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뛰며 세상과 만난다. 다친다. 그럴 수도 있지


                                                                   


아이는 파닥파닥 물위를 튀어 오르는 물고기와 같다. 늘 뛰어 다닌다. 공기 속에서 펄쩍펄쩍 날아다닌다. 아이들에게 세상의 모든 곳은 뛰어다니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공간이다. 아이는 먼저 뛰어가고 누군가 뒤를 쫓는다. 뛰어가는 아이도 웃고 쫓아오는 아이들도 웃는다. 까르르…까르르…웃음소리가 세상을 뒤흔든다. 그렇게 아이는 늘 뛰어 다니고 쫓아다니면서 세상과 만난다.

“다친다. 뛰지 마라.”

어른들의 목소리는 이내 웃음소리에 파묻혀 버린다. 소용이 없다. 뛰고 뒤쫓아 오더라도 제발 넘어지지 말기를. 다치지 말기를. 기도할 뿐이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자취를 감췄던 해가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기웃기웃 산을 넘어가고 있는 저녁. 늘 그렇고 그런 하루를 보내고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같지만 또 다르다. 오늘은 흐릿한 하늘 사이로 좁쌀모양의 파랑이 수를 놓았다. 장마철이다. 세차게 비가 내리더니 지금은 그쳤다. 파란 서쪽 하늘로 분홍빛 해가 구름에 가려지기를 여러 번 반복하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천둥과 번개까지 내리쳤다. 번쩍번쩍 한적한 산동네를 비추더니 이내 ‘크르릉 쾅쾅’ 천둥소리가 뒤따랐다. 새벽녘이었다. 잠을 자던 아이가 뒤척였다. 감고 있던 눈으로는 번쩍이는 섬광이, 듣는 귀로는 천둥소리가 다가왔기 때문일 터이다. 조금은 무서운 지 살며시 내 몸을 꿈결같이 감싸 안았다. 내 얼굴을 따뜻한 아이의 손이 몇 번 휘감고 지나갔다. 나도 가만히 아이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꿈같은 현실, 현재 같은 꿈으로 밤은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아이의 등을 보듬었던 내 손이 아이의 발바닥에 놓여 있다. 아이는 밤새 꿈속에서 뛰어 다녔는지 잘 때와 180도 자세가 바뀌었다. 새벽녘 천둥소리에 품속으로 파고들었던 아이를 끌어안고 등을 보듬어 주었다. 아침의 눈뜬 풍경은 달랐다. 아이의 머리는 내 볼록 튀어나온 배에 와 있고 아이의 발이 내 얼굴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직도 잠에서 깨지 않은 아이는 포근한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아이의 발바닥을 가만히 간질러 본다. 아이의 발바닥이 화들짝 놀란다. 뻗고 있던 다리를 무의식적으로 오므린다. 잘 때와 거꾸로 자세가 된 아이는 잠속에 빠져 있다. 이른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창문 너머로 가만히 들려왔다.

휴대폰에 사라 맥라클란의 ‘앤써(Answer)…’라는 느린 빠르기의 반주 음이 들린 것은 집에 도착하기 30여분을 남겨 놓은 순간이었다. 장맛비가 잠시 주춤거리고 하늘에는 조각조각 파랑이 보일락 말락 하는 찰나였다. 또 다시 비가 시작되려는 듯 저 멀리에서 천둥소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내 휴대폰 벨소리는 ‘앤써’이다. 

5년 전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눈도 뜨지 못하고 뭐가 그리 서러운지 소리만 질러댔다.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도록 꽁꽁 몸을 친친 묶어 놓았다. 그 좁은 공간을 허우적거리면서 울어댔다. 엄마 뱃속이 포근했는데 왜 끄집어냈느냐고 온 몸으로 반항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는 자연분만으로 나오지 못했다. 10개월이란 긴 시간을 엄마의 자궁에서 무엇하나 부러울 것 없었던 아이는 때가 되면 자신이 박차고 나와야 하는데 아이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첫째 아이를 제왕절개로 낳았다. 둘째아이도 수학 공식처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품속을 벗어나 세상과 만나야 한다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적당한 시기와 수술날짜가 비어있는 시간을 정해 아이는 의사의 손에 들려 나왔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얼마나 세차게 울었던지 이마에 실핏줄까지 선명했다. 입술은 울음소리와 함께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입술이 파랬다. 아이는 그렇게 세상과 만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런 아이가 5년이란 세월을 겪고 세상을 뛰어 다닌다. 휘젓고 다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뛰어 가다 넘어져서 많이 다녔나 봐. 할머니가 지금 전화 했어.”

아내였다. 어린이 집에서 뛰어가다 넘어져서 얼굴을 많이 다쳤다는 기계음이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아내도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한다.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는 학원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할머니가 아이들의 휴식처이자 놀이 동무가 된다. 물론 큰 아이는 학교를 다니고 작은 아이는 어린이 집을 간다.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두 아이는 집으로 돌아온다. 아침에 ‘다녀오겠습니다.’라며 배꼽에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했던 작은 아이가 많이 다쳤다는 소식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천둥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주춤했던 비가 다시 시작될 모양이었다. 어느새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였다. 해는 이미 서쪽 산으로 숨어 버렸다. ‘많이 다쳤나 봐’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차안에 가득 찼다. 아직도 집에 도착하려면 30여분이 더 걸릴 터인데. 도대체 얼마나 다쳤기에. 그것도 얼굴이라고? 아내와 전화를 끊고 집으로 휴대폰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반복적으로 전달됐다. 이윽고 큰 아이가 전화를 받았다. 큰 아이는 씩씩한 목소리로 오늘 학교에 잘 다녀왔노라고 먼저 말했다.

“아빠! 응. 많이 다쳤어. 얼굴에 밴드가 닥지닥지 붙어있어.”

큰 아이도 작은 아이의 얼굴에 붙어 있는 밴드를 설명해 주었다.

“좀 바꿔줄래?”

작은 아이와 통화하고 싶었다. 큰 아이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전화기 저 너머로 작은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작은 아이가 전화를 받았다.

“아~빠…”

조금은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여느 때와 달리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 얼굴에 상처가 많이 났다면 입술 주변이 부어있을 것이고 말을 하는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많이 다쳤어?”

내가 묻는 말에 아이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아이가 대답했다.

“아니. 많이 안 다쳤어.”

큰 아이는 작은 아이의 얼굴에 밴드가 많이 붙어 있다고 전했다. 어린이 집에서 임시방편으로 다친 얼굴에 밴드를 붙여 주었나 보다. 그런데 작은 아이는 내가 묻는 말에 많이 다치지 않았노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울었어?”

“아니. 내가 왜 울어?”

오히려 내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저 멀리 전화기에서 아이의 또렷한 말이 울려 퍼졌다.

“아팠을 것 아니야. 정말 안 울었어?”

“응. 내가 왜 울어? 나 안 울었어.”

아이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울지 않았다고. 자신은 넘어져 다치기는 했지만 절대 울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있었다. 왜 자신이 울었을 것이라 생각하는지 아빠의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결코 울지 않았음을 여러 번 강조했다. 아이를 병원에서 처음 보았을 때 입술이 파르르 떨리면서 세차게 울어대던 그 모습이 겹쳐졌다. 정말 울지 않았을까?     

“그래? 안 울었구나. 잘 했어. 근데 왜 넘어졌어? 어린이집 바깥에 있는 시멘트 바닥에 넘어졌다면서?"

아내는 전화로 아이가 점심을 먹고 어린이집 현관문을 열고 놀이터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놀이터로 가는 길은 시멘트 바닥으로 돼 있었다. 그 시멘트 바닥에 넘어져 얼굴 이곳저곳에 상처가 났다고 했다.

“시멘트 바닥에 넘어졌지. 아이들이 막 쫓아오는데 내가 도망갔거든. 한명도 아니었어. 여러 명이 나를 쫓아왔어, 막 달아나다 넘어진 거야.”

아이는 또렷한 목소리로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었다.

“누가 쫓아 왔는데?”

이 질문에 아이는 잠시 동안 망설이는 듯 했다. 그리고 머릿속이 정리가 된 듯 술술 뒤쫓아 오던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었다. 다섯 명 아이들의 이름이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가 가만가만 던져주는 이름은 모두 내가 알기로는 여자아이들이었다. 언젠가 어린이집에서 학부모 참여수업이 있었다. 그때 내가 참석한 적이 있었다. 모두 엄마가 왔었다. 아버지가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아내가 ‘이번에는 당신도 한번 가봐.’라는 권유를 내가 받아 들였었다.

그때 아이의 친구들 이름을 일일이 물어본 적이 있다. 이름과 얼굴이 하나하나 일치되지는  않지만 아이가 말해주는 이름은 분명 여자 아이들 이름이었다. 뜬금없이 아이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그래? 모두 여자애들이네.”

“그렇지. 맞아. 여자애들이야.”

“여자애들에게 인기 많은가 보다. 근데 왜 넘어졌어? 조심했어야지!”

아이는 이 질문에 쉽게 말을 건네 오지 못했다. 음……음……하면서 한참이나 망설였다. 아이 자신도 넘어진 것에, 여자아이들이 쫓아오는데 덜커덩 넘어져 얼굴을 시멘트 바닥에 갈아버린 것에 대해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러더니 대뜸 대답하는 말이 나를 긴장시켰다.

“그럴 수도 있지. 아빠는 그런 적 없어?"

그래, 그럴 수도 있다. 난 아이의 대답에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아이는 뛰어다니며 세상을 보고 느낀다. 뛰어 다니는 그 공간이 아이의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두렵기도 하겠지만 아직은 신기하고 많은 공간을 뛰어 다니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나도 세상을 뛰어 다닌다. 조심해야지 하면서도 결과적으로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일이 어디 한둘인가. 아이는 벌써 그런 세상을 알고 있단 말인가?

“얼마나 다친 거야? 얼굴에 밴드는 몇 개나 붙였어?”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가장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다. 아내의 말만으로 머릿속에 아이의 얼굴에 실지렁이처럼 굴곡진 상처를 떠 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아이가 밴드를 몇 개나 붙였는지 알려주면 ‘밴드면적 X 개수’로 얼굴의 몇 %가 상처에 얼룩졌을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는 역시 이 질문에도 많은 생각을 하는 듯 시간을 끌었다. 얼굴에 붙어 있는 밴드 수를 일일이 세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뒤 아이는 결심한 듯 설명을 해 왔다. 설명이라기보다는 설득하는 말이었다.

“내가 말한다고 아빠가 알겠어? 아빠! 지금 집에 오고 있는 중이지? 그럼 집에 와서 봐. 아빠가 집에 오면 내가 얼굴을 직접 보여줄게.”

씩씩하다 못해 나를 놀리는 듯 한 말투였다. 백문 불여일견(百文 不如一見)이란 말인가. 뭘 그런 걸 꼬치꼬치 캐묻느냐는 듯, 나를 조롱하는 듯 한 여섯 살 아이의 전화 목소리. 자신이 설명해도 아빠가 정확히 알 수 없고, 또 자신이 잘 설명해 줄 수 있을 지도 모르니 직접 와서 보면 되지 않겠느냐는 아이의 대답이었다. 대답이라기 보다는 나를 설득하는 아이의 작은 입술이 놀라웠다.

넘어진 아이는 울지 않았다고 했다. 어린이집에서 공부를 마친 뒤 놀이터로 향하다 여자아이들 몇 명이 ‘잡기 놀이하자’는 말에 부리나케 달렸다. 한명도 아니고 여럿 명이었으니 있는 힘껏 달렸을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이치였다. 쫓아오는 여자아이들은 함성을 내질렀을 것이다. ‘도망간다! 잡아라.’라고. 아이는 아직 자신의 의지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속도의 발을 가지지 못했다. 의지는 앞서지만 발이 말을 듣지 않는 불일치 속에서 앞으로 쿵하고 넘어졌을 것이다. 그 속도에 못이긴 아이의 얼굴이 시멘트 바닥과 키스하고, 그 잠깐의 달콤한 키스는 아이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끝을 맺었다.

아이는 뛰어 다니며 세상을 느낀다. 그러다 보면 상처가 생긴다. 어른들이라고 다른가. 세상과 부닥치면서 외상이든 내상이든, 피부가 터지든 마음이 멍들든 상처가 생기지 않는가. 아이는 그런 상황을 두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했다. 울지 않았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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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정종오 정종오