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책장을 정리했다. 대학시절부터 읽었던 책들이, 손때 묻은 도서들이 어떤 것은 먼지를 뽀얗게 덮어쓴 채 놓여 있었다. 서재를 만들기 위해 방 하나를 깨끗이 치우고 그곳에 책장과 책들을 다시 정리했다.

몇 십 년 동안 손에 잡히지 않은 책도 있었고, 어떤 책은 여러 번 읽어 너들너들한 것도 있었다.

아내가 책을 빼면서 한마디 한다.

“좀 버리자! 읽지도 않는 책을 뭐 하러 이렇게 쌓아놓고 있냐? 공간도 비좁고, 쓸데없는 책은 버리는 게 낫잖아?”

대학 때부터 모아온 책이니 그 양이 만만치 않았다. 아내의 이 말을 들으면서 나도 한마디 한다.

“버리자고? 쓸데없다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어떤 책도 한 줄에 의미가 있다면 다 필요한 책이야. 몇 천 페이지 중에서 나에게 감동을 주고, 의미가 있는 한 줄을 발견한다면 그 책은 소중하다는 거지.”

나의 이 말에 아내는 할 말을 잃었고, 혹은 ‘건드려봐야 씨도 안 먹힌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더 이상 반응이 없다. 그렇게 책장을 정리하면서 이 책, 저 책의 제목도 다시 보고 혹은 펼쳐 당시 내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 되짚어 볼 수 있었다. 그 중에 한 책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마음의 미로를 걷고 있는 이들에게

책을 넘기자마자 이런 글과 마주쳤다.

“이 책을 모든 여행자에게 바친다. 이국의 거리를 걷거나, 길고 긴 인생을 걷거나, 마음의 미로를 걷고 있는 이들에게.”

김형경의 <사람풍경>의 시작 글이다.

현대 사회를 두고 ‘스트레스 사회’라고 규정짓는 이들이 많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현대인들은 자의든 타의든 스트레스를 안고 산다. 팍팍한 현실에서 나를 찾는 여유의 시간은 없어지고, 끊임없이 누군가에 의해 지시받고 압박받는 사회.

현대인들은 ‘미로’를 걷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속 앞으로 걷고 있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보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끝도 없이 맴도는 시간과의 싸움. 진정 ‘내가 존재하는 것인가’ 스스로 묻고 싶은 경험들이 있다.

김형경 작가는 이런 현대인들에게 심리 에세이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인간의 복잡한 감정에서부터 타인과 관계 맺기의 즐거움과 스트레스, 그리고 내면에 숨겨져 있는 무의식의 세계까지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동시대인과 이야기하고 있다.

그 중에 나의 시선을 끈 한 줄의 텍스트가 있었다. 그대로 옮겨본다.

“심리학 용어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의 5단계’라는 것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뒤에 남은 사람이 겪는 감정 상태를 말하는데 ‘분노→부정→타협→우울→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세상을 뜬 배우자나 떠난 연인에 대해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이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느냐?“는 분노의 감정이다. 그 다음에는 떠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채 환상 속에서 그를 잡고 있는 부정의 단계, 그 다음에는 그 상실감을 간신히 인정하고 텅 빈 듯한 현실과 타협하는 단계, 그 다음에는 자신의 슬픔을 애도하는 우울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 모든 사실을 수용하고 넘어서는 단계를 말한다.”

이 텍스트를 아내에게 그대로 읽어 줬다.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없이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람풍경>에는 이외에도 자기애, 나르시시즘, 우울 등에 대한 심리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미로를 걷고 있다고 느끼는, 이 가을에 문득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가을 풍경 속으로 걷기 전에 <사람풍경>을 읽어보면 어떨까. 그 속에는 다양한 감정의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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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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