사랑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실명이 되기 전에 아이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며 사진을 부탁했던 신채호,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 종로 거리를 헤맸을 김기진,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단재와 팔봉의 ‘내 사랑 내 곁에’는 그 결말에 이르면 무척이나 다르다. 단재는 ‘아이 사랑’을 ‘나라 사랑’으로 이어갔지만 팔봉은 친일 행적으로 ‘자기 자식만 사랑’한 사람에 머물고 말았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은 무엇이었을까.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많은 시민이 죽고,

5.16 쿠데타로 군부정권이 들어서 유신까지 펼쳐지고

5.18 광주민주화항쟁으로 많은 시민이 죽어간,

80년대 대학가에서 젊은 학생들이 몸을 던져 자신을 희생한,

그 비극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그 시작은 친일세력에 대한 명확한 ‘짚고 넘어가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일제에 빌붙어 자신의 가족과 편리만을 위해 식민지 국민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핍박한 이들이 있었다.

특히 그 당시 사회적 지도자에 있었던 사람이었다면, 이는 분명히 책임을 묻고 짚고 넘어갔어야 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들어서고 친일세력들은 그대로 미군정의 책임자로 둔갑했으며 독립 운동가들이 오히려 또 다시 고통 받는 시대에 이른다.

그 해결 못한, 풀지 못한 비극이 4.19→5.16→유신→5.18까지 이어진 것이다.

신채호 선생의 “정 할 수 없거든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시오.”라는 이 말에 염무웅 선생의

“솟구치는 감동에⋯”라는 말은 누구나 공감한다. 눈물이 감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당시 우리나라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신채호 선생에게 감사하는 마음,

그런 분이 우리나라에 있었고 그로 인해 감동과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

이 땅에 태어난 우리들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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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