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과 분홍이 늘 경쟁하듯

마당을 찾아오지만

올해는 분홍 진달래가

노랑 개나리를 앞질렀다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그곳에서 진달래가

분홍의 유혹을 내뿜는다

 

봄은

노랑의 희생으로 초록을 불러들이지만

이 봄,

분홍의 유혹을 먼저 맞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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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달팽이가 초록의 한 가운데로 나아간다
쏟아지던 비를 뚫고
아침 나무에 오른다
어느 시인은 달팽이를 '눈물많은 짐승'이라 했다
무거운 집을 등에 지고 있다 했다
조금씩
조금씩
철쭉나무 잎을 지나는 달팽이의 아침이
무거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눈물많은 짐승이라기 보다는
이슬 머금은 초록을 향해 뚜벅 뚜벅
천천히 걸어가는 각오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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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노랑 개나리가 피었다
하늘을 향해 노랑 물결이 인다
노랑이
푸른 하늘로 솟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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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노랑 개나리가 피었다
하늘을 향해 노랑 물결이 인다
노랑이
푸른 하늘로 솟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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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어제 오봉옥의 시집 <노랑>이 도착했다. 점심을 먹고 나른한 오후와 힘겹게 싸우고 있는 중에 사무실 공간에 택배 아저씨가 부르는 내 이름이 크게 울렸다. 무척이나 가볍게 느껴지는 택배 상자를 뜯어보니 온통 노란 색깔의 시집이 툭 하고 꽃망울을 터트렸다.

마치 우리 집에 막 피어난 노란 개나리를 보는 듯 했다. 어제 퇴근길과 오늘 출근길에 <노랑>을 읽었다. 오봉옥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무엇을 노래하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담고 싶었던 것일까.

오봉옥 시인의 시각적 이미지가 바뀌었다. 시적 이미지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빨강‧검정에서 노랑‧초록으로

Red ‧ Black에서 Yellow‧Green으로

투쟁‧죽음에서 희생‧생명으로

열정‧분노에서 현실관조‧바라보기로

오봉옥 시인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붉은 피 검은 산>으로 알려진 시인이다. 1961년 광주에서 태어나 85년 창작과 비평사 ‘16인 신작시집’으로 문단에 얼굴을 보였다. <붉은 피 검은 산>은 90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른 걸작(?)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최근 <노랑>으로,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십삼 년 만에 다시 시집을 낸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과연 십삼 년 동안 그는 무엇을 했고 강산이 변한 뒤 펴낸 <노랑>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희생과 생명으로 옮겨온 시인의 눈

<노랑>을 먼저 읽어 보자.

노랑

시작은 늘 노랑이다. 물오른 산수유나무 가지를 보라. 겨울잠 자는 세상을 깨우고 싶어 노랑별 쏟아낸다. 말하고 싶어 노랑이다. 천개의 입을 가진 개나리가 봄이 왔다고 재잘재잘, 봄날 병아리 떼 마냥 종알종알, 유치원 아이들 마냥 조잘조잘. 노랑은 노랑으로 끝나니 노랑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 잠든 아이를 내려놓듯이 노랑꽃들을 내려놓는다. 노랑을 받아든 흙덩이는 그제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초록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노랑이 저를 죽여 초록 세상을 만든 것.

내쳐 또 한편의 시를 읽어 본다. <노랑>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초록’이 새삼 가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초록’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초록

어머니는 나에게 야생 초록을 안겨주었다. 눈 뜨면 내 앞을 떠억 가로막는 건 푸른 산이었다. 밤새 식식거리다 이른 아침까지 김나는 초록의 산. 밤에는 푸른 별, 푸른 달빛이 쏟아졌다. 난 동무들과 함께 푸른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세상에, 초록이 이렇게 지겨울 수 있다니! 초록잎새가 언제까지나 초록일 순 없어 마지막으로 한번 발갛게 타올라보듯이 애늙은이가 된 나는 어서 빨리 붉어져야 했으므로 초록을 버렸다. 그러나, 초록이 없는 세상은 불바다뿐이었다.

죽어서도 다시 찾은 건 초록이었다. 눕고 싶은, 뒹굴고 싶은, 나도 따라 물들고 싶은 징글징글한 초록. 여기서 난 또 한 生을 시작해야 한다.

‘노랑이 저를 죽여 초록을 만든다.’는 시구는 해석하기 어렵지 않다. 봄은 노랑으로 시작하지 않는가. 산수유와 개나리가 활짝 피고, 연분홍 진달래가 먼저 꽃망울을 터트린다. 그리고 노랑과 분홍의 꽃망울이 땅에 떨어지고 난 뒤에야 초록 잎이 하나, 둘 돋아난다.

봄이 오는 시간적 의미를 시각적 형상으로 시인은 그리고 있다. 시구만을 두고 보면 따라서 ‘노랑’은 ‘초록’을 만들기 위해 땅에 떨어져 자신을 희생한다. 헌신한다. ‘노랑’의 희생으로 ‘초록’이라는 싱그러운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생명’을 의미하는 ‘초록’의 의미는 무엇이었든가. 시인은 <초록>이란 시를 통해 “애늙은이가 된 나는 어서 빨리 붉어져야 했으므로 초록을 버렸다.”고 회고한다. 아마도 1980년대 그 질곡의 역사에서 ‘초록’에 관심가질 틈 없었던 ‘붉은 기운’의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싶다. 시인은 당시 <붉은 산 검은 피>라는 시집을 통해 ‘분노와 열정, 그리고 투쟁’을 이야기했으니.

그런데 시인은 “초록이 없는 세상은 불바다뿐이었다.”라고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죽어서도 다시 찾은 건 초록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죽어 무덤에 묻히고 초록 ‘떼(흙을 붙여서 뿌리째 떠낸 잔디)’를 덮어쓰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단순한 이미지이다. ‘초록이 없었던 붉은 기운의 시대, 불바다의 시대’를 지나온 시인은 지천명(오봉옥 시인의 나이 올해 마흔아홉)의 나이에 ‘눕고 싶은, 뒹굴고 싶은’ 초록에 다시 서고자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초록>의 시가 ‘어머니는 나에게 야생 초록을 안겨주었다.’라고 시작하는 것도 그런 의미이다.

‘어머니’는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어머니를 통해 다양한 생명이 태어난다. 조물주와도 같은 존재가 ‘어머니’이다. 하나님의 ‘사랑’과도 같은 존재가 ‘어머니’이다. 이런 ‘어머니’와 ‘야생 초록’을 통해 시인은 파릇파릇 기운 넘치는 초록으로, 모든 사물이 왜곡되지 않고 싱싱한 생명체로 우뚝 서기를 기도하고 있다.

시인이 ‘노랑과 초록’을 통해 ‘희생과 생명’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미 싱싱한 생명이 넘치고, 환환 노랑의 웃음과 초록의 싱그러움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굳이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 아직 시인은 ‘희생과 생명’의 시대가 오지 않았기에 ‘기도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다.

<노랑> 시집에는 왜 시인이 ‘기도하는 모습, 희생과 생명의 시대를 그리워하는’지를 보여준다. 몇몇 시를 음미해 본다.

그래, 기계처럼 살아왔으니 고장이 날만도 하지.
이제 와서 닦고 조이고 기름칠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내 몸 곳곳의 나사들은 붉은 눈물을 줄줄 흘릴 뿐이네.(<나를 만지다> 중에서)

오늘도 압류 딱지를 붙이는데 쩡하고 금이 간다
그중 값나가는 건 휠체어 전동차 한 대뿐
쪽방에 누운 노인이 두 손을 내젓다가 만다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도 취해
혼자서 주저리주저리 돌아오는 밤이다(<어느하루>중에서)

직장에서 쫓겨나
초라한 제 얼굴 감추고자 서둘러 돌아서는
마흔 둘 사내의 등허리에서
저를 태우는 노을 한 자락을 보았습니다(<그 노을을 본다>중에서)

잊혀진 늙은 혁명가며
이른 나이에 요절한 작가며
어제의 나를 동여맨 눈붉은 전사들이
장작더미 쌓이듯이 쌓여만 가고 있더구나(<책>중에서)

하지만 세상은 늘 자기 때문에 싸운다
자기가 있으니 남이 있고
남이 있기에 자기도 있는 법인데
자기 밖에 모르니 세상은 싸운다(<이것>중에서)

오봉옥은 투쟁과 분노를 통해 변혁을 꿈꾸었던 시인이다. 1980년대 그 질곡의 역사, 아픈 현실, 그 무뢰 했던 정권, 그런 것들에 저항하고 투쟁하면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인물 중 한명이다. 그런데 세월을 흘러 21세기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세상은 바뀌어있지 않다.

나는 한때는 눈물 많은 짐승이었다

‘기계처럼 살아왔으니 이제 고장이 난’ 나를 발견하고⋯ 쪽방에 불편한 몸을 누이고 있는 가난한 노약자 집에 찾아가 ‘압류 딱지를 붙이는데 쩡하고 금이 가는’ 나⋯ 직장에서 쫓겨난 마흔 둘 사내의 등허리에 지글지글거리는 노을 한 자락⋯ ‘혁명과 변혁을 담은 책’들은 어느새 귀찮은 물건이 되고 혁명가와 젊은 작가들이 죽어나가는 현실⋯ 자기와 남(너와 나)이 존재해야지만, ‘이것’과 ‘저것’이 동시에 존재하고 동시에 존경받을 때 세상은 조용하고 평화로운데 ‘자기 밖에 모르니’ 세상은 싸움이 끊이지 않고⋯ 시인은 냉정한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

현실이 이러한데 시인이 꿈꿨던 ‘변혁과 변화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시인은 ‘노랑과 초록’의 기운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시인은 ‘노랑과 초록’을 통해 현실의 부끄러움과 현실의 초라함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런 현실적 아픔과 고통, 그리고 지난한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혁의 끈은 놓지 않고 있다. 다음의 시를 보면 그런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나가 바위여. 딱 한 번은 굴러야 할 천길 벼랑 위 바위랑께(<오래된 바위>중에서)

오아시스는 어디에 있는가. 난 지금 길 없는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내 무거운 육신은 자구만 모래구덩이에 빠져든다. 오아시스는 어디에 있는가.(<오아시스>중에서)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가슴에 있다.
오늘도 그곳에선 어둑발 내리고
젊은 엄니가 날 부르는 소리 담을 타고 넘는다.(<외로울 때는>중에서)

내 기억의 창고엔 핏줄처럼 뜨거운 것들로 가득하다,(<사진>중에서)

시인은 ‘변혁과 투쟁’의 시기를 지나 ‘희생과 생명’의 시대에 가고 싶어한다. 아직도 기도하고 있지만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시인은 ‘딱 한 번은 굴러야 할 천길 벼랑 위 바위’로 자신을 무장하고, 무거운 육신이 모래구덩이에 빠져들지만 ‘오아시스는 어디에 있는가’라며 갈망한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가슴에 있고 젊은 엄니가 날 부르는 소리를’ 아직 잊지 않고 있고, ‘기억의 창고엔 핏줄처럼 뜨거운 것들로 가득하다’고 자신을 다시 한 번 담금질 한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오봉옥의 <노랑>은 '변혁과 투쟁‘의 시기를 지난 시인이 ‘희생과 생명’을 노래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시인이 ’변혁과 투쟁‘을 통해 바뀌지 않는 현실을 냉정히 관찰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담금질하고 세상의 변화를 위해 자신을 위치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반성문과 각오문‘으로 다가온다.

오봉옥 시인은 <노랑> 시집의 책 서두에 자신이 원고지에 직접 쓴 <달팽이가 사는 법>을 사진으로 찍어 내보였다. 그 의미는 여러 가지로 다가올 것이다. <노랑>이란 시집에 흐르는 모든 정서를 <달팽이가 사는 법>에 함축돼 있다.

달팽이가 사는 법

나는 한때는 눈물 많은 짐승이었다. 이슬 한 방울도 누군가의 눈물인 것 같아 쉬이 핥지 못했다. 하지만 난 햇살이 떠오르면 숨어야만 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어둠 속에 갇혀 홀로 세상을 그려야 하고, 때론 고개를 파묻고 깊숙이 울어야만 한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그런 천형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등에 진 집이 너무도 무겁다. 음지에서, 뒤편에서 몰래몰래 움직이다보면 괜시리 서럽다는 생각이 들고, 괜시리 또 세상에 복수하고 싶어진다. 난 지금 폐허를 만들고 싶어 당신들의 풋풋한 살을 야금야금 베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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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아침 출근길이 무척 맑았다. 어제 일요일, 하늘은 잔뜩 누렇게 뜬 얼굴이었다. 먼 하늘을 바라보는 낭만이 사라진 하늘이었다. ‘파랑’은 사라지고 ‘희뿌연 누런’ 색이 기분 나쁘게 앉아 있었다. 봄의 색깔 ‘노랑’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봄이 성큼 다가왔지만 ‘노랑’의 계절, 봄은 아직 멀었다. 4월의 중간에 서 있지만 계절은 색깔을 잊어버린 것일까. 봄의 계절 ‘노랑’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디고, 그럴수록 ‘노랑’은 아직 저만치 우리들을 애타게 하고 있는 듯하다.

월요일 아침, 맑은 하늘이 기분 좋았다. 회사에 도착해 인터넷을 켰다. 인터넷서점에 접속한다. 봄의 계절 ‘노랑’을 만나기 위해 인터넷서점 사이트에서 ‘오봉옥’을 검색한다. 오봉옥 시인은 최근 시집 <노랑>을 펴냈다.

<노랑>을 주문하고 오봉옥 시인에 대해 이것저것 인터넷에 어떤 정보들이 있는지 알아본다. 무엇보다 그의 시집 <붉은 산 검은 피>가 우선이다. ‘붉은 산 검은 피’라는 검색어를 입력하고 엔터키를 눌렀더니 놀라운 검색결과가 나온다.

‘최신뉴스’ 검색어 결과의 맨 위에는 다음과 같은 뉴스가 나왔다.

'붉은 산 검은 피' 저자(著者)에 징역3년 구형
연합뉴스 | 입력 1990.05.24 17:41

(서울=연합(聯合))서울지검 공안1부 李貴男검사는 24일 시집 '붉은 산 검은 피'를 출판해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제작.판매 혐의로 구속기소된 도서출판 실천문학사 前주간 宋基元씨(42)에 대해 징역2년.자격정지 2년을,이 시집의 저자 吳奉玉씨(28)에 대해서는 징역3년.자격정지3년을 각각 구형했다.
이들은 지난해5월 시집 '붉은 산 검은 피' 1,2권을 각 2천권씩 발간,대학가서점 등에 판매한 혐의로 지난 2월 구속기소됐었다.

1990년 기사가 ‘붉은 산 검은 피’에 대한 최신 뉴스였다. 1990년 5월24일 작성된 이 기사는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1990년에 오봉옥 시인은 진보 시인으로, 세상과 호흡하는 시인으로, 운동하는 양심으로 서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음을 기사는 확인시켜 준다.

스물여덟에 자신이 펴낸 시집으로 옥고를 치르는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검찰이 징역 3년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오 시인에 대해 징역 8월을 선고한다. 집행유예로 풀려나지만 <붉은 산 검은 피>로 송기원 주간과 오 시인 모두, 옥고를 치르는 곤욕을 치렀다.

또 하나 이 기사에서 눈에 띄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단어가 있다.

‘서울지검 공안1부 李貴男 검사는⋯’ 운운되는 부분이다. 이귀남이라고 하면 현재 법무부장관이지 않은가. 혹 동명이인인지, 이귀남 장관의 경력을 검색해 봤더니 ‘1988~1991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나와 있다. 이어 장관에 임명됐을 때 약력을 보면 ‘형사와 공안을 두루 거친’이라는 말이 나오고, 한자 이름도 같은 걸로 봤을 때 1990년대 이귀남 검사는 현재의 이귀남 장관인 것으로 추측된다.

1990년대에서 이젠 2011년을 이야기해 본다.

스물여덟의 시인은 21년이 지난 지금, 마흔아홉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봄의 계절인 <노랑>을 들고 다시 이 세상에 섰다. <붉은 산 검은 피>라는 시를 두고 당시 경찰이 “산이면 푸른 산이지 왜 붉은 산이냐”라고 힐난하면서 ‘대간첩 전시물’에 이 시집을 걸어놓았다는 황당함과 경악의 시대도 지나갔다.

그런 1990년대를 거치 올라 이제 <노랑>의 모습으로 시인은 서 있다. <노랑>이 어떤 시적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지는 얼마 지나지 않으면 내 눈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오봉옥 시인은 이 <노랑> 시집을 이귀남 장관에게 넌지시 한 부 선물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창작물을 두고 징역 3년을 구형했던, 지금은 장관인 그에게 어떤 울림으로 다가올 지 궁금하다.

오봉옥 시인의 <꽃>이란 시를 인용해 본다.

아프다, 나는 쉬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한때는 자랑이었다
풀섶에서 만난 봉오리들을 불러모아
피어봐, 한번 피어봐 하고
아무런 죄도 없이, 상처도 없이 노래를 불렀으니

이제 내가 부른 꽃들
모두 졌다

아프다, 다시는 쉬이 꽃이 되지 않으련다
꽁꽁 얼어붙은
내 몸의 수만 개 이파리들
누가 와서 불러도
죽다가도 살아나는 내 안의 생기가
무섭게 흔들어도
다시는 쉬이 꽃이 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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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