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랑은 있었다. 우주가 탄생하기 전에 이미 사랑은 있었다. 사랑이 사람을 만들었고 우주를 탄생시켰다. 전 역사를 통틀어 인류를 지탱해 온 것은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남녀가 사랑하면서 자식이 태어나고 어버이와 자식의 사랑을 통해 가정이 꾸려지고, 형제의 사랑을 통해 힘을 얻고, 친구와 친구의 사랑으로 사회가 만들어지고, 국가에 대한 사랑을 통해 지구촌이 만들어진다.

사랑해!

Ich liebe dich!

나라의 언어를 모르는 초등학생도, 영어를 전혀 모르는 나이 많으신 분들도 ‘아이 러브 유.’ ‘쥬 떼므.’가 ‘사랑해.’라는 표현이라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다. 이미 태어나기 전에 우리 머릿속에 저장돼 있는 유전적 형질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은 그 어느 감정과 단어보다 위대한 단어이자 느낌이다.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사랑은 존재했을 만큼 역사에 있어 가장 강력한 발전적 촉매제 역할을 해 왔다고 생각된다.

사랑으로 인해 욕망이 꿈틀거리고, 비뚤어진 욕구가 샘솟고, 인류의 역사에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사랑으로 세상이 바뀌고, 사랑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까지 몰고 가는 비참함도 경험한다.

창비세계문학 중 <어느 사랑의 실험>은 사랑에 대한 시대의 기록을 담았다. 그것도 독일 소설가들의 단편소설을 통해 19세기 초에서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작가들의 ‘사랑에 대한 철학’ ‘사랑에 대한 기록’을 담았다. ‘Ich liebe dich!’라고 외치는 작가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정직한 법관’은 사랑과 욕망에 대한 긴장관계를 그린 단편이다.

젊은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늙은 부자 상인과 결혼한다. 부자 상인은 글로벌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오랫동안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다. 그녀는 남편이 집을 비우더라도 남편에 대한 사랑만큼 자신한다. 절대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은밀하게 움직이는 욕망은 젊은 그녀조차 어쩔 수 없는 욕구.

젊고 유능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녀는 이 젊은이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 젊은이(정직한 법관)는 그녀에게 자제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사랑으로 인해 욕망이 비뚤어지면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다. 그것으로 인해 이 세상은 얼마나 고독해졌던가. 욕망의 자제를 통한 사랑의 진정성에 접근한다.


요한 루트비히 티크의 ‘기발한 페르머’는 사랑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보여준다. 페르머는 루이제를 사랑하고, 루이제의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루이제가 페르머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약혼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페르머는 어처구니없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자신도 동시에 두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으면서.....자신의 두 사랑은 용납될 수 있는 사랑이지만 루이제의 두 사랑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독일 소설은 가끔씩 우리 정서와 동떨어진 부분을 발견하곤 한다. 아마도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클 터인데 가끔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페르머가 루이제의 약혼 소식을 듣고 불같이 루이제 집으로 달려간다.

페르머: “이 사기꾼! 아, 분해서 미치겠다!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

페르머는 분을 삭이지 못해 화장분갑을 집어 들더니 우지직 부러뜨려서 창밖으로 내던져버렸다.

루이제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루이제: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러시면 어떡해요! 이제 뭘로 화장하라는 말이에요?"

이 부분에서 나는 웃고 말았다. 사랑의 극한 대립 속에서 그 까짓 화장분갑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루이제는 ‘이제 뭘로 화장하라는 말이에요?’라고 말하는 광경이 그려지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물론 루이제의 속물근성을 작가는 내비치고 싶었겠지만.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은 형제애를 다루고 있다. 어릴 적 형(까를로)의 잘못으로 장님이 되고 만 제로니모! 형은 동생 제로니모를 평생 책임지겠다고 다짐한다. 제로니모가 여행객들을 상대로 기타를 연주하면 형은 동냥을 한다. 그렇게 둘은 먹고 산다. 형은 동생의 그림자이며 동생의 눈이다.

그런데 한 여행객의 등장으로 두 형제는 갈등으로 빠져든다. 한 여행객이 형에게 1센트를 주면서 동생 제로니모에게는 “조심해! 내가 20프랑 금화를 줬거든. 속지 말라고.”라고 말한다. 여행객이 장난을 친 것인데......

보이지 않는 제로니모는 이 여행객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다. 장님에게 장난을 치는 여행객은 없었으니까. 급기야 형에게 금화를 내놓으라 다그친다. 형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동생의 채근은 이어지고 형에 대한 배신감으로 굳어진다. 형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사랑하는 동생 제로니모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20프랑 금화를 훔치기는 상황까지 이르는데......

둘은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그때서야 제로니모는 전후 사정을 깨닫는다. 경찰에 체포됐지만 두 사람은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까를로는)제로니모가 부드럽고 행복한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걸 보았던 것이다. 눈을 잃기 전 어린 시절 이후로 이런 표정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까를로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이제는 절대로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중략)”

헤르만 헤쎄의 ‘짝짓기’는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속담을 연상시킨다. 키가 매우 작은 온겔트는 포목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많은 아가씨들을 접한다. 울렁울렁 봄바람 불어오는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여자에 대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키가 작은 온겔트에게 누구 하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포일레라는 여자(그렇게 잘 생기진 않았지만 따뜻한 정을 가지고 있는 여인)가 온겔트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관심을 표현하지만 온겔트는 아는지 모르는지 무시한다.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찾고 그리워하고 내심 기대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그러나 포일레가 가지고 있는 배려심과 다정다감함, 상대방을 챙겨주는 심성 등은 ‘얼굴이 예쁘고 잘 생긴 미모’와 비교할 수 없는 값어치가 있다. 온겔트는 눈에 보이는 ‘미모’에서 점점 눈에 보이지 않는 ‘값어치’를 깨닫게 된다.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역발상적인 단편이다. 인간에게 잡힌 원숭이가 화자로 등장한다. 원숭이는 총을 맞고 인간에 생포됐는데 우리에서 탈출하기 위해 ‘인간이 되는 것’을 자처한다. 원숭이는 자신이 인간이 되기 위해 벌였던 여러 가지 일들을 직접 인간에게 이야기하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물근성을 가감 없이 들춘다.

특히 화자(원숭이)가 인간이 되기 위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술 마시는 것’이었다는 부분에서는 언뜻 입가에 미소까지 만들어진다. 원숭이가 인간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직접 읽어보면 여러 가지 느낌으로 다가온다.

헤르만 브로흐의 ‘바르바라’는 그 어느 단편보다 깊은 맛을 던져주었다. 브로흐는 늦은 나이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늦깎이 작가였다고 한다. 소설을 쓰기 전에 장사도 하고 학업도 늦게 시작한 그의 소설은 그래서인지 그 읽는 맛이 깊고 고요하다. 인생을 깊게 접한 글쓰기의 재치, 여유 있는 표현, 깊은 성찰 등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바르바라는 기형적인 십대를 보낸 여자 의사이다. 의붓아버지에게서 고통 받고 집을 뛰쳐나와 방황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자신을 재워주는 그 어떤 남자와도 같이 잠을 잘 만큼)...끝내 그녀를 구원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뒤늦게 공부를 해 의사가 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낀다.

그녀는 공산당원이기도 하다. 한 개인보다는 집단을 중요시하며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바르바라를 사랑하는 42세의 수석 남자 의사. 그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르바라’의 글 중에서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해 오는 의사에게 바르바라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비극적이었던 십대시절)그런 부당한 일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이 세상에서 불의를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끌리게 된 거예요. 물론 그렇게 추구하는 정의라는 것이 한낱 허상에 불과하다는 건 진작 부터 알고 있었고, 지금은 더 확실히 깨닫고 있긴 해요....하지만 그처럼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없다면 우린 살아갈 수 없어요. 인류의 막연한 미래를 위해, 언제 도래할 지 알 수 없는 정의를 위해 사는 거죠....”

이 구절을 보고 조금은 ‘멍’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바르바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허상을 좇고 있다? 왜?

‘막연한 미래’를 위해 ‘언제 도래할 지 알 수 없는 정의’를 위해 그녀는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마치 이 구절은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던지는 말이지 않을까.

이 구절을 보면서 우리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온갖 비리와 온갖 부정, 온갖 비정상이 판치고 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정의는 찾아볼 수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따져 보기 전에 ‘정의는 (이미) 실종됐다.’는 말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수많은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기업은 분명 있는데......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개발독재에 의해 자연은 무참히 무너지고 있는데......누구 하나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빈부격차는 심각하게 벌어지고 먹고 살기 빠듯한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는데......책상에 버티고 앉아 이 나라는 충분히 부자의 나라이며 좋은 나라라고 외치고 있다.

공장에서 백혈병에 걸려 꽃다운 소년, 소녀들이 죽어가고 있는데......그 기업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버티고 있다.

과연 ‘정의’는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정의’는 만들어지는 것인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바르바라의 말처럼 “막연한 미래와 언제 도래할 지 알 수 없는 정의”는 인류가 끝나는 날,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일까. 우리가 생존해 있는 날, 정의는 도대체 오지 않는 것일까.

독일 작가들의 단편을 담은 <어느 사랑의 실험>은 다양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모습을 되뇌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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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짧은 글 속에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흔들리는 지하철 속에서, 옆 사람의 몸이 부딪혔지만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다. 멍하니 책을 덮고 어둠 속을 달려가는 터널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곳엔 어둠만이 가득했지만 내 가슴에는 ‘멍한’ 느낌만 남아 있었다.

<뜻밖의 재회>는 사랑을 담았다. 짧은 이야기 속에 긴 여운을 주는 모든 감정을 실었다. <타이타닉>, <사랑과 영혼>, <미래를 걷는 소녀(동경소녀)> 등 영화를 통해 전해지는 ‘사랑’이란 감정은 이 짧은 소설에서 더 깊은 맛을 전해준다.

뭐라 말하고, 평가하는 것보다 그저 읽어보는 게 좋겠다. 직접 읽어보고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페터 헤벨’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헤벨의 <뜻밖의 재회> 전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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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팔룬에서 오십 여 년 전에 한 젊은 광부가 곧 아내가 될 어여쁜 예비신부한테 키스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싼타 루치아 생일에 신부님이 우리의 사랑을 축복해주실 꺼야. 그럼 우리는 어엿한 부부가 되는 거고, 우리만의 보금자리를 꾸리는 거야.”

그러자 어여쁜 예비신부가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의 보금자리에는 평화와 사랑이 넘칠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나의 전부가 되는 거예요. 당신이 없는 데서 사느니 차라리 무덤 속이 나을 거예요.”

그런데 신부님이 두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신도들을 향해 이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는데 장애사유가 있으면 고지하기 바란다고 두 번째로 외쳤을 때, 죽음이 찾아왔다. 다음날 아침 젊은이는 검은색 작업복이 장례복장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예비신부의 집 앞을 지나가면서 그녀의 방 창문을 두드리며 아침인사를 했으나. 그날 저녁인사는 영영 하지 못했다. 광산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날 아침 예비신부는 결혼식 때 신랑한테 선물로 주려고 빨간 리본이 달린 검은 목도리를 손수 만들었으나, 신랑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목도리를 치워버렸고, 신랑을 생각하며 울었으며, 신랑을 영원히 잊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사이 포르투갈의 도시 리사본이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7년전쟁이 지나갔고, 프란츠1세 황제가 서거했고, 예수회 교단이 폐쇄되었고, 슈트루엔제가 처형되었고, 미국이 독립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이 지브롤터를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터키군이 헝가리의 베테라니 요새를 지키던 슈타인 장군을 포위 공격했고, 요제프 황제도 서거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왕이 러시아령 핀란드를 점령했고,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기나긴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러오폴트 2세 황제도 무덤 속으로 갔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점령했고, 영국군이 코펜하겐을 포격했으며, 그러는 중에도 농부들은 씨를 뿌리고 양식을 거두었다. 방앗간 주인은 곡식을 빻았고, 대장장이는 쇠를 벼렸으며, 광부들은 광맥을 찾아 지하갱도를 파내려갔다.


그런데 1809년 팔룬의 광부들이 세례 요한 축일 무렵 두 갱도 사이를 뚫으려고 지하 백오십 미터나 되는 깊은 곳에서 굴을 파다가 쇄석과 황산염수가 뒤섞인 흙더미에서 젊은이의 시신 한 구를 발견했는데, 시신은 황산염수에 절어 있긴 했지만 전혀 부패하거나 손상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마치 겨우 한 시간 전에 죽은 사람처럼, 혹은 작업을 하다가 잠시 잠이 든 사람처럼, 얼굴 윤곽도 또렷했고 나이도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광부들이 시신을 지상으로 끌어내긴 했으나 그때는 이미 부모 친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여서, 잠을 자는 듯한 이 젊은이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이 젊은이가 언제 사고를 당했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갱도에 들어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한 이 광부의 약혼녀가 마침내 나타났다. 그사이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얼굴이 쭈글쭈글해진 약혼녀는 지팡이를 짚고 현장에 와서 신랑을 알아보았다. 노인네는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기쁘게 반기면서 사랑하는 남자의 시신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해 한참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다가,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내 약혼자라우. 이 사람을 잃고 오십년 동안이나 슬퍼했는데, 하느님이 보살피사 내가 죽기 전에 이렇게 다시 만나게 해주시는구려.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갱도에 내려갔다가 다신 못 나왔더랬지.”

둘러서 있는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듣고는 모두 안타까워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한때의 약혼녀가 이젠 곧 스러질 듯한 꼬부랑 할머니의 몰골로 여전히 젊음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신랑 앞에 서 있는 걸 보고는 모두들 마음이 짠해졌다. 어언 오십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노인네의 가슴에는 젊은 시절 간직했던 사랑의 불꽃이 다시금 반짝 타올랐다. 하지만 신랑은 입을 열어 미소로 응답하지도 않았고, 눈을 떠서 신부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러고 있다가 마침내 노인네는 광부들을 시켜 시신을 자신이 기거하는 조그만 거처로 옮기게 했다. 시신을 교회묘지에 안장할 때까지 이 시신을 모실 권리가 있는 사람은 한때의 약혼녀인 노인네가 유일했던 것이다. 다음날 광부들이 교회묘지에 무덤을 파고 시신을 옮기는 동안 노인네는 시신에 빨간색 리본이 달린 검은 비단목도리로 둘러주고는, 장례식이 아니라 결혼식이라도 치르듯 화사한 예복 차림으로 따라왔다.

교회묘지에 이르러 사람들이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고 흙을 덮는 동안 노인네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고이 주무시구려. 신방이 선선하겠지만, 한 열흘 정도만 참고 기다리시우. 난 이제 할 일도 없으니 금방 따라가려우. 지금은 캄캄하겠지만, 금방 동이 클 거유.”

그렇게 말하고는 무덤가를 떠나다가 노인네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지신(地神)께서 일단 돌려주셨으니, 두 번 다시 거두어가진 않으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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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페터 헤벨(Johann Peter Hebel)

신학자

짧은 형식의 소설쓰기, 이야기꾼

<달력이야기>

헤세는 “헤벨은 독일 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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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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