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2.05.28 통영과 홍콩 간(間)에서 만난 건축학개론 (1)

아픈 두 사람이 홍콩에서 만났다.

 

윤대녕의 <통영-홍콩 간>을 읽다보면 최근 영화 <건축학개론>이 떠오른다. 첫 사랑은 아무 것도 없는 하얀 종이위에 두 사람의 흔적과 추억을 채워 넣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에게 하얀 종이를 절대 제공하지 않는다. 방해꾼들이 있기 마련이다.

 

<건축학개론>에서처럼 두 사람의 애틋한 첫 사랑을 방해하는-의도했든 그렇지 않든-사건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뒤 다시 그 사랑을 찾아 방황하는, 혹은 확인하고 싶어 하는 감정. 그것이 첫 사랑이 던져주는 메시지일 것이다.

 

윤대녕의 단편 <통영-홍콩 간>은 아픈 두 사람이 홍콩에서 만났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여기에 ‘아픈 남자와 아픈 여자가 홍콩에서 만났다’로 해 버리면 이 단편은 ‘러브 스토리’로 바뀌게 된다. 더 나아가 ‘아픈 남자와 여자가 홍콩에서 만나 헤어졌다가 통영에서 다시 만난다’로 하면 이 단편은 만만치 않은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암시한다.

 

백(白)이 홍콩으로 간 까닭은

 

백(白)은 대기업 홍보실에서 근무했다. 서른다섯 살에 거래처 중견간부인 다섯 살 연상의 여자와 사귄다. 이 연상의 여자는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이 지나치다. 그런 그녀와 관계는 ‘주말엔 대학로에 나가 영화를 보고, 삼청동 한옥을 개조한 맥주 집에서 맥주도 마시고’라는 白의 생각과 절대 같을 수가 없다.

 

 

 

白의 이런 말에 연상의 여자는 ‘우리가 지금 대학생이야?’라는 말로 비아냥거린다. 더 이상 연애라는 감정으로 묶이기에는 생각의 차이가 너무 크다. 그러면서 이 연상의 여자는 白에게 “그렇게 낭만적인 사고에 젖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라고 충고까지 한다. 여기까지는 참을 만하다. 그런데 연상 여인의 그 다음 말, “그리고 그건 강북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라는 끝말에 白은 그녀가 불행하게 보인다.

 

그렇게 헤어졌고 두 번째 만난 여인은 같은 회사 디자인 파트에서 일하는 동갑내기 여자. 광화문을 좋아했던 두 사람은 광화문에서 만나 맥주도 마시고, “1년만 만나고 헤어지자”는 쿨(Cool)한 그녀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고, 그들은 재밌는 연애를 시작한다.

 

그렇게 1년이 다 돼 가던 어느 날, 그녀는 “이제 헤어지자”고 白에게 통보한다. 이어 그녀로부터 들려오는 말 “저는 이미 결혼을 해본 경험이 있어요. 지난 일 년 동안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아시겠죠?” 그녀는 얼마 뒤 역시 이혼 경험이 있는 변호사와 결혼하고 회사를 그만둔다.

 

白이 홍콩을 찾은 까닭은 ‘그녀’들을 잊기 위한 나름의 방편이다.

 

숙(淑)이 홍콩에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제 淑의 사연을 따라가 볼 차례이다. 淑은 홍콩에 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갈 수밖에 없었다. 淑은 서른다섯의 나이에 늦은 결혼을 했고 신혼여행을 온 것이다. 淑은 당시 중학교에서 생물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중매로 시청에 근무하는 남자를 만나 두 달 만에 결혼한다.

 

淑에게는 잊히지 않는 아픈 기억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그녀는 외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무엇보다 이 사실을 엄마에게 알렸을 때 어머니는 淑을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를 받게 하고 치료를 시킨 뒤, 다음 날 백화점에서 옷을 몇 벌 사주고는 淑이 입을 다물도록 만들었다. 이런 경험으로 淑은 가까운 사람을 포함한 타인에게 그 어떠한 믿음도 갖지 못하게 됐다.

 

두 달 만에 결혼이란 선택을 했지만, 식까지 올렸지만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淑은 필사적으로 말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제 남편이 된 그에게 “저, 아주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 결혼 취소하면 안 될까요?”라고 말한다.

 

뜬금없고 황당한, 아내가 된 淑의 말에 남편은 침착하다. 남편은 “여기까지 와서 여러모로 곤란하지 않습니까? 부부는 말을 하는데 있어 극구 조심해야겠습니다. 구사일언까지는 아니더라도 삼사일언은 습관이 돼야지요”라며 훈계조의 말을 한다.

 

남편에게 있어 淑은 이제 아내이자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존재가 됐음을 암시하는 어투이다. 아니나 다를까. 홍콩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淑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마치 淑으로부터 느낀 수치심을 완전 되갚아주겠다는 각오를 다진 듯.

 

강제로 유린당한 뒤 淑은 남편에게 자신이 중학교 2학년 때 성폭행 당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준다. 그것은 고백도 아니고, 용서를 비는 것도 아닌. 남편에게 던지는 최후통첩이었다. 남편은 곧바로 떠났고, 淑은 그렇게 홍콩에 올 수밖에 없었고 이제 홀로 홍콩에 남겨지게 됐다.

 

白淑의 만남

 

‘홍콩을 찾은’ 白과 ‘홍콩을 갈 수밖에 없었던’ 淑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홍콩이 어떤 나라인가. 수많은 관광객과 발 디딜 틈 없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헤매는 곳이 홍콩 아닌가. 쇼핑 중심가와 좁은 호텔 방, 그리고 배를 타고 건너는 잠시의 낭만. 전 세계 관광객들이 쇼핑을 위해 찾는 도시.

 

그런 악조건에서 이들 둘은 우연히 만난다. ‘홍콩’을 계기로.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아픔을 잊기 위해’ ‘아픔을 공유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렇게 홍콩에서 극적인 만남을 가진 白淑은 서울로 돌아와 일 년을 함께 살았다. 아이가 생겼지만 3개월 만에 유산을 하고 만다.

 

그즈음, 白에게 또 다른 운명이 찾아오고 있었다. 白의 집안에는 치명적인 가족력이 있었다. 유전에 속하는 피할 수 없는 병으로 오십 대에 간경화나 간암으로 이른 죽음을 맞이한 것. 白에게 그 운명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

 

白은 휴직을 하고 집에서 요양하는 동안 淑의 인생을 좀먹고 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린다. 남은 선택은 하나 뿐. 白은 “나는 이 집에서 그만 나가야겠어. 그동안 몸이 닳도록 생각했으니 받아들여줬으면 해. 당신 때문이 아니라 내가 더 이상 나를 못 견디겠어”라는 이별을 통보하는 것.

 

“어디로 가려구요?”라는 淑의 질문에 白은 “꽃이 가장 일찍 피는 곳으로 내려갔다가 개화지점을 따라 천천히 올라오려고”라고 말한다. 다소 낭만적인 白의 말에 淑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 집으로 돌아오세요”라고 말한다.

 

淑은 白을 기다렸지만 白은 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가지 못한 것. 淑은 학교에 사표를 내고 통영으로 내려간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6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白이 통영의 淑을 필연적으로 찾았고, 그곳에서 ‘통영이 홍콩과 닮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6년만의 짧은 통영에서의 만남을 가진 뒤 白은 다시 홍콩으로 떠난다. 그것도 역시 예전처럼 잊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까. 淑과 예전에 거닐었던 곳을 똑같은 코스로 밟은 뒤 잊혀보고자 한 것.

 

그곳에서 白은 淑에게 가끔씩 메시지와 메일을 전하지만 淑에게서는 답장이 거의 없다. 淑과 추억이 서린 곳으로, 거의 마무리할 때쯤 淑에게서 간절한 메시지가 도착한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오세요. 통영에서 기다릴게요.”

 

<통영-홍콩 간>은 白과 淑의 아픔을 치유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건축학개론>이 첫 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하얀 종이 위의 여백을 생각나게 한다면 <통영-홍콩 간>은 진한 국물 맛을 느끼게 하는 백숙(白熟)을 떠올리게 한다. 白熟은 고기나 생선 따위를 양념하지 않고 맑은 물에 푹 삶아 익힌 것을 말한다.

 

白과 淑만이 들어간, 그들만이 맑은 물에 푹 삶아 익어가는 사랑, <통영-홍콩 간>이 풀어나가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