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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18 디지털 피로와 치매

“노래 한 곡 불러봐!”

회식 자리에서 후배에게 명령하다 시피 부탁했다. 소주가 몇 잔 돌고, 얼굴에 홍조를 띈 후배는 머뭇거린다. 다행히 주변에는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은 없다. 밖에는 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어둠이 알맞게 익은 거리는 ‘노래 한 곡 뽑기’에 딱 좋은 날씨이다. 후배는 잠깐 주저하더니 ‘신청곡!’을 외친다. 듣고 싶은 노래를 신청해 주면 자신이 부르겠다고 한다. 나는 이은미‧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주문한다. 후배는 ‘어~어~’를 외치더니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뭐하니?”

내가 묻는다.

“서른 즈음에 가사 찾는 중인데요.”

후배는 그렇게 말하는 중에도 스마트폰 터치 자판기를 두드리기 바쁘다. 잠시 뒤.

“선배! 찾았슴다! 이은미 버전이 좋습니까? 김광석 버전이 괜찮습니까?”

“......”

후배에게 “그 가사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회식 자리에서 ‘생음악’을 주문하는 내가 후배에게는 ‘참, 이상한 양반이네.’라는 힐난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는 현실이다. 후배가 “선배! 노래는 노래방에 가서 불러야지요.”라는 말이 되돌아오지 않는 게 천만 다행이다.

밖에는 비가 알맞은 소리로 토닥토닥 내리고 있고, 어둠은 적당히 희뿌연 색을 밝히고 있지만 스마트폰에서 쏟아지는 ‘서른 즈음에’는 내 귓속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매트릭스(Matrix)의 회로판 중의 하나를 걷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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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