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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19 소설과 철학 사이에서 마음 고생하다⋯돈 드릴로의 <마오II>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미를 위해, 폭넓은 세상을 알기 위해, 작가의 문체가 좋아서, 해당 작가의 작품이 마음에 들어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철학적 메시지를 찾기 위해?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아니면 앞서 언급한 모든 이유가 소설을 읽는 목적이자 이유일 수 있다.

돈 드릴로(Don DeLillo)의 <마오II>를 읽으면서 내내 이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마오II>는 읽기에 아주 속상한(?) 소설이었다. 소설이란 얼개는 간단하다. 사건이 있고, 인물이 있고, 갈등이 있고, 긴박한 전개가 있고, 독특한 캐릭터가 있고......읽기에 쉽고 울림이 큰 소설이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마오II>는 읽는 내내 철학책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끝까지 읽는 내 인내심이 스스로 자랑스럽다고 해도 좋을 만큼, 소설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로로 나를 자꾸 밀어넣었다. 앞 사건의 전개와 뒷 사건의 전개가 이어지지 않고, 인물과 인물들이 쏟아내는 말의 의미가 모호하고, 말들이 스물스물 기어다니면서 여기저기 도망다니고 있는 느낌.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 소설을 썼을까’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옮긴이의 해설을 읽고서야 ‘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소설을 읽고 이해가 되지 않아 해설을 보고서야 어느 정도 이해가되다니...<마오II>는 나에게 그런 소설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의 느낌

<마오II>에는 등장인물이 확연하게 구분된다.

통일교도이면서 집단 결혼식에 참석한 캐런, 그녀는 통일교의 교리에 실증을 느끼고 그곳에서 탈출한다. 캐런의 통일교 탈출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녀(캐런)는 마음속 깊이 총재님(문선명)을 믿었으며, 아직도 스스로를 광대한 진실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구도자로 여겼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것들, 예컨대 부모의 생일, 바밑의 깔개, 그리고 지퍼 달린 침낭에서 자지 않아도 되는 밤들을 그리워했다. 그녀는 자신이 엄격하고 단조로운 형태의 통일교회 신앙에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캐런은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린 한 인간이었다. 통일교에서 벗어나 스콧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려 하지만 잃어버린 영혼은 그녀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스콧은 은둔해 있는 작가 그레이 빌의 조수이다. 그레이 빌의 잔심부름과 모든 잡일을 하면서 은둔하고 있는 빌을 지근거리에서 돌봐준다.

그레이 빌은 대중과 미디어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해설에서 보면 그레이 빌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쎌린저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작가가 있다면 분명 출판사 인물이 엮어 있기 마련.

출판사를 운영하는 찰리. 찰리는 대중 미디어의 속성을 잘 알고 있고 이를 적극 이용하고자 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은둔하는 작가나, 젊은 혁명가들의 사진을 찍는 브리타가 등장한다. 그녀는 작가들의 사진을 전문적으로 촬영하는 또 다른 ‘작가’로 등장한다. 브리타가 차지하는 분량이 상당히 많다는 점에서 돈 드릴로가 ‘사진작가’에 매력을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레이 빌이 생각하는 작가는 어떤 것일까. 그의 말을 빌어보면 그가 생각하는 작가의 역할은 명확해 진다.

“내가 왜 소설의 가치를 믿는지 아시오? 그건 소설이 민주적 함성이기 때문이지. 누구나 위대한 소설, 하나 정도의 위대한 소설을 쓸 수가 있소. 길거리의 아무추어라도 말이오. 난 이걸 믿소, 죠지. 이름 없는 막노동꾼이나 꿈도 하나 키우지 못한 무법자라도 앉아서 자기 목소리를 찾을 수가 있고 운이 좋으면 소설을 쓸 수도 있는 거지.”

그레이 빌에게 소설은 ‘민주적 함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그는 왜 대중과 미디어에 나타나지 않고 은둔자의 길을 걷고 있을까. 이 물음은 <마오II>의 핵심 주제와 맞닿아 있다. 소설 속 그레이 빌의 말을 계속 인용해 보자.

“당신이 제기해야 할 질문은 바로 이거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문화혁명 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대약진 운동 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그가 얼마나 잘 감추었는가? 이건 좀 다른 질문이군. 그 사람들은 그들이 죽인 수백만의 사람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지?”

그레이 빌은 집단주의와 대중, 거대한 미디어가 만들어 내는 ‘인위적인 도덕’에 반기를 들고 있는 셈이다. 그레이 빌에게 있어 소설은 ‘민주적 함성’이다. 그러나 그러한 ‘민주적 함성’이 집단과 거대 미디어에 노출되는 순간, 그것은 ‘민주적 함성’이 아니라 ‘수백만을 죽이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지적을 그레이 빌은 하고 있는 것이다.

돈 드릴로가 <마오II>를 통해 이런 거대 집단주의와 미디어 산업이 가져오는 폐해, 그 속에서 죽어가는 개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번역의 문제, 아! 정말 어렵다

<마오II>는 경희대 영어학부 유정완 교수가 옮겼다. 유 교수는 ‘옮긴이의 말’에서 “드릴로의 문체는 영화 서사적 기법이나 추상표현주의적 기법으로 인해 영어 원문으로도 읽기가 쉽지 않고 의미가 불분명한 부분이 많다”면서 “역자의 공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역이 없지는 않겠지만...”이라고 토로했다.

아! 그러니까 옮긴이의 이 말은 돈 드릴로의 책은 영어 원문으로도 읽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러할진대 하물며 이를 한글로 번역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번역하는 이에게는 아마도 두 가지 측면이 기본적으로 고려될 것이다.

하나는 가능한 텍스트(영어 원문)를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옮기는 것, 둘째는 번역했을 때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약간은 번역되는 말(여기서는 한국어)로 되풀어 번역하는 것. 이 두 가지가 고려 대상이자 어려운 난제일 것이다.

<마오II>를 읽으면서 번역자는 첫 번째 고려대상, 그러니까 영어 텍스트를 최대한 손상시키지 않고 그대로 옮기는 것에 주안점을 뒀다는 판단이 들었다. 한글로 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글로 읽기가 어려운 하나의 이유이지 않을까.

가령 이런 대목 같은 말들이 무척 많이 나온다. 우리는 보통 누구를 만날 때 옷차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충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A: "너, 옷차림이 그게 뭐냐? 이런 모임에는 그래도 조금 멋도 내고, 그래야지 그 헐렁헐렁한 재킷에다 청바지 입고? 참내! 그런 옷차림으로 이런 모임에 나올 생각을 하다니, 너도 참 대단하다!“

B: "뭐가 어때서 그래? 옷이란 자기가 편하면 되는 거야!“

그런데 <마오II>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자네가 내 재킷을 모욕하지 않았나?”

세상에! 재킷을 모욕한다는 표현?! 나에게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재킷이 모욕을 당하다니? 곳곳에 이런 방식의 번역이 나오면서 문화 충돌에 휩싸였다. 입과 귀에 착착 달라붙지 못하고 도대체 이런 번역을 한 이유가 있을까. 왜 굳이 이렇게 번역했을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마오II>는 첫 시작에서 전개되는 통일교의 집단 결혼식, 마오이즘과 호메이니즘이 불러오는 집단주의의 문제, 거대 자본시장에서의 미디어 속성, 그리고 영혼을 잃어버린 한 개인의 고단한 삶, 이런 이야기가 입체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마침내 덮었을 때의 느낌은 무거우면서 가벼웠다. 무거운 것은 ‘아!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고, 가벼운 것은 ‘아! 어쨌든 마침내 다 읽었으니 빨리 안 보이는 곳에 숨기자’는 생각이었다.

<마오II>는 장르 면에서 소설에 분류되기 보다는 철학 쪽으로 분류돼야 하지 않을까.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을 기회가 생긴다면-아! 지금으로서는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은 절대 들지 않는다-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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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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