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3.14 김영하식 소설쓰기를 보여주는…<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펜과 컴퓨터 자판기를 통해 표현되는 글을 통해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하는 것일까.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나의 의미로, 딱 꼬집어 이게 정답이다는 게 없다. 무수히 많은 정의가 나올 수 있다.

① 글을 쓰는 게 좋다. 세상과 호흡하고 싶다. (나의)존재감을 느낀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

② 돈을 위해, 생계를 위해서 글을 쓴다.

③ 글을 쓰면 명예도 얻고, 보람도 있고, 돈도 벌고, 그 모든 것이 좋다.

크게 이 세 가지의 범주에서 작가에게 글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글의 의미’를 짚어 보면 이제 “작가란 무엇인가, 누구인가?” 혹은 “작가란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①의 경우에 작가란 광범위한 사람들로 구성될 수 있다. 블로그를 통해 글을 쓰는 사람, 트위터에 글을 올리는 사람, 일기를 쓰는 사람…펜이나 연필, 혹은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며 어떤 글자든 적어 내고,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모든 사람들이 ①의 작가군(群)에 포함될 수 있다.

②의 경우는 ①에 비해 범위가 좁아진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사람, 트위터로 소통하는 사람, 일기를 쓰는 사람 등등은 “돈과 생계를 위해”서만 글을 쓰지는 않는다. ②의 경우는 아마도 우리가 소위 말하는 ‘전업 작가’라고 표현해야 할 듯 하다.


전업 작가가 되는 경우는 여러 가지이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등단을 하거나, 혹은 단행본을 직접 발간해 문단계의 주목을 받아 프로작가로 인정을 받든가…②의 경우에는 자신의 생계-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경제활동을 한다(아니 할 수밖에 없다)-를 위해 글을 쓰는 ‘직업 작가’로 규정할 수 있다.

③의 경우가 사실 가장 어려운 ‘작가군(群)’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①과②의 경우에 해당되는 작가들을 우리는 현실에서 쉽게 보고 만날 수 있다. 그만큼 많다. 그러나 ①에도 해당되고 ②에도 포함되면서 ③에 해당되는 작가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③에 해당되는 작가는 ②와 ①의 교집합이면서도 사실 모든 부러움을 받는, 조금은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해석한다면 지나친 평가인지는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누구누구 작가”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 그 작가!”라는 감탄사가 나오게 만드는 작가들이 ③에 해당된다.

김영하에게 작가와 글의 의미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문학과 작가란 무엇인가.’를 두고 김영하 작가와 조영일 비평가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김영하가 생각하는 ‘문학과 작가’는 어떤 의미일까.

김영하는 “작가란 외부의 인정이 없어도 작가일 수 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꾸준히 쓰고 있다면…”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예술가 개인은 시장의 규모도, 진입장벽의 높이도, 정치 제도도 바꾸지 못한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당분간 오직 우리 자신뿐”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김영하에게 있어 작가와 글의 의미는 ①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굳이 “당신을 작가로 인정합니다!”는 등단이나 혹은 문단계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면, 외부의 인정 없이도 작가일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에 반해 조영일 비평가의 생각은 다르다.

조영일은 “모든 작가는 프로(생계수단으로 삼거나 혹은 그러려고 노력해야)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굳이 정의하자면 ②의 정의에 가깝다. 나아가 조영일은 “자신을 바꾸는 것은 힘들다. 왜냐하면 나는 세계가 바뀌는 만큼만 바뀌기 때문”이라고 말해 자신을 바꾸는 싸움이 아닌 ‘세상의 틀을 바꾸는, 혹은 세상과 소통하는 장소’로 작가는 나서야 한다고 분석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이런 논쟁을 보고 듣고 보다가 최근 김영하의 소설집을 만나게 됐다. 2004년 <오빠가 돌아왔다>이후 6년 만에 나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라는 단편 소설집이었다.

김영하가 논쟁을 벌인 ‘작가는 인정을 받든 아니든 글을 쓰면 작가이다.’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 뿐’이라는 그의 말이 그대로 표현된 소설집이 아닐까 싶다.

소설의 내용이야 읽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내용도 다양하게 해석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분명 이 소설집은 김영하의 펜을 통해 탄생된 만큼 작가가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고 싶었는지는 ‘작가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영하는 ‘작가의 말’을 통해 “청탁 없이 내킬 때 쓴 소설들이 대부분이어서일까. 모아 읽는 호흡이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고 막힘이 없었다.”라고 적었다. ‘청탁 없이 내킬 때’라는 그의 외침 속에서 “작가는 언제든 글을 쓰고 있을 때 작가”라는 그의 말이 되살아났다.

또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그의 주장도 소설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이 소설집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사건은 일어나고 “나는(소설속의 주인공들) 그 사건으로 인해 변화되고 깨닫게 된다.”는 메시지를 소설 곳곳에 깔고 있다.

이런 소설이 대부분이다 보니 김영하 자신에게는 이번 소설집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연스럽고 막힘이 없었다.”로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읽는 독자인 나에게는 뭔가 답답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소설의 뿌리가 뻗어나가지 못하고 성긴 뿌리에 머문 느낌이랄까. 철저히 자기 자신 안에서 모든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사회적으로 확대되거나 혹은 뻗어나가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가 곳곳에서 엿보였다.

이번 소설집의 대표적 소설, <로봇>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첫 번째,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두 번째,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단 이러한 명령들이 첫 번째 법칙에 위배될 때는 예외로 한다.

세 번째, 로봇은 자신을 보호해야만 하고 단 그러한 보호가 첫 번째와 두 번째 법칙에 위배될 때는 예외로 한다.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대형빌딩 사무실에 출근하는 수경. 여행사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사장의 ‘애인(육체적)’ 노릇까지 감당한다. 그런 그녀에게 비 오는 지하철 어느 출근길, 한 남자가 다가온다. 그의 이름은 이문상.

이문상은 로봇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문상의 꼬리뼈 부분에 버튼이 있고 누르면 멈추고 다시 작동한다. 그런 이문상과 수경은 격렬한 사랑을 나눈다. 수경이 버튼을 누르는 만큼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수경은 점점 이문상에게 빠져 든다. 수경이 이문상에게 빠져들자 이번엔 이문상이 수경을 떠난다. 이문상이 말하는 ‘이별의 변(辨)’.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순간, 내 머릿속의 프로그램이 이제 당신을 떠나야 할 때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열정적 사랑은 인간인 당신을 해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로봇의 3원칙 중 “인간에게 해가 가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원칙 때문에 그는 수경을 떠난다. 문상이 떠나고 난 뒤 수경은 백과사전에 기록돼 있는 ‘로봇 3원칙’을 정서한 뒤 찬찬히 읽어 본다.

<로봇>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로봇>은 ‘연애소설’ ‘사랑에 대한 정의는 무엇인가’ ‘자신을 감추고 표피만 강조하는 현 시대의 우울한 에피소드’ 등등. 그러나 이상하게 나에게는 ‘멍한’ 느낌이었다.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관계’ 설정에 대한 우연과 필연을 통한 비극을 담은 <여행>, 잘 나가던 한 가수의 인생 추락을 보여준 <악어>, 아이스크림에 얽힌 소박한 이야기를 담은 <아이스크림> 등이 이번 소설집에 수록돼 있다.

또 <명예살인>과 <약속>은 짧은 이야기를 통한 소설적 구성을 담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김영하의 소설쓰기가 앞으로 어떤 과정을 걸어갈 지는 지켜보아야 할 것이 분명하다. 이번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는 김영하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쓰기와 자기 내면을 보여주는 ‘작가는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며 자신을 바꾸는 일을 하는’ 명제를 확인시켜 주는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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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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