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가 있다. 그는 금요일 저녁 친구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왔다. 이른 아침 자명종 소리에 잠이 깬, 출근하기 위해서 울리는, K는 뭔가 낯설다. 그가 누워있는 침대, 바깥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아내, 무엇보다 토요일은 출근하지 않은, 유일하게 늦잠을 잘 수 있는 날인데도 자명종이 울렸다는 그 자체가 낯설다.

분명 자신의 침대와 누워 있고, 낯익은 커튼이 보이고, 낯익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 건만, 이 낯섦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침에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소변을 보고, 면도를 하고, 에프터쉐이브 로션을 바르고, 샤워를 한다. 그런데 늘 그곳에 있었던, 평생 한 번도 바꾸지 않았던 스킨로션이 바뀌어 있다. K는 늘 V 브랜드를 썼는데 오늘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Y 브랜드의 로션이다.

무엇보다 K의 휴대폰이 분실됐다는 점이다. 어제, 금요일 K는 정신과 의사인 H와 술을 마셨다. 1차로 일식집에서, 2차로 H가 단골로 있는 바에서 술을 마셨고, 11시쯤에 집에 들어왔다. 그런데 지금 그의 주머니에도, 집안 어느 곳에도 휴대폰은 보이지 않는다.

K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를 찾아 나선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최인호 선생의 최근작이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누군가의 청탁으로 인한 소설이 아닌 스스로의 열망으로 쓴 최초의 장편소설”이라고 밝혔다. 암투병중임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원고지 20매씩 꼬박꼬박 썼다고 적었다.

거미 같은 여인에게서는 악취가 나고

토요일 K는 처제의 결혼식을 앞두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미장원에 간다. 두 사람을 미장원에 내려준 뒤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카페의 약도를 보고 그곳을 찾는다. 그곳은 이태원 근처의 어느 바였다.

자신이 어제 있었던 일을 복기하기 위해 다시 찾아 나선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는 휴대폰의 행방을 찾는 것이 급선무. K가 도착한 바는 문이 열려 있었다. 그곳에는 여자도 아닌, 남자도 아닌 어떤 사람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K를 몰랐다. K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성냥갑을 보여주며 내가 어제 여기 왔었느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전혀 모르겠다’는 답뿐이다.

분명 어제 H와 바에서 술을 마시면서 H는 바의 여주인(거미 같은 여주인)과 춤을 추었고 춤을 추면서 H가 여주인의 찢어진 옷 사이로 손을 집어넣는 것까지 본 마당에. 그런데 어디에선가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K가 아내 휴대폰으로 자신의 휴대폰에 메시지를 보낸 것을 보고 걸려온 전화였다. 전혀 모르는 낯선 남자의 전화. K의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는 것. K는 그를 만나 휴대폰을 돌려받는다. 그런데 K의 전화를 전혀 엉뚱한 영화관 구석에서 주웠다고 그는 말한다. K는 계속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하게 낯선 일들에 어리둥절하다.

이런 모든 것을 속 시원히 말해줄 수 있는 것은 H뿐이다. 금요일 저녁 H와 술을 먹고 집에 돌아온 이후 계속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만큼 H를 만나 그가 기억하고 있지 않는 금요일 저녁 9시30분에서 11시까지의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토요일 저녁에 H를 만나 이야기를 한다. 정신과 의사인 H는 "가장 존경하고 내 존재를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고 그 사람을 만나 정체성을 확인해 보라“고 권한다. 그는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던 누나를 떠올린다.

그 사이사이, 휴대폰을 가지고 있던 남자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던 카페에서 ‘거미 같은 여인’을 본다. 또 커피를 마시고 있던 중간 중간에도 ‘거미 같은 여인’이 나타난다. 심지어 TV 화면의 뉴스를 전달해 주는 아나운서도 ‘거미 같은 여인’이다. 서로 같은 사람인지, 전혀 다른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들에게서 심한 악취가 풍긴다.

요즈음 길거리를 나서 보라. 모두 늘씬하고, 온갖 향수를 가득 바른 여인들이 줄기차게 지나가고 있다. 뚱뚱하고, 초라한 여인들은 거의 없다. 누구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다. 도시는 이제 ‘늘씬하고 향기롭고 탱탱한 피부를 가지고 있자 않으면’ 살기 힘든 곳이 돼 버렸다. 과연 그 겉모습은 화려하고 아름다울지 모르나, 가끔씩은 지나친 향수 냄새로 기절할 뻔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 선 K

오래전 헤어졌던 누나를 어렵게 만난다. 누나와 결혼했던, 매형이었던 P교수를 만나 연락처를 건네받는다. P교수는 K에게 일요일 신촌의 어느 카페로 올 것을 원한다. 그 카페에 들어서자 묘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카페는 여장남자의 전용 카페. P 교수도 일요일 마다 회원들만 출입할 수 있는 그곳에서 여장을 한다. 그리고 P교수란 정체성을 버리고 ‘올렝카’라는 여자로 통용된다.

누나를 만났지만 누나는 엄청난 거구가 돼 있다. 누나는 K를 반긴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가족 간의 오붓한 정을 느낀다. 국수를 삶아 먹고, 누나가 가지고 있던 옛날 앨범을 같이 보고, 마침내 K는 자신이 K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토요일 아침에 집에서 딸의 강아지에게 물린 다리의 상처가 욱신거린다. 누나가 그것을 발견하고 상처가 덧날 것 같다며 입으로 상처를 빨아준다. 순간, K는 누나에게서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낀다. 혼란스러워 진 K는 누나의 집을 박차고 나온다.

자신의 정체성을 누나와 누나가 가지고 있던 가족 앨범을 통해 확인했지만 친누나에게 욕정을 느끼는 이 부조화! K는 다시 혼란해 빠진다. 만약 K가 진짜 누나의 동생이라면 욕정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K는 자신이 K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시 빠져 든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란 말인가. K는 K가 아니란 말인가. K의 혼란은 더 깊어진다.

또 하나. 누나는 몇 년 전 K가 보낸 편지를 보내준다. 그러나 K는 누나에게 편지를 보낸 기억이 없다. 그 편지를 누나로부터 건네받고 호주머니에 넣어 둔다. 누나에게 강한 욕정을 느낀 K가 누나의 집을 뛰쳐나와 그 편지를 본다.

그 편지는 분명 K의 필체였고, 돈을 좀 융통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K는 전혀 기억에 없는 편지! 그 편지 밑에 계좌번호와 전화번호가 있다. 전화번호도 낯선 번호였다. K는 그 번호를 전화를 건다.

K가 건 전화를 K가 받다

K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이럴 수가! 전화를 받는 목소리는 분명 K의 목소리였다. K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다른 K가 자신의 전화를 받고 있는 현실! K는 또 다른 K와 만난다. '또 다른 K', K와 구별하기 위해 레인저라고 부른다,를 만난 K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목소리, 얼굴 표정, 모두 하나같이 똑같았다. K는 결론을 내린다. 자신은 레인저와 같은 인물이고 어떤 한 공간에서 서로 바뀌었거나 혹은 누군가가 대리 인생을 살고 있고, 이 모든 것은 ‘빅 브라더’가 연출해 낸 공간이라고.

최인호 선생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K의 토요일 아침부터 월요일 아침까지의 3일 동안 행적을 다루고 있다. 소설 속의 모든 인물들은 이니셜로 나온다. 이니셜은 불특정 다수의 대표성을 띈다. K는 K일 수도 있지만 나일 수도 있다.

도시는 낯선 이들의 공간이다. 또한 낯익은 공간이기도 하다. 이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로망이다. 그 끝없는 갈등이 도시를 변화시키는 동력일 것이다.

링반데룽!

정미경의 <아프리카의 별>에서도 링반데룽이 나왔고, 이승하의 시집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에서도 이 ‘링반데룽’이란 말이 언급된다. 현대인의 삶, 현대인의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해 주는 단어일 수 있다.

늘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삶, 어딘가 낯익었음에도 낯설고, 뭔가 신비하면서도 잔혹하고, 아름다운 면서도 추한 현실. 그곳을 벗어나는 이별을 우리는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잔혹함과 아름다움, 추함과 신비를 모두 경험하면서 끝내는 대지진과 같은 지각이 흔들리고, 지구가 다시 깨끗해지는 그곳을 향해 가고 있는 길인지도 모른다.

최인호 선생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술술 읽힌다. 속도감이 있다. 이미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매일매일 20매씩 꼬박 두 달에 걸쳐 적은 소설인 만큼 최인호 선생의 현대적 이미지가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서평을 적은 김연수 소설가는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최인호 선생의 <타인의 방>을 꼭 읽어 보기”를 권했다.

최인호 선생에게 있어 이 도시는 벗어날 수 없는, 그러나 끝내 벗어날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 다가오는 듯 하다. 그것은 비단 최인호 선생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낯익은 타인의 도시’는 지금도 여전히 이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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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링반데룽’의 쳇바퀴 삶, 길을 찾아서⋯이승하의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똑같은 길이지만 어제 걸었던 길과 오늘 걷는 길은 다르다. 똑같은 음악이지만 마음이 우울할 때와 마음이 즐거울 때 듣는 음악은 다르게 다가온다. 길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들길, 산길, 골목길, 꼬부랑 길, 곧게 뻗은 길, 가는 길, 되돌아오는 길⋯길은 도처에 널려 있다. 인간은 엄마의 자궁에서 벗어나는 순간, 헤아릴 수 없는 이 수많은 길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운명이다.

비오는 아침, 많은 사람들이 방사능비라고 불안해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차도 막힌다. 조금 늦게 회사에 도착한다. 회사 맞은 편, 2층에는 조그마한 카페가 있다. 수제 햄버거를 파는 가게인데,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연다.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음악이 솔솔 새 나온다.

가랑비가 오는 아침, ‘Ghost(사랑과 영혼)’의 주제가였던 ‘Unchanged Melody'가 흘러나온다. 길거리에서 비오는 날 아침, 언뜻 들려오는 노래가 고즈넉하다. 회사 입구로 올라서지 않고 이 길이 끝나는 곳까지 무작정 걸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자본의 무게가 눌린 나는 무작정 길을 떠나지 못하고 회사 입구로 쏘옥 들어갈 수밖에 없다.

길 위에서 혜초를 만나다

이승하 시인의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은 ‘혜초의 길’을 시로 담았다. <왕오천축국전>이란 대작을 남긴 혜초가 비단길을 거쳐 인도까지 이르는 여정을 시인이 직접 발길을 옮기면서 시로 표현했다. 이 시집의 부제는 <혜초의 길>이다.

세상은 바다

돛 올리면 집 밖은 전부 길

닻 내리면 바로 거기가 내 집인 것을(<고원에 바람 불다>중에서)

시집의 첫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은 모두 바다이고 돛을 올리면 떠나야 하고 우리는 길에 나설 수밖에 없다. 모든 길속으로 인간들은 걸어가고, 걸어가다 지치면 닻을 내린다. 그곳에 안락과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내 집’이라고 시인은 읊고 있다.
 

시인은 혜초가 걸었던 길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혜초의 내면을 읽는다. 길 위에서 먹고, 길 위에서 자고, 길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혜초의 모습을 그려낸다.

많이 걷게 될 것이다 후세 사람들아

걷다 보면 성년 되고

걷다 보면 노년 되고

네가 걸음 멈추면

밤하늘의 별들도 운행 멈출 것이다

우리 어차피 길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마음의 집 한 채 여기서 또다시 허물로(<길의 아들>중에서)

모든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내가’ 보는 별과, ‘네가’ 보는 별은 다를 수밖에 없다. 수 억 만개의 DNA가 모두 같지 않은데 어떻게 같은 마음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네가 걸음 멈추면 밤하늘의 별들도 운행을 멈추게’ 된다. ‘네가 눈을 감으면 이 세상의 집 한 채 허물어지고’ 또다시 다른 인간이 태어나고, 세상은 그렇게 걷다 걷다 변하게 된다.

혜초는 혼자서 인도로 가지 않았다. 80여명의 일행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높은 고개와 넉넉지 않은 먹거리, 초라한 행색으로 길을 떠난 많은 이들이 중간 중간 질병에 죽고, 고통스러워 삶을 마감한다. 시인은 <고행>이란 시편에서 “오늘도 한 구의 시체를 묻었다”고 혜초의 내면을 이야기한다.

링반데룽의 현대인들이여, 길을 찾아라

혜초가 거쳤을 그 수많은 길 위에서 시인은 삶의 지난함과 삶의 참의미를 깨닫는다.

길 가다가 문득 뒤돌아본다

길 뒤에 무엇이 있나

길 뒤에는 또 길

길 앞에는 또 다른 험난한 길?(<대륙에서 대륙으로 가다>중에서)

현대는 ‘질주의 시대’라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일찍 질주하고, 나이에 맞지 않게 초고속으로 달려야 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우리 후세들은 키워지고 있으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철저하게 ‘초고속’으로 우리 후세들은 인위적으로 자라고 있다. 스스로 크고, 스스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목적에 의해 키워지고 인위적으로 자라고 있는 현대인들!

현대는 ‘질주의 시대’이며 그 ‘질주’를 모두들 두려워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길속으로 함께 묻어간다. 시인은 이 현대의 삶을 두고 “길 가다가 문득 뒤돌아본다”고 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아직도 먼데 과연 ‘뒤돌아볼’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가끔씩 자신의 길을 뒤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볼 때 내가 거쳐 온 길을 가늠해 보고 앞으로 가야할 길을 알게 되는 법이다.

‘길 앞에 또 다른 험난한 길’이 있을지라도 가끔씩은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걷는 여유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혜초의 길’은 굳이 설명하지만 고행의 길이었으며 깨달음의 길이었다. 인도로 가는 그 험난한 여정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 만나고 수많은 나라를 거쳐 지나갔다. 혜초는 그 길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부처는 스물아홉에 집을 떠났네

집 떠나야 길이 열리고

사람 만나야 사람 만들 수 있고

길 떠나야 사람 사귈 수 있는 것

사람과 사람이 모여 마을 이루고

집과 집이 모여 도시 이루는 것을

물과 물이 모여 강이 되듯이

별과 별이 모여 밤하늘이 되듯이(<떠나는 자, 머무는 자>중에서)

혜초의 ‘길 떠남’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시인은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을 만나고,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별과 별이 모이는 ‘밤하늘’의 이치를 알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혜초의 길이 어떤 의미였는지도 다음 시를 읽으면 더욱 명확해 진다.

오천축국 가보고 알았겠지

부처는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깨닫고

길에서 죽었다는 것을

부처에게 길은 집이고 도량이고

병원 영안실이었다는 것을(<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다>중에서)

길에서 모든 것을 경험하고 길에서 태어남과 죽음까지 고스란히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혜초의 길이었음을 시인은 해석하고 있다.

혜초의 ‘머나먼 길’을 시인을 따라가면서 현대 문명의 이기심과 물질 만능주의에 대한 개탄도 숨기지 않는다.

집값 오르니 오년 번 돈보다 더 많은 수익

집값 떨어지니 오년 번 돈보다 더한 손실

나 이 좁은 땅에서

아파트 평수 넓히고자 안달복달인데

혜초, 그대는

그 많은 길의 주인이었구나

그대가 걸어 길을 길들였구나(<땅과 집과 길>중에서)

좁은 땅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 땅값 때문에 집을 옮기고, 땅값 때문에 집을 버리는 사람들⋯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엔 ‘땅’만 있고 사실 ‘길’은 없어진지, 혹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길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터이다.

혜초는 그렇게 수많은 길과 길 위에서 깨달음을 얻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으로 맴도는 인생을 한탄한다.

나의 길이 언제까지나 앞으로 나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걷고 또 걸었는데 제자리로 돌아오는

링반데룽 같은 인생(<월아천에서>중에서)

링반데룽? 산속에서 짙은 안개 등으로 계속 걷지만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현상을 말한다. 길을 잃어버린 것, 분명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지만 한참 만에 돌아오면 다시 그 자리⋯현대인의 삶을 시인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은 길에 대한 시인의 내면을 담았다. <혜초의 길>이란 부제를 달았지만 사실, 그 길은 우리가 갈 길이고, 우리가 가야할 길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인들은 길 위에서 삶을 깨닫고, 길 위에서 인생을 노래하기 보다는 길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쏜살같이 질주한다. ‘링반데룽’같은 쳇바퀴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승하 시인은 ‘길’을 찾으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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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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