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과 소녀가 있었다. 이 소설은 한 청년과 소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야기 이기도 하다.

과거→특수부대와 개에 대한 폭력

청년의 아버지는 개잡는 사람이다. 매주 근처에 있는 특수부대 군인들이 온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개를 잡는다. 개를 은행나무에 매달고 몽둥이로 내리친다. 아버지는 개를 잡지만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 군인들은 아버지에게 강제로 개고기를 먹이며 낄낄 거린다. 특수부대대장은 앞뒤에 말굽모양의 쇠를 박은 군화를 신고 있다. 청년은 나무에 매달려 있던 개를 잡고 있다 놓친 적이 있다. 개는 사정없이 달려들어 특수부대 대장의 다리를 물어뜯었다. 청년과 아버지는 특수부대 대장의 말굽 박은 군화로 사정없이 맞았다. 개 패듯이.

청년이 사는 옆집에는 소녀가 있다. 소녀의 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한다. 소녀의 아버지는 매일 동사무소를 찾아간다. 악에 받친 듯 소리친다. 옆집에서 개를 잡는데 무허가이고 빨리 철거해야 한다고. 소녀의 아버지는 청년의 아버지를 증오한다.

청년과 소녀는 가끔씩 뒷산을 같이 오른다. 소녀는 ‘눈가의 보랏빛 점’을 가졌다. 어느 날 소녀는 산에 같이 오르면서 청년에게 “죽어버릴 거야!”라고 소리친다. “아버지처럼 나도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대. 유전되는 병이래.”

어느 날, 소녀의 집에 불이 난다. 청년은 달려간다. 소녀를 들쳐 업고 나왔지만 소녀의 아버지가 아직 집에 있다. 청년은 다시 불길을 헤치며 달려간다. 천장이 무너지면서 청년은 정신을 잃고 만다. 청년은 화상으로 얼굴에 끔찍한 상처를 입는다. 정작 더 큰 일은 그 다음날이었다. 옆집에 불을 낸 범인으로 청년이 지목된다. 청년은 경찰서에서 모진 매를 견디지 못하고 범인이 됐고 4년을 복역한다.

현재→사뭇 복잡한 폭력이 시작되다

청년은 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노숙자로 전전한다. 소녀는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 남해안 바닷가에서 노숙하고 있을 때 너무 추워 근처 창고로 숨어든다. 창고는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다. 손바닥으로 내리칠 때 알 수 없는 힘에 자물쇠는 와장창 부서진다. 청년의 손바닥에 말굽이 생긴 것. 흥분할 때마다 말굽이 튀어나온다.

청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몸을 파묻고 머리만 내민 채 잠을 자고 있다. 술 취한 횟집 주인이 비틀거리다 청년의 머리에 걸려 넘어진다. 청년은 횟집 주인에게 죽지 않을 만큼 모지게 맞는다. 그때 청년도 모르게 손이 먼저 그의 머리를 가격했고, 그의 머리에는 말굽 형태의 깊은 상처가 생겼고 즉사한다.

이후 청년은 그곳을 떠나야 함을 깨닫는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청년의 머릿속에는 ‘눈가의 보랏빛 점’이 있는 여자를 떠올린다. 눈을 떴을 때 익숙한 곳에 도착했음을 인식한다. 그곳은 자신의 과거가 있었던 그 자리였다. 지금은 무허가로 개를 잡던 청년의 집도, 앞을 보지 못했던 소녀의 집도 없다. ‘샹그리라’라는 간판의 원룸 건물이 들어 서 있다.

인간 사회 폭력과 살인에 관한 보고서

박범신의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살인을 예고하면서 시작된다.

“이것은, 아마도 살인에 관한 긴 보고서가 될 것이다.”

샹그리라는 5층 건물이다. 5층 펜트하우스에는 근처 명안진사(사회가 포기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곳) 이사장이 산다. 이사장은 샹그리라의 건물주이다. 202호에는 슈퍼마켓을 하는 청년이, 206호에는 화장품 할인매장을 하는 여자가, 505호에는 맹인 안마사가, 502호에는 명안지사를 관리하는 백주사와 김 실장이 살고 있다.

청년은 이사장의 눈에 들어 샹그리라 관리인으로 들어앉는다. 이후 명안진사의 일까지 도맡는다. 명안진사에는 살림을 도맡아 하는 제천댁이 있고 미소보살과 애기보살도 있다. 샹그리라에는 살지 않지만 노 과장이란 사람도 명안진사의 관리인으로 일한다. 명안진사는 강원도 어느 골짜기에 제석궁이란 또 다른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제석궁은 명안진사에서 마저 버림받은, 이제 정말 끝일 수밖에 없는 이들이 업혀서 가는 곳이다.

청년은 남해안 바닷가에서 횟집 주인을 죽이고, 이어 샹그리라 관리인으로 취직하면서 명안진사의 관리인 김 실장, 노 과장, 그리고 끝내 명안진사의 주인이자 샹그리라 건물주인 이사장마저 죽이는 마지막에 이른다.

박범신의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독특한 소재를 가졌다. 손바닥에 말굽이 생기고, 이 말굽은 끝내 폭력을 유발시키고. 그러나 단지 특이한 소재의 이야기일 뿐이라면 허무맹랑한 소재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이 소재는 작가의 탄탄한 전후 사정과 구체적 사건이 결합되면서 현실성 있게 다가온다. 과거의 청년의 집에서 개를 잡고, 청년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던 특수부대 대장이 지금의 명안진사 이사장이라는 사실. 그리고 소녀의 집에 불을 냈던 장본인도 이사장이라는 것.

이사장은 특수부대 대장의 폭력은 이제 개를 잡는 폭력이 아니다. 권력에 기댄 사람 잡는 폭력으로 상승한다. 부대장을 그만두고 사회복지시설을 빙자한, 마지막 영혼까지도 장삿속으로 이용하고, 그것이 현실 문제가 됐을 때는 ‘군화로 짓밟던 폭력’을 지나 ‘아예 숨 쉬지 못하게 묻어 버리는 폭력’으로 까지 상승 진화했다는 것.

폭력은 진화한다. 인간처럼

작가는 이번 소설을 통해 폭력이 진화한다는 곳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폭력은 시작됐고 문명화 되고, 사회가 발전할수록 폭력도 같은 방향성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특수부대 대장이었던 이사장이 신었던 군화의 말굽이 청년의 손바닥으로 전이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청년이 교도소를 거쳐 노숙자가 되고 마침내 다시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왔을 때 505호의 맹인 안마사가, 과거의 소녀였고 ‘눈가의 보랏빛 점’이 있었음 확인한다. 그리고 그 소녀의 이름이 ‘여린’이었음을 소설은 한참 뒤에야 언급한다.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 앞을 보지 못하고 현실을 보지 못하는 여린을 통해 작가는 폭력 뒷면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라도 ‘사랑’이 그곳에 있음을 청년과 소녀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폭력이 가지는 특이한 면을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한 곳으로만 생각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냄일까. 작가의 말을 통해 박범신 작가는 “단순히 자본주의적 폭력성만 전제하고 이 소설을 읽는다면 나로서는 반쪽을 잃어버리는 꼴이 된다”고 지적한 뒤 이 소설에서 다루는 폭력에 대해 이렇게 덧붙인다.

“지금의 문명사회가 갖고 있는 폭력성은 외계에서 온 것도 아니며 우연히 우리가 갖게 된 것도 아니다. 근원으로부터 온 것을, 오늘의 세계구조가 가필해 깊어져가고 있는 중 아닌가. 이 소설에서 다루고 싶었던 폭력성은 그런 의미에서 사뭇 복합적이다.”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읽기에 앞서 독자들에게 주문하고 있지만 꼭 머리에 담아둘 필요는 없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를 읽고 난 뒤의 폭력이 가지는 생각과 판단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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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며칠 전이었다. 깊은 어둠으로 떨어지듯 닿은 국회의사당역은 환한 밝음으로 많은 사람을 맞았다. 9호선은 유독 다른 지하철과 달리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지하철은 긴 터널을 유유히 달렸다. 몇몇 역을 지나고 안내방송에서 '다음 역은 샛강역입니다.'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샛강?'

매번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오늘따라 '샛강'이란 목소리와 단어가 귀를 자극한다.

'그래, 예전 내가 살던 곳에도 샛강이 흘렀지. 여름이면 멱을 감고, 겨울이면 썰매를 타고, 봄이면 온갖 이름 모를 꽃들이 피었지. 여름방학이면 조무래기들이 소를 끌고 나와 꼴을 먹이곤 했지.'

정지용의 <향수>가 떠오른 것도 내 유년 시절 기억 한 귀퉁이에서부터 나왔다. 정지용 시인은 노래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 대는/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의 시는 모두 '과거 시재'를 쓰고 있다. '지즐 대는' '그리워' '줍던 곳' 등등. 우리에게 낯익은 풍경이 스쳐 떠오르지만 이제 그런 곳은 없다는, 진한 향수가 코 끝으로 밀려든다.

생산↔소비의 피폭시대

꽃이 피고, 옛 이야기 지즐대는 '그곳'은 과거의 추억이 돼 버렸다. 많은 도시인들은  주말이면 도시를 빠져나간다. 하루 정도 도시를 벗어난 사람들은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자신을 버리기에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생산과 소비가 삶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생산하지 않고, 소비하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도시화 시대에 우리는 서 있다.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은 도시를 벗어나고 싶지만 끝내 되돌아오는, 도시에서 삶을 마감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담았다.

소설은 쓰레기 처리장인 '꽃섬'이 주무대이다. 그렇고 그런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꽃섬' 오두막 동네는 버려진 각목과 판자, 깔판으로 집을 뚜딱뚜딱 만든다. 구역별로 나눠 쓰레기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재활용품을 모아, 이를 되판다. 그 돈으로 '꽃섬'의 식구들은 하루를 일하고 하루를 먹고 산다.

열넷(하지만 자신은 열여섯이라 말한다)살 '딱부리'도 시장 통에서 행상을 하던 어머니를 따라 이곳에 왔다. 딱부리의 아버지는 새 사람이 되기 위해 군인에 의해 어딘가로 끌려갔다. 이런 내용을 유추해 보면 <낯익은 세상>은 1980년대를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딱부리의 삶은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흘러간다. 그곳에서 아수라 반장(특정 구역을 책임지고 있는 반장)과 어머니가 살림을 합치지만, 딱부리에게 떨어진 것은 '땜통'이라는 ,약간은 부족한 아수라반장의 아들, 동생 한 명 뿐이다.

<낯익은 세상>은 딱부리와 땜통의 성장 소설이자, 생산과 소비의 피폭시대를 담고 있다. 

같은 공간이지만 전혀 다른, 현실↔김서방네  

딱부리와 땜통이 자주 찾아가는 '빼빼 엄마'의 집은 성장하는 소년들의 두 가지 세상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상처 받은, 혹은 세상에서 버려진 개들을 키우는 '빼빼 엄마'는 빙의(영혼이 옮겨 붙는 현상)를 받은 사람이다.

그녀는 언제나 현실과 김 서방네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온갖 쓰레기와 그곳에서 버려진 것을 찾아 재활용하는 현실의 '꽃섬' 사람들과 '꽃섬'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곳에서 살다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김 서방네'의 예전 '꽃섬'은 같은 위치에 있지만 완전히 다른 공간을 보여준다.

딱부리와 땜통은 빼빼엄마의 빙의로 예전의 꽃섬을 본다.

현실의 꽃섬은 파리떼가 우글거리고 덤프트럭이 온갖 허접 쓰레기를 버리면 작업반원들이 구역별로 우르르 떼거지로 몰려 깡통과 옷가지와 종이를 집어 올린다. 그게 현실이고 딱부리의 인생이다.

그러나 쓰레기 장이 들어서기 전의 꽃섬은 그렇지 않았다. <낯익은 세상>의 낯익으면서도 낯선 꽃섬과 만나는 것은 그래서 더욱 가슴을 울린다. 

딱부리와 땜통이 찾아간 예전의 꽃섬, 김 서방네의 꽃섬은 어땠을까. 소설은 이렇게 묘사한다.

"한가운데 숲이 우거지고 나직한 산도 있는 이웃 섬이 보였고 돛을 단 조각배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강변 풀밭에는 송아지를 거느린 어미 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풀꽃이 가득 피어난 강가에는 오리가 날아 앉거나 물장난을 치는 게 보였다."

내가 살던 그 예전의 '샛강'이 있는 마을과 정지용이 노래한 '향수'의 옥천이나, 딱부리와 땜통이 경험한 예전의 '꽃섬'. 과거의 모습이 됐고, 돌이킬 수 없는 현실 앞에 그리움의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다.

낯익음↔낯섦

<낯익은 세상>은 열 넷의 딱부리 눈으로, 딱부리 인생으로 바라본 현실을 그린 소설이다. 황석영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자본주의는 세계의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자본주의를 인정한 셈이다.

<낯익은 세상>은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쉽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그 배경으로는 누구나 경험했을, 혹은 누구나 생각했을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석영 작가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내가 도시 외곽의 쓰레기장에 주목한 것은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의 삶이 끝없이 만들어서 쓰고 버리는 욕망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는 삶의 목적이 되었고 온 세계가 그것을 위하여 모든 역량과 꿈까지도 탕진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풍경은 세계의 여느 도시 외곽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매우 낯익은 세상이다."

작가의 말처럼 <낯익은 세상>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지속적으로 '낯익은 세상'과 만난다.   난지도와 같은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가 없어졌지만 지금도 우리는 쓰고 버리고, 재생하고...쓰고 버리고....또 재생하고. 자본주의의 생산과 소비는 끝없이 이어진다.

황석영 작가의 말처럼 '자본주의는 세계의 운명'이 된 걸까.

최근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 간단한 두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는 세계의 운명'이 아닐 수도 있다. 자본주의를 버리고 떠나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이라 함은 자기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자발적'이란 말에는 자본주의 현실과 싸우겠다는, 혹은 자본주의 현실을 버리겠다는 적극적 의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자본주의가 과연 세계의 운명'이 돼 버렸는지는 좀 더 생각해 볼 일이다.

'가난'이란 말을 보면 더욱 자본주의에 대항한다는 의미가 크다. 생산과 소비에서 풍족한 소비를 꿈꾸는 현대인들과 달리 이들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생산과 소비의 쳇바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기본이기 때문에 '가난'이라는 말 자체는 정반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것은 자본주의와 투쟁한다는 의미로 읽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라는 소설의 박범신 작가의 말이 언뜻 떠오른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이 문명에서 그나마 오래 살려면 인간다운 정서를 가급적 버리는 게 좋다."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해 보면 어떨까. "자본주의에서 그나마 오래 살려면 자본주의 습성을 가급적 버리는 게 좋다"라고.

우리에게 '낯익은 세상'은 과연 무엇일까.

끝없이 생산과 소비라는 쳇바퀴에서 숨 쉴 틈 없이 살아가는 현실인가. 아니면 이제는 잃어버린, 가족과 이웃이 있었고 들꽃과 돛단배가 유유히 거닐던 조금은 가난했지만 소박했던 그런 모습인가.   

두 가지 모두 우리에게 '낯익은 세상'이자 혹은 '낯선 모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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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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