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8월에 1쇄가 나온 이후, 2012년 3월에 4쇄가 발간되면서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는 <달팽이 안단테>. 달팽이를 관찰한 에세이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달팽이 안단테>를 읽는 순간, 오봉옥 시인의 <달팽이가 사는 법>이란 시가 문득 떠올랐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달팽이'라는 문구가 공통으로 들어갔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지난해 내가 직접 목격한 달팽이를 보면서 오봉옥의 시구를 되새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는 눈물 많은 짐승이었다. 이슬 한 방울도 누군가의 눈물인 것 같아 쉬이 핥지 못했다. 하지만 난 햇살이 떠오르면 숨어야만 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어둠 속에 갇혀 홀로 세상을 그려야 하고, 때론 고개를 파묻고 깊숙이 울어야만 한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그런 천형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등에 진 집이 너무도 무겁다. 음지에서, 뒤편에서 몰래몰래 움직이다보면 괜시리 서럽다는 생각이 들고, 괜시리 또 세상에 복수하고 싶어진다. 난 지금 폐허를 만들고 싶어 당신들의 풋풋한 살을 야금야금 베어 먹는다.(오봉옥 '달팽이가 사는 법')"

 

<달팽이 안단테>는 오봉옥 시인의 시구와 크게 다르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눈물 많은 짐승'은 '점액질이 많은 존재'로 설명되고, '햇살이 떠오르면 숨어야만 하는 존재'는 낮에는 잠을 자고 어두운 밤에 움직이는 달팽이의 습성을 알게 해 준다.

 

'난 지금 폐허를 만들고 싶어 당신의 풋풋한 살을 야금야금 베어 먹는다'는 시적 표현은 달팽이가 여러 개의 이빨을 이용해 다양한 먹이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서른네 살에 떠난 짧은 유럽 휴가지에서 '나'(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는 원인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돼 미국 뉴잉글랜드로 되돌아온다. 몸은 말을 듣지 않고, 계속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모든 것이 '쓰러지는 지경'에 이른다.

 

"그때, 달팽이를 만나다"

 

고향에 도착해 병원을 찾았지만 정확한 병명을 알지 못한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하는 사이, 내 몸은 더욱 악화된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방문을 했다. 친구는 근처 숲 속에서 작은 생명체를 발견한다.

 

"숲에서 달팽이를 보고 주워왔어."

 

그렇게 달팽이와 나는 동거를 시작한다. 달팽이와 함께 지낸 이튿날, '나'는 종이에 나 있는 구멍을 발견한다. 달팽이는 제비꽃 화분에서 물과 음식, 잠 잘 곳을 찾아다니며 잘 살고 있다. 제비꽃 화분에서 나와 종이를 먹어 버린 것이다.

 

'나'는 유리 어항 하나를 발견하곤 그곳으로 달팽이를 옮긴다. 그리고.

 

"이 유리 용기 안에서 달팽이는 안전했다."라고 말한다.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원인을 알지 못하는 질병에 걸려 있는 '나'도 뉴잉글랜드의 작음 집에서 '안전할 수 있을까'. '나'는 달팽이를 하루 종일 관찰하면서 조금씩 달팽이의 안전에 예민하게 신경을 쓰고 있음을 느낀다.

 

누워있는 나에게 '달팽이의 출현'은 작은 공동체에 대한 탐험으로 이어진다. 달팽이와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은 당연한 일. 그 속에서 달팽이가 암수한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고, 달팽이의 이빨이 '날카롭고, 작고, 섬세한' 지식도 습득한다.

 

"나도 동개를 만들고 싶다"

 

 

달팽이는 자신의 몸을 어떻게 보호할까. 혹독하게 추운 날,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 어니스트 잉거솔의 <달팽이 사육장에서>라는 구절을 '나'는 주의 깊게 읽는다.

 

"달팽이는 껍데기 속으로 들어간 뒤 끈적끈적한 점액으로 된 얇은 막을 껍데기 입구에 친다. 모형 북 가죽처럼 팽팽하고 단단하게 만든다. 날씨가 더 추워지면 몸을 더 안쪽으로 움츠리고 또 다른 '동개'를 만든다."

 

달팽이가 만드는 동개(冬蓋-달팽이가 분비하는 껍데기를 덮는 석회화된 점액)를 보면서 '나'는 나의 상태를 생각하게 된다. 달팽이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동개'를 만드는 반면 '나'는 지금 원인도 모를 병에 걸려 달팽이만도 못한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다.

 

"결국 나는 달팽이가 지닌 여러 가지 능력이 부러웠다. 나도 달팽이처럼 당장 동개를 만들어 나를 둘러싼 시련들을 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이라고 생각한다.

 

제럴드 더렐의 자서전 <새, 짐승과 그 일가들>이라는 책을 통해 '나'는 달팽이의 짝짓기와 특별한 사랑법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다. 달팽이 사랑법은 아주 특별했다.

 

"그들은 내(더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마침내 서로 뿔을 접촉했다. 그리고 잠시 멈춰 서서 서로 상대방의 눈을 오랫동안 열띤 모습으로 응시했다. 이어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두 달팽이가 거의 동시에 옆구리로 미세하고 무른 흰 침처럼 보이는 것을 서로에게 찌른다…"

 

더렐이 묘사한 달팽이의 사랑법이다. 여기서 묘사된 '침'은 '사랑의 화살'이라고도 불리는데, 아주 작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탄산칼슘 성분의 침이다. '나'는 달팽이가 찌르는 '사랑의 화살'을 떠올리면서 이 세상 그 어떤 사랑보다 깊은 사랑임을 스스로 깨닫는다.

 

1년 여 동안 달팽이를 관찰한(아니, 달팽이와 함께 살아온) 나는 마침내 한 마리의 달팽이에게서 태어난 새끼 달팽이까지 경험한다. '나'는 마침내 요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고, 건강도 조금씩 회복된다. '나'는 1년 동안 달팽이와 함께 했고, 달팽이의 삶을 통해 서서히 회복되는 자신을 느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지난해에는 무엇이 이 험난한 길에서 나를 구해낼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숲달팽이와 그 녀석이 낳은 새끼 달팽이가 문득 제 앞에 나타났고, 그 녀석들이 아니었으면 버텨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다른 생명체를 관찰하는 것은 그것의 삶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생명이 움트는 봄이다. 온갖 생명체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커나가는 계절이다. 그들은 아주 느리게…느리게 자신의 생명을 키워간다. 특정 생명체의 성장을 오랫동안 지켜보는 것은 '치유의 세계'로 초대받는 기적을 경험할 수도 있다.

 

21세기 우리는 지나치게 빠른 '프레스토(presto, 아주 빠르게)'로 살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젠 '안단테(andante, 느리게)'로 자신의 삶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생명체가 내는 놀라운 화음을 가만히 들어보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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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어제 오봉옥의 시집 <노랑>이 도착했다. 점심을 먹고 나른한 오후와 힘겹게 싸우고 있는 중에 사무실 공간에 택배 아저씨가 부르는 내 이름이 크게 울렸다. 무척이나 가볍게 느껴지는 택배 상자를 뜯어보니 온통 노란 색깔의 시집이 툭 하고 꽃망울을 터트렸다.

마치 우리 집에 막 피어난 노란 개나리를 보는 듯 했다. 어제 퇴근길과 오늘 출근길에 <노랑>을 읽었다. 오봉옥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무엇을 노래하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담고 싶었던 것일까.

오봉옥 시인의 시각적 이미지가 바뀌었다. 시적 이미지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빨강‧검정에서 노랑‧초록으로

Red ‧ Black에서 Yellow‧Green으로

투쟁‧죽음에서 희생‧생명으로

열정‧분노에서 현실관조‧바라보기로

오봉옥 시인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붉은 피 검은 산>으로 알려진 시인이다. 1961년 광주에서 태어나 85년 창작과 비평사 ‘16인 신작시집’으로 문단에 얼굴을 보였다. <붉은 피 검은 산>은 90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른 걸작(?)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최근 <노랑>으로,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십삼 년 만에 다시 시집을 낸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과연 십삼 년 동안 그는 무엇을 했고 강산이 변한 뒤 펴낸 <노랑>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희생과 생명으로 옮겨온 시인의 눈

<노랑>을 먼저 읽어 보자.

노랑

시작은 늘 노랑이다. 물오른 산수유나무 가지를 보라. 겨울잠 자는 세상을 깨우고 싶어 노랑별 쏟아낸다. 말하고 싶어 노랑이다. 천개의 입을 가진 개나리가 봄이 왔다고 재잘재잘, 봄날 병아리 떼 마냥 종알종알, 유치원 아이들 마냥 조잘조잘. 노랑은 노랑으로 끝나니 노랑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 잠든 아이를 내려놓듯이 노랑꽃들을 내려놓는다. 노랑을 받아든 흙덩이는 그제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초록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노랑이 저를 죽여 초록 세상을 만든 것.

내쳐 또 한편의 시를 읽어 본다. <노랑>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초록’이 새삼 가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초록’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초록

어머니는 나에게 야생 초록을 안겨주었다. 눈 뜨면 내 앞을 떠억 가로막는 건 푸른 산이었다. 밤새 식식거리다 이른 아침까지 김나는 초록의 산. 밤에는 푸른 별, 푸른 달빛이 쏟아졌다. 난 동무들과 함께 푸른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세상에, 초록이 이렇게 지겨울 수 있다니! 초록잎새가 언제까지나 초록일 순 없어 마지막으로 한번 발갛게 타올라보듯이 애늙은이가 된 나는 어서 빨리 붉어져야 했으므로 초록을 버렸다. 그러나, 초록이 없는 세상은 불바다뿐이었다.

죽어서도 다시 찾은 건 초록이었다. 눕고 싶은, 뒹굴고 싶은, 나도 따라 물들고 싶은 징글징글한 초록. 여기서 난 또 한 生을 시작해야 한다.

‘노랑이 저를 죽여 초록을 만든다.’는 시구는 해석하기 어렵지 않다. 봄은 노랑으로 시작하지 않는가. 산수유와 개나리가 활짝 피고, 연분홍 진달래가 먼저 꽃망울을 터트린다. 그리고 노랑과 분홍의 꽃망울이 땅에 떨어지고 난 뒤에야 초록 잎이 하나, 둘 돋아난다.

봄이 오는 시간적 의미를 시각적 형상으로 시인은 그리고 있다. 시구만을 두고 보면 따라서 ‘노랑’은 ‘초록’을 만들기 위해 땅에 떨어져 자신을 희생한다. 헌신한다. ‘노랑’의 희생으로 ‘초록’이라는 싱그러운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생명’을 의미하는 ‘초록’의 의미는 무엇이었든가. 시인은 <초록>이란 시를 통해 “애늙은이가 된 나는 어서 빨리 붉어져야 했으므로 초록을 버렸다.”고 회고한다. 아마도 1980년대 그 질곡의 역사에서 ‘초록’에 관심가질 틈 없었던 ‘붉은 기운’의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싶다. 시인은 당시 <붉은 산 검은 피>라는 시집을 통해 ‘분노와 열정, 그리고 투쟁’을 이야기했으니.

그런데 시인은 “초록이 없는 세상은 불바다뿐이었다.”라고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죽어서도 다시 찾은 건 초록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죽어 무덤에 묻히고 초록 ‘떼(흙을 붙여서 뿌리째 떠낸 잔디)’를 덮어쓰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단순한 이미지이다. ‘초록이 없었던 붉은 기운의 시대, 불바다의 시대’를 지나온 시인은 지천명(오봉옥 시인의 나이 올해 마흔아홉)의 나이에 ‘눕고 싶은, 뒹굴고 싶은’ 초록에 다시 서고자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초록>의 시가 ‘어머니는 나에게 야생 초록을 안겨주었다.’라고 시작하는 것도 그런 의미이다.

‘어머니’는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어머니를 통해 다양한 생명이 태어난다. 조물주와도 같은 존재가 ‘어머니’이다. 하나님의 ‘사랑’과도 같은 존재가 ‘어머니’이다. 이런 ‘어머니’와 ‘야생 초록’을 통해 시인은 파릇파릇 기운 넘치는 초록으로, 모든 사물이 왜곡되지 않고 싱싱한 생명체로 우뚝 서기를 기도하고 있다.

시인이 ‘노랑과 초록’을 통해 ‘희생과 생명’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미 싱싱한 생명이 넘치고, 환환 노랑의 웃음과 초록의 싱그러움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굳이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 아직 시인은 ‘희생과 생명’의 시대가 오지 않았기에 ‘기도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다.

<노랑> 시집에는 왜 시인이 ‘기도하는 모습, 희생과 생명의 시대를 그리워하는’지를 보여준다. 몇몇 시를 음미해 본다.

그래, 기계처럼 살아왔으니 고장이 날만도 하지.
이제 와서 닦고 조이고 기름칠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내 몸 곳곳의 나사들은 붉은 눈물을 줄줄 흘릴 뿐이네.(<나를 만지다> 중에서)

오늘도 압류 딱지를 붙이는데 쩡하고 금이 간다
그중 값나가는 건 휠체어 전동차 한 대뿐
쪽방에 누운 노인이 두 손을 내젓다가 만다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도 취해
혼자서 주저리주저리 돌아오는 밤이다(<어느하루>중에서)

직장에서 쫓겨나
초라한 제 얼굴 감추고자 서둘러 돌아서는
마흔 둘 사내의 등허리에서
저를 태우는 노을 한 자락을 보았습니다(<그 노을을 본다>중에서)

잊혀진 늙은 혁명가며
이른 나이에 요절한 작가며
어제의 나를 동여맨 눈붉은 전사들이
장작더미 쌓이듯이 쌓여만 가고 있더구나(<책>중에서)

하지만 세상은 늘 자기 때문에 싸운다
자기가 있으니 남이 있고
남이 있기에 자기도 있는 법인데
자기 밖에 모르니 세상은 싸운다(<이것>중에서)

오봉옥은 투쟁과 분노를 통해 변혁을 꿈꾸었던 시인이다. 1980년대 그 질곡의 역사, 아픈 현실, 그 무뢰 했던 정권, 그런 것들에 저항하고 투쟁하면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인물 중 한명이다. 그런데 세월을 흘러 21세기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세상은 바뀌어있지 않다.

나는 한때는 눈물 많은 짐승이었다

‘기계처럼 살아왔으니 이제 고장이 난’ 나를 발견하고⋯ 쪽방에 불편한 몸을 누이고 있는 가난한 노약자 집에 찾아가 ‘압류 딱지를 붙이는데 쩡하고 금이 가는’ 나⋯ 직장에서 쫓겨난 마흔 둘 사내의 등허리에 지글지글거리는 노을 한 자락⋯ ‘혁명과 변혁을 담은 책’들은 어느새 귀찮은 물건이 되고 혁명가와 젊은 작가들이 죽어나가는 현실⋯ 자기와 남(너와 나)이 존재해야지만, ‘이것’과 ‘저것’이 동시에 존재하고 동시에 존경받을 때 세상은 조용하고 평화로운데 ‘자기 밖에 모르니’ 세상은 싸움이 끊이지 않고⋯ 시인은 냉정한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

현실이 이러한데 시인이 꿈꿨던 ‘변혁과 변화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시인은 ‘노랑과 초록’의 기운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시인은 ‘노랑과 초록’을 통해 현실의 부끄러움과 현실의 초라함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런 현실적 아픔과 고통, 그리고 지난한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혁의 끈은 놓지 않고 있다. 다음의 시를 보면 그런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나가 바위여. 딱 한 번은 굴러야 할 천길 벼랑 위 바위랑께(<오래된 바위>중에서)

오아시스는 어디에 있는가. 난 지금 길 없는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내 무거운 육신은 자구만 모래구덩이에 빠져든다. 오아시스는 어디에 있는가.(<오아시스>중에서)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가슴에 있다.
오늘도 그곳에선 어둑발 내리고
젊은 엄니가 날 부르는 소리 담을 타고 넘는다.(<외로울 때는>중에서)

내 기억의 창고엔 핏줄처럼 뜨거운 것들로 가득하다,(<사진>중에서)

시인은 ‘변혁과 투쟁’의 시기를 지나 ‘희생과 생명’의 시대에 가고 싶어한다. 아직도 기도하고 있지만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시인은 ‘딱 한 번은 굴러야 할 천길 벼랑 위 바위’로 자신을 무장하고, 무거운 육신이 모래구덩이에 빠져들지만 ‘오아시스는 어디에 있는가’라며 갈망한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가슴에 있고 젊은 엄니가 날 부르는 소리를’ 아직 잊지 않고 있고, ‘기억의 창고엔 핏줄처럼 뜨거운 것들로 가득하다’고 자신을 다시 한 번 담금질 한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오봉옥의 <노랑>은 '변혁과 투쟁‘의 시기를 지난 시인이 ‘희생과 생명’을 노래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시인이 ’변혁과 투쟁‘을 통해 바뀌지 않는 현실을 냉정히 관찰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담금질하고 세상의 변화를 위해 자신을 위치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반성문과 각오문‘으로 다가온다.

오봉옥 시인은 <노랑> 시집의 책 서두에 자신이 원고지에 직접 쓴 <달팽이가 사는 법>을 사진으로 찍어 내보였다. 그 의미는 여러 가지로 다가올 것이다. <노랑>이란 시집에 흐르는 모든 정서를 <달팽이가 사는 법>에 함축돼 있다.

달팽이가 사는 법

나는 한때는 눈물 많은 짐승이었다. 이슬 한 방울도 누군가의 눈물인 것 같아 쉬이 핥지 못했다. 하지만 난 햇살이 떠오르면 숨어야만 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어둠 속에 갇혀 홀로 세상을 그려야 하고, 때론 고개를 파묻고 깊숙이 울어야만 한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그런 천형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등에 진 집이 너무도 무겁다. 음지에서, 뒤편에서 몰래몰래 움직이다보면 괜시리 서럽다는 생각이 들고, 괜시리 또 세상에 복수하고 싶어진다. 난 지금 폐허를 만들고 싶어 당신들의 풋풋한 살을 야금야금 베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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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