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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25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김용락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돈이 전부이며, 돈이 이 시대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대부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돈에 목숨 걸고,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돈으로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을 죽이고, 나의 보신을 위해 남을 핍박하고, 나의 삶을 위해 다른 사람의 삶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시대! 그런 시대는 지금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누구 하나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인생이 마치 지금의 전형적 삶인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기차소리에 대한 사람들의 의미는 모두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떠나는 설렘’, 또 다른 사람에게는 ‘아련한 추억’, 그런가 하면 ‘힘찬 내일을 향한 각오’ 등등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시인 김용락에 있어 ‘기차소리’는 어떤 의미일까.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아니, 기적소리가 듣고 싶다
가을비에 젖어 다소 처량하게
비극적 음색으로 나를 때리는
그 새벽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방문을 열면 바로 눈앞에 있던
단풍이 비에 젖은 채로 이마에 달라붙는
시골 역전 싸구려 여인숙에서
낡은 카시밀론 이불 밑에 발을 파묻고
밤새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마시던
20대의 어느날 바로 그날 밤
양철 지붕을 쉬지 않고 두들기던 바람
아, 그 바람소리와 빗줄기를 다시 안아보고 싶다
인생에 대하여, 혹은 문학에 대하여
내용조차 불분명하던
거대 담론으로 불을 밝히기라도 할 양이면
다음날의 태양은 얼마나 찬란하게
우리를 축복하던가
그날은 가고 기적을 울리며 낯선 곳을 향해
이미 떠난 기차처럼 청춘은 가고
낯선 플랫폼에 덩그러니 선 나무처럼
빈 들판에 혼자 서서
아아 나는 오늘밤 슬픈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전문)

젊은 시절-아마도 대학시절- 시인은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던 기억을 더듬고 있다. 기차 소리를 듣고 도착한 그곳은 시골 역전 싸구려 여인숙. 여인숙에 들어 앉아 친구들과 혹은 혼자 안주도 없이 쓴 소주를 마시며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이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 등에 대해 이야기를 거침없이 나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싼 여인숙의 지붕으로 비가 떨어지고 양철 지붕에는 빗소리가 우두둑 우두둑 쏟아진다.

소주를 마시며 그 전날 이야기했던 문학이며, 인생이며 수없이 쏟아낸 말이지만 다음날 일어나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술에 취해서 일수도 있고, 가슴으로 정리되기 이전에 수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하지 않는다.

시인은 “다음날의 태양은 얼마나 찬란하게/ 우리를 축복하던가”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떠남과 설렘, 그리고 친구들과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야기 등을 나눈 다음날 태양은 찬란하게 우리를 축복했노라고 시인을 쓰고 있다. 각오와 희망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대학시절, 가까운 변두리로 기차를 타고 MT를 떠나고, MT 자리에서 같은 과 친구들과 이 시대의 고민을 나누던 모습이 떠오른다.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가 있었던 시절이었지 않겠는가. 하지만 시인의 젊은 시절 그 ‘기차소리’는 이제 다르게 다가온다.

시인은 “그날은 가고 기적을 울리며 낯선 곳을 향해/이미 떠난 기차처럼 청춘은 가고/낯선 플랫폼에 덩그러니 선 나무처럼/빈 들판에 혼자 서서”라고 말한다. 혈기어린 청춘시절, 남을 위해 살겠다고, 더불어 사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던 그 다짐과 외침은 사라지고, 청춘도 가고, 낯선 플랫폼에 덩그러니 선 나무같이 시인은 서 있다. 우리들의 모습이다.

민중이 사라진 시대현실

김용락 시집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는 시인이 살아가고자 했던 삶, 그리고 공동체 삶에 대한 고민과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의 이런 삶의 자세는 다른 시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을 피하고 인간을 만나기 위해
나는 비오는 날 팔공산에 올랐다(<시인은 산으로 간다>중에서)

시인은 누구도 오르지 않는 비 오는 날, 굳이 산으로 간다. 그 이유는 “인간을 피하기 위해”라고 말한다. 왜? 시인은 “이웃나라 소련에서/레닌의 목에 밧줄이 감기고”라고 이야기한다. 한 사상이 사라지고, 그것도 허무하게 사라진 것을 빗대고 있다. 그러면서 산으로 간 시인은 “짐승처럼 혼자 웅크리고 앉아 퀄퀄 흐르는 물소리를 듣다가 내려왔다”고 이야기한다.

시인은 공동체 삶,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유지했던 많은 이들이 떠나는 것을 말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다.

무심히 그냥 흘려보내는 평범한 일상에서나
혹은 그 반대의 강고한 운동의 전선에서
잠시나마 정을 나누었던 친구나
존경을 바쳤던 옛 스승들이
돌연히 등을 돌리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나이를 먹는 슬픔>중에서)

시인의 이 같은 자괴감은 <민중>이란 시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최근 민중의 힘으로 청와대 가까이 간
한 운동 망명가가
이제는 민중이란 말이 싫어졌다고 해서 화제이다(<민중>중에서)

예전 ‘민중을 위해, 민중을 향한’ 이라며 뜨겁게 외쳤던 울림은 이제 모두 옛날이 돼 버렸다. 그렇게 민중과 민중의 삶을 외쳤던 한 사람이 청와대로 들어가면서 “이제는 민중이 싫다”라고 말하는 지경이 되었으니. 자신의 보신과 자신의 안락을 위해 ‘타인의 삶’ ‘민중의 삶’은 이제 전혀 쓸모가 없는 외침이 되었으며, 현실이 돼 버렸다고 시인은 한탄하고 있다.

그러니 시인에게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이제 남은 것도 아무 것도 없게 됐다.

바뀐 것은 정녕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어느새 넥타이로 갈아 매고
혁명에 대한 뜨거운 열정 대신
상사의 눈치나 슬금슬금 곁눈질하는
반쯤 소시민이 된 우리들의 모습만 있을 뿐(<망월동에 다시 와서>중에서)

‘민중이란 말이 싫어지는 시대’ ‘상사의 눈치나 슬금슬금 곁눈질 하는 시대’ ‘동지와 스승이 떠나는 시대’⋯과연 이 시대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시인은 이런 시대에 뜨겁게 울었고, 설렘과 변화를 위해 힘차게 요동치던 ‘기차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일까.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김용락 시인은 단촌(경북 의성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시인의 시에는 근처의 지명들이 많이 등장한다. 대구의 팔공산, 현풍의 비슬산, 대구를 지나 경상남도와 경계를 짓는 구지 등등. 내가 태어났던 창녕군과 멀지 않아 친근한 느낌이 든다. 구지에는 우리 고모 두 분이 살고 있기도 하다. 지금 구지는 농공단지로 바뀌어 옛 정취는 온데 간데없지만.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는 시집 표지에는 전우익 선생의 발문이 쓰여 있다. 전우익 선생은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으로 알려진 분이다. 전 선생은 경북 봉화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실천하는 분이다.

나는 2000년 도시생활을 접고 경기도 여주, 시골 땅으로 이사했다. 전우익 선생의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을 그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책에서 전우익 선생이 말한 ‘마당’에 대한 기억이 남는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구절이었던 것 같다.

“봄이 오면 마당에는 민들레가 곳곳에서 피어난다. 민들레가 노란 꽃을 피우면 마당 곳곳이 노란 물결로 넘실거린다. 나는 민들레는 하나도 뽑지 않고 그냥 그대로 놓아둔다. 저도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지만 그 나름의 존재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이름 모를 꽃 한 송이에 조차 ‘생명의 의미’를 던지는 전우익 선생일진대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 시대, 우리는 어쩌면 ‘남의 삶’을 민들레만큼도 못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이익과 나의 삶과 나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시대에 우리는 서 있지는 않은지. 김용락 시인의 시와 전우익 선생의 책에서는 이런 시대에 대한 참혹한 비판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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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