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부는 기차

600 小說 2012.06.27 18:27

기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에 바람이 인다.

문이 열리고 바람이 탄다. 

떠나는 기차 뒤로 타지 못한 바람이 출렁인다.

바람은 늘 불고 지친 영혼의 쉼터가 플랫폼을 적신다.

이 기차는 영혼을 실은 바람을 태우고 또는 남겨두고 떠나는 도시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실종된 善과 惡

600 小說 2012.05.27 09:23

善이 외친다

“믿으십시오.”

惡이 외친다

“구원받습니다.”

善이 惡을 쓴다

“조용히 하십시오.”

惡이 善에게 말한다.

“시끄럽습니다.”

너는 나에게 이익에 되는 사람이다

너는 善이다

너는 나에게 손해가 되는 사람이다

너는 惡이다

善이 惡에게 속삭인다

너는 나에게 필요하다

너는 善이다

惡이 善에게 분노한다

너는 나에게 의미 없는 존재이다

너는 惡이다

지하철에서

善과 惡이 실종된 날

하늘엔 검은 눈이 내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절뚝이며 그는 크리스마스카드를 건넸다. 일일이, 하나하나. 모든 사람에게 정성스럽게 내려놓았다. 지하철은 원을 그리며 계속 돌았다. 그의 등에 달팽이가 붙어 있다. 달팽이는 집을 등에 지고 끝없이 기어오른다. 문이 열리고, 사람과 사람이 타고 내리는 사이, 빈자리에, 덩그렇게, 남겨진 크리스마스카드. 지하철은 거꾸로 다시 돌았다. 그의 가슴에 연어가 헤엄친다. 연어는 집을 찾아 떠난다. 둥근 원을 그리는, 거꾸로 도는 지하철. 크리스마스카드를 되돌려 주는 사람들.

“행복하세요. 저도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달팽이와 연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의 터널 속에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누나의 무덤

600 小說 2012.05.10 08:17

어릴 적, 명절

도시로 나간 누나는

손에 선물 꾸러미 들고 고향집 찾았다

조무래기 시절, 1년에 한두 번

찾아오는 누나는

선물 전달자였다

사람은 도시로 가야 한다

그때,

누나의 손

보지 못했다

그때,

깊고 우울한 눈동자

보이지 않았다

사람은 도시로 나가야 한다

한강을 가로 지르는 지하철

깊고 우울한 눈동자

거칠어진 손

푸른 물결 위로 비친다

사람은 도시로 나갔다

깊은 늪 속에

빠져 있는 누나

누런 잔디 아래

숨을 멈춘 누나

도시로 간 나는

누나의 무덤을 기억한다

누나 옆자리

내 무덤 만들어진다

 

-삼성반도체 노동자 고(故) 이윤정씨를 추모하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할머니의 더덕

600 小說 2012.05.08 19:31

앞만 보고 걸어가는 좀비

냄새를 좇아

두 손 뻗은 좀비를 떠올리면 안 된다

한 쪽 얼굴 썩어 문드러진 좀비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도시 좀비는 반듯하다.

말쑥한 향수 뿌렸다

이른 아침,

하얀 속살 냄새 풍겨오면

덜커덩 지하 깊은 관 열리면

시작되는 좀비 행진

앞서가는 좀비 뒤통수만 보며

하얀 냄새 솟아나는 곳으로

지하에서 지상으로

늦은 저녁,

지친 입김 쏟아내고

덜커덩 지하 깊은 관으로

시작되는 좀비 행진

흐느적거리는 좀비 따라

하얀 냄새 기어오르는

지상에서 지하로

냄새를 파는 노파,

노파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연결되는

모서리에

푸른 삼베옷 펼쳐놓고

누런 더덕 일기 칼로 긁고 있다

일기 새길 때마다

하얀 살 돋아나고 향기 솟는다

깊은 관 속에서 나온 좀비들

향기를 찾지만

노파의 일기를 보지 못하고

지상으로

지하로

떼 지어 춤을 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색의 추억

600 小說 2012.05.07 16:31

색의 추억

 

분홍 옷을 입은 그녀에게서

진달래를 본다

고조곤히 앉아

불어오는 바람에

오른쪽, 왼쪽으로

가벼운 몸짓으로 흔들린다

 

노랑 옷으로 물들인 아이에게서

개나리를 키운다

싱그럽게 서서

바라보는 시선에

일어섰다, 앉았다

신나는 손짓을 보낸다

 

하얀 옷 백발의 노인에게서

목련이 움텄다

따스한 춘곤증에

쏟아지는 햇살로

감았다 떴다, 살짝 살짝

부드러운 고갯짓을 살랑인다

 

진달래는 계절에 피어나지 않았다

개나리는 봄에 피어나지 않았다

목련이 태어난 곳은 나무가 아니다

 

분홍은 노랑을 안았다

목련은 일찍 피었다

목련이 지고

분홍과 노랑이 저물면

초록이 물든다

 

그녀와 아이와 노인이

살아가는 곳은 봄이 아니다

꽃이 된 도시, 지하철에서

그들의 고향

색의 추억 속으로 달려간다

진달래와 개나리와 목련은

추억 속에서 피어났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기자: “전화한 사실이 있습니까?”

나경원: “기소 청탁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기자: “그게 아니라, 김재호 판사가 검사에게 전화를 한 사실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나경원: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기소 청탁을 한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질문과 답변이 어긋날 때 기자들은 답답하다. 이런 모습은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가 검찰 청사에 들어올 때 포토라인에 대기하고 있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그런 사실이 있습니까?” “혐의를 인정하십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피의자들은 “국민이 더 잘 알 겁니다.” “역사가 말해줄 겁니다.”


질문과 답변이 어긋나는 시대는 우리나라 현대 범죄사를 말해주는 ‘대표 아이콘’이 돼 버렸다. 초등학생이면 이해하고도 남을 질문에 ‘국민과 역사’로 답하는 이들을 두고 기자들은 행간을 읽으면서 기사를 쓸 수밖에 없다.


질문과 답변이 어긋나는 사이…또 한 명의 검사가 자리를 떠났다. 그는 ‘전화를 받은 검사’였다. 질문과 답변이 어긋나는 사이…조용히 짐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그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질문과 답변이 어긋나는 사이…그가 떠났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지난 주 토요일 아내가 운영하는 미술학원에서 도자기 바자회를 했다. 아내는 핸드페인팅 도자기를 직접 구워 판매하는 일을 겸하고 있다. 초등학교 2~4학년 여섯 명이 '도우미'를 자청했다. 그들 중에는 초등학교 3학년 우리 아들도 포함돼 있었다. 미리 전단지를 배포하고, 학원생 부모들에게 메시지를 준 상태였지만 많은 사람이 올 지, 의문이었다.

다행히 적지 않은 학부모들이 바자회에 다녀갔고 아내는 도자기를 판매해 일정정도의 수익을 남길 수 있었다. 수익 전액은 근처 사회봉사단체에 기부했다. 아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4시까지 귀여움을 떨면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즐겁게 했다. 그리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일기를 썼다. 일기는 아직까지 엄마에게 확인(?)을 받는다. 확인받는다는 것을 염두에 둔 아들의 일기는 간곡했다. 절절한 마음이 확인받는 이(아내)에게 충분히 전달될 만큼.



"제목: 도자기 바자회

오늘 도자기 바자회를 했다.
우리 엄마 학원에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구경도 하고 사기도 했다.
엄마가 돈을 많이 벌었다.
엄마는 많은 돈이 있으면서 
아직 용돈을 않좄다(안줬다.)
그래도
난 엄마가 용돈을 준다고 믿는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타이거 우즈, 지난해 총 수입 720억!"

서울역 한 노숙자가 들고 있는 신문에 대문짝만한 글자가 보였다. 시간은 밤을 지나 새벽으로 치달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읽었다. 이윽고 신문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볼펜을 꺼냈다. 천천히 그는 계산을 해 나갔다. '타이거 우즈' 라는 글자 아래로 빽빽한 숫자의 나열이 시작됐다.

720억÷12=60억, 60억÷30=2억, 2억÷24=833만, 833만÷60=13만.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계산한 노숙자는 혼잣말로 "1년에 720억 원이니까 한 달에 60억 원이고, 한 달에 60억 원이니까 하루에 2억 원이고, 하루에 2억 원이니까 한 시간에 833만 원이고, 한 시간에 833만이니까 1분에 13만원을 버네!"

그는 오늘 오래간만에 일터로 나갔다. 공사 현장에서 지저분한 쓰레기를 치우는 단순한 일이었다. 새벽 6시에 일을 시작해 저녁 8시에 일이 끝났다. 일을 끝내자 자신을 데려왔던 십장은 그에게 6만원을 건넸다. 그는 다시 계산을 시작했다.

6만÷14=4천285원, 4천285÷60=71원.

차가운 밤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그는 또 다시 신문을 뒤적였다. 이번엔 "애플, 2012년 1분기 순이익 14조 기록!"이라는 기사가 보였다. 그는 다시 볼펜에 침을 묻히고 계산을 시작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뾰족한 보도블록이 톡 튀어 나와 있었던 것을 그는 보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강남역 지하차도에서 벗어나자마자 튀어나온 블록에 발이 걸렸고 두 팔과 발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는 꼬꾸라졌다. 넘어지는 순간 그는 주변을 먼저 살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 꼬마가 곁에 있던 할머니에게 물었다. 아이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는 모양새였다.

“할머니! 저렇게 멋있는 아저씨도 넘어지네?”

그는 남색 양복을 잘 차려입었고 금방 닦았는지 구두도 반질잔빌 윤이 났다. 꼬마의 물음에 할머니는 긴 말을 이어갔다.

“아이든 어른이든, 잘 입었든 아니든, 남자든 여자든, 돈이 많든 적든, 두 팔을 휘저으며 걷든 주머니에 찔러 넣고 걷든, 큰 자동차를 타고 가든 작은 자동차를 타고 가든, 구두를 신었든 슬리퍼를 신었든, 양복을 입었든 추리닝을 입었든, 뛰어가든 천천히 걸어가든, 학교에 가든 회사에 가든, 자기가 잘 났다고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사장이든 회사원이든, 집이 있든 없든…넘어지기는 매 마찬가지란다.”

아이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누군가의 손을 이렇게 꼭 잡고 있어야 한단다.”

※안드로이드마켓에서 '600 소설'을 검색해 보세요. 지금까지 쓴 '600자 소설'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